<한국영화의 연륜을 밝힌다>(1961)

영화사가 노만 94

by 유창연

한국영화의 연륜(年輪)을 밝힌다:

40년설의 오류를 시정하며


노 만


한국영화가 탄생한 이래 근년에 와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질적인 향상은 물론 양적으로도 과거 일제 하의 총생산량인 200본 내외를 단 1년간의 생산본수가 이를 육박하고 있다. 비록 동시녹음은 못하나마 ‘토오키’의 기술적인 향상과 대형영화의 출현 및 색채영화의 등장 등은 우리 영화사에선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연간 생산량에 비해선 극소수의 우수작이 국제무대에 나가서 미미하나마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 역시 유사 이래의 것이었다. 이런 일들은 타 부문에 비긴다면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술적 기계적(과학적) 및 내용적(작가정신)으로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었다.

아직도 많은 문제가 미해결의 상태로서 있지만- 이러한 우리 영화가 벌써 40돌을 맞게 되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국제영화전을 서울에서 개최케 된다고 한다. 기쁜 소식이다. 비록 한국영화인의 손으로 이루어는 일은 아니지만 당국의 후원까지 얻어서 행하가 된다니 더욱 고마운 일이다. 많은 사람이 일생을 한국영화에 헌신했지만 그들의 노고를 단 한 ‘페이지’에라도 기록한 사실이 없는 오늘날의 한국영화계에서 이러한 행사가 거행된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의문이 있다. ‘한국영화 40주년 기념’이라면 최초의 영화가 1921년에 제작됐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1921년에 제작된 영화가 없다. 몇몇의 기록에는 1921년도에 윤백남의 <월하의 맹세>가 발표되었다고 되어있으나 그것은 따져보면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었다. 이 <월하의 맹세>는 1923년 4월 9일에야 시사회를 가졌다. 한국 최초의 극영화라고 일컬어지는 <춘향전> 역시 그해 여름에 상영되었었다. <월하의 맹세> 이전에 제작된 작품은 없고 조선총독부에서 <위생사진>이란 극적 요소가 약간 가미된 영화가 있었으나 이것 역시 발표되기는 1923년 4월 19일이었다. 단지 1921년에 발표된 것이란 당시 경기도 지방과에서 제작한 창경원 동물원에서의 실태와 농장을 소개한 1권짜리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한국영화의 최초의 작품이라곤 할 수 없다.

영화(당시 활동사진)가 처음으로 수입된 것은 1900년이었고 소위 연쇄극이락 해서 한국 배우가 최초로 출연한 것이 1920년이었다. 이 연쇄극이라는 것은 연극에서 막과 막 사이 연속되는 사건을 촬영하여 상영하던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 연쇄극이 등장하게 된 연유는 신파극단 구제책의 한 방법이었다.

그 당시의 신파극단 혁신단 임성구 일행, 취성좌 김소랑 일행, 신극좌 김도산 일행, 문예단 이기세 일행 등의 4개단체가 있었다. 그때는 이미 신파 측이 관객의 흥미를 잃게 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위기의 타개책으로 김도산 일행이 일본에서 촬영기사(성명불상)를 데려다 제작한 <의리적구투>가 예상 외의 성공을 가져오자 이기세 일행도 촬영기사 이필우와 함께 연쇄극 <지기>, <황혼> 등의 작품을 제작했고 임성구 일행 또한 <학생절의>, <보은> 등의 작품을 뒤이어 발표하게 됨에 따라 연쇄극 ‘붐’을 형성하게 됐다. 이 연쇄극 ‘필름’은 약 1000 ‘피트’의 것으로 제작비는 ‘피트’ 당 1원이란 고가였다. 그러나 의외의 흥행 성적으로 이 고가의 제작비를 회수하는 것은 문제도 안되었다.

이 연쇄극이 곧 극영화를 탄생케한 원동력이 되었으니 영화를 제작해도 흥행이 되리라는 점이었다. 이리하여 영화제작의 준비를 서두르게 됐으나 감히 제작을 착수한 사람이 없었다. 그 원인은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당시 서울만 해도 이 촬동사진 상설관이란 단 두 곳 우미관, 단성사(1922년 말에 조선극장이 개관)뿐이었으며 전국적으로 대구, 평양, 인천 등지의 7, 8개관 밖에 없었으므로 작품을 소화시킬 수 있는 시장이 없었다.

한편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활동사진으로 국민계몽운동을 전개코자 경기도 지방과에서는 6천원이란 예산을 세워 촬영기 및 필름을 구입하여 단권짜리 실사영화를 제작하였다(1921년). 이 경기도 지방과에서 제작한 실사영화는 그 이듬해인 1922년 9월에 서울에서도 상영하였다.

또한 총독부 체신국에서도 저금사상을 선전하기 위하여 연극계에서 활약하고 있던 윤백남 씨를 맞아 <월하의 맹세>를 제작했다(1923년).

“톄신국(遞信局)에서는 시내 경성 ‘호텔’에서 각 신문 통신사 기자와 및 관계자 백여명을 초대하여 그 필림의 시험 영사를 하였는 바 각본은 윤백남 군이 만든 <월하의 맹서>라는 이천척의 긴 사진으로 내용이 매우 잘되어 크게 갈채를 받았으며 필림은 경성을 비롯하여 각 디방으로 가지고 다니며 저금을 선전할터이라더라”(1923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호평을 받은 이 <월하의 맹세>는 윤백남이 창립한 민중극단(1922년) 단원들의 출연으로 완성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비록 선전영화이기는 했으나 극성을 띠운 최초의 장편적인 영화였다. 그러나 이 <월하의 맹세> 보다 약 3개월 앞서 단성사에서 개봉된 <국경>이란 전 10권으로 된 작품이 있었으니 한국영화의 최초의 영예는 <국경>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허나 이 <국경>에 대한 자료가 하나도 없으므로 그 작품이 과연 한국인의 손으로 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도리 조차 없다. 여기에 의심이 가는 것은 이 작품이 불과 3일간으로 흥행이 끝난 점이다. 또 하나는 이 <국경>이 상영된 2년 후 동아일보 지상에 한국최초의 작품은 <춘향전>이라고 한 것을 보면 최초의 극영화가 아닐런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는 좀 더 연구해볼 여지가 없지 않다.

그 당시 장편영화 제작비는 7, 8천원이란 거액이 필요함으로 감히 영화 제작에 손을 뻗치는 사람이 없었다.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당시 서울(경성)에는 일인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일인 측 영화상설관과 한국인만을 상대하는 조선인측 상설관이 있었다. 일인측 상설관인 황금관의 경영자 조천고주(하야카와 고슈, 본명 조천송이랑)는 재빨리 동아문화협회란 영화제작회사를 창립하여(1923년) 곧 <춘향전>(전9권)을 제작 착수했다. 조천은 고주란 이름으로 자신이 이 작품의 각색, 감독을 담당하여 당시의 인기 변사였으며 신파배우 출신인 김조성을 기몽룡으로 분장, 예기라 불리우는 기생을 춘향으로 등용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춘향전>은 예기(豫期)했던 이상으로 개봉관에서 제작비를 회수하게 되었다. 여기에 힘을 얻은 단성사에서도 연예부를 두어(1924년 7월) <장화홍련전>(전8권)을 제작 완성했다(1924년 9월). 제작 박승필, 각색 김영환, 감독 박정현, 촬영 이필우, 자막 김학근, 주연 김옥희, 김운자.

이 작품은 한국영화 최초로 우리의 손으로 완성한 작품이며 흥행도 성공이었다. 이상으로 대강이나마 초기의 작품을 더듬어봤다. 먼저 연쇄극, 저금선전영화인 <월하의 맹세>, 최초로 한국 고유의 ‘스토리’와 한국인 배우가 등장한 영화 <춘향전>, 한국인의 자본 기술 두뇌로 완성한 <장화홍련전> 등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연쇄극을 한국영화의 최초의 작품으로 인정치 않는다는 데는 이의가 없겠다. <월하의 맹세>는 극성은 내포하고 있으나 목적의식이 앞선 영화였다. 극영화로서의 의의는 재고의 여지가 없지 않다. <춘향전>은 외국인의 자본, 기술, 두뇌로 이루어졌다. 이 작품에 대하여서는 한국의 작품이냐 아니냐에 대한 문제가 적지 않다. 단지 한국인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것과 한국 고유의 이야기라는 데 미련이 남을 뿐이다. 엄격히 따진다면 이 작품은 한국을 무대로 한국을 그린 외국 작품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 최초의 영화로서는 <장화홍련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찬란하고 유구한 역사’를 지나치게 들먹거린다. 그 유구한 역사가 오늘날에 와서는 그리 대단한 것은 못된다. 한국영화의 역사가 깊다고 한국영화 자체의 품격이 오르거나 비약의 발전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좀 더 진격한 태도만이 필요하다. 한국영화계로선 모처럼의 국제적인 행사에 임하게 되었는데 그 ‘찬란, 유구한 역사’를 들먹이다가 망신이나 말았으면 하는 노파심이 생긴다.

‘4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은 도시(都是) 무엇에 근거를 둔 계산인지 알 수 없다. 하기는 <월하의 맹세>가 몇몇 책자에 1921년도 작품으로 명기되었으니 이러한 계산이 나올 수 있겠다. 이런 오전(誤傳)은 하루 속히 정정되어야 할 문제다. 이 ‘40주년’은 <월하의 맹세>를 최초의 작품이라 쳐도 ‘38주년’이 옳은 계산임을 재언(再言)하는 바다. (영평 회원)


(대한일보 1961년 2월 15일~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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