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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10. 2024

서울고 문예반과 교지 《경희》

영화사가 노만 18

서울중고등학교 교지 경희 1집(1948년, 노만 소장 기증본), 4집(1952년), 5집(1954년) 표지. ⓒ 서울고총동창회 홈페이지.

노만이 1947년 3월부터 1954년 2월까지 재학한 서울중고등학교는 김원규 교장과 그가 초빙한 교사들과 더불어 해방 이후 재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명문학교'로 손꼽혔다. 약 3만 8천여평의 옛 경희궁 부지에 교직원 관사를 갖춘 학교 규모는 당시 중고등학교로서는 드문 것이었다. 특히 학풍의 기틀을 만든 김원규 교장의 '스파르타식' 교육은 유명했다.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지키자'라는 교훈을 내건 김원규 교장은 "어디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훈화를 특히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학칙도 매우 엄격했다. 용모나 복장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짐이 적발되거나, 낙제를 할 경우 '정학' 아니면 '퇴학'이었다.

노만의 재학 시절 발간된 《경희》 창간호(1948)와 제4집(1952), 제5집(1954)은 이러한 당시 서울중고등학교의 교육적 지향과 학내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사료이기도 하다. 1948년 12월 첫 발간된 서울중고등학교 교지 《경희》의 제목은 김원규 교장의 친필이 제자(題字)로 쓰였고, 이는 학교가 자리하던 경희궁 부지의 '경희'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교지의 편집과 발간은 교내 문예반이 주도하였는데, 특히 제4집과 제5집은 고교 시절 노만이 수록 작품을 집필하고 교지 편집을 직접 주도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를 지닌다.

《경희》 창간호 권두의 <마음이 바르고 한가지 기능에 뛰어나는 사람이 되자>라는 제목의 머리말은 "학교 교육의 근본 목적은 바른 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한 개인이 잘 되고 한 국가가 번영하고 전인류가 다같이 평화를 즐기려면 한 개인이나 한 국가나 전 인류가 다 같이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 모략이나 술책으로 혹 일시 성공할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은 정의가 이기는 법이다.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우리나라 백성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2쪽)는 김원규 교장의 훈화로 시작된다. 이어서 교사 김기석의 <새 조선의 학생에게>(4쪽), 교사 조영식의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영웅>(18쪽), 교사 마선환의 <극기하라>(52쪽), 교사 강봉식의 <비판의 정신>(45쪽) 등의 글은 특히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사회에 걸맞는 학생으로서의 자세와 책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문예 분야와 관련해서는 소설가이자 국어 교사였던 김송의 <연극의 본질>(47쪽)이 수록되었다. 시기 김송은 국어 담당 교사이자 연극반 지도교사이기도 했다. 뒤이어 교지의 후반부에는 예반 학생들의 자작 시와 동요 등의 문예 작품이 다수 수록되었다.

1952년 12월 부산에서 발간된 《경희》 제4집은 전쟁 중 부산과 서울로 분산 운영되던 학교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민족적 비극인 6.25 사변으로 인하여 교사는 파괴되고 우리 교우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지금 부산에서 내가 조석(朝夕)으로 대할 수 있는 학생들이 9백명 가량 되고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학생이 서울에 8백여명 있으며 대구, 대전, 수원 등지에서 산재한 학생들이 수백명이다. 그리고 전에 학창을 떠나 일선에서 싸우는 사람들 불행히 전사하였거나 혹은 부상을 입어 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우리 교우들이 상당한 수에 달하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김원규 교장의 권두언 <사랑하는 교우제군들에게>(2쪽)은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어 <우리 고교생의 나아갈 길>이라는 특집으로 교사 안병욱의 <네 발밑을 파라>(96쪽), 교사 유창돈의 <고원실장>(112쪽) 등의 글은 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학내 분위기와 학생들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그 밖에 <자치시험을 평함>(138쪽)이라는 글에서는 서울고 특유의 무감독 시험에 대한 앙케이트 설문 조사를 싣기도 하였으며, 권말에 수록된 <경희비망록>(146쪽)은 전쟁 발발 이후 서울과 부산에서 운영된 학교 행사 및 연혁을 수록하고 있고, <호국단 일년의 움직임>(147쪽)은 부산 분교와 서울 본교에서 진행된 학도호국단의 활동 현황을 싣고 있다. <운영위원회>(148쪽) 란에서는 학술부 산하 생물반, 영어반, 변론반, 음악반, 연극반, 미술반, 문예반, 체육부, 종교부 등의 활동 현황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노만이 참여하고 있던 문예반의 활동 현황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서울고등학교 교지 《경희》 4집 문예반 소개 (교지 《경희》 4집, 서울고등학교, 1952, 149쪽)

"[문예반] 작년에 《경희》제3집을 발간한 후로는 김소운, 김동리 제씨의 문학 강좌를 열었고 수차의 작품 낭독회를 열었다. 7월에는 《문예경희》 제1집으로 십여편의 시를 갖고 시집을 발행했고 신학기부터는 경희 제4집 발간에 온힘을 다 쏟고 있다. 앞으로 신인반원의 모집을 계기로 하여 문예강좌와 토론회, 낭독회 등을 가질 예정으로 활약이 기대되며 소설가 황순원 선생, 시인 조병화 선생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이 문예반의 큰 자랑이며 실력있는 신인을 많이 길러내왔다."(교지 《경희》4집, 149쪽)


노만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52년 부산에서 교지 《경희》 4집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고 여기 수록된 소품 단편소설 <소년차장>을 썼다. 이듬해인 1953년 서울로 다시 복귀한 노만은 본교에서 그해 2학기 내내 교지 《경희》 5집의 제작과 편집을 주동하고 이에 몰두하는 한편, 여기 수록되는 단편소설 <수건>을 썼다. 노만은 이 시기 교지 제작 경험이, 훗날 영화잡지 기자와 편집장을 역임하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잡지 제작과 발간에 열의를 쏟게 되는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서울고등학교 본관. 1953년.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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