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가 노만 87
[영화연구] 영화작가론 ①
춘사 나운규 (春史 羅雲奎)
노 만
변형된 인간상
1923년 한국의 흥행 극영화가 제작된 이래,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이 등장하기 까지의 한국영화는 활동사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습작물이었다.
1926년 춘사의 <아리랑>이 등장하면서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은 물론, 예술로서의 영화로 출발하게 되었다.
<아리랑>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거의 일본인에 의하여 '돈벌이 흥행영화'로 스토리텔링에 급급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작, 각본, 감독, 촬영 등의 중요 분야는 모두 일본인에 의존하고 있었다. 1923년 일본인 하아카와 고슈에 의해 설립된 동아문화협회가 첫 작품으로 <춘향전>을 완성했을 때 하야카와가 제작, 각본, 감독을 담당했고 김조성(이도령 역), 한룡(춘향 역) 등 한국인 배우가 출연했었다. 이는 곧 일본인이 한국 관객을 위해 만든 일본영화라고 단정할 수 있을 정도였고 또한 흥행사인 조천(하야카와)이 '돈벌이'에 <춘향전>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과연 흥행에 성공하여 한때 조선극장까지 인수경영하였으니 그 당시 관객이 위장된 한국영화에 갈채를 보낸 것 만은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초창기의 한국영화가 일인에 의해 지배되고 있을 때, 춘사의 <아리랑>이 제작 발표된 것은 특기할 기적적인 사실이었다. 특히 이 해에 와서 조선총독부의 영화 검열은 더욱 강화되어 지금까지의 풍기 문제, 폭력 등에 가위질하던 것을, 민족적인 사상, 고취의 내용이 조금이라도 담겨있으면 컷트 당했다. <아리랑>의 주인공 '영진'을 광인으로 설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고 광인의 무차별한 행동으로 일제 검열관의 날카로운 가위질을 피하려고 한 것이었다. 즉, 춘사는 <아리랑> 작픔 속에 '고양이와 개'라는 대립적 개념의 아나로지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즉 일제와 그 편승세력과 무력한 조선민중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것이 '고양이와 개'의 관계처럼 빙염불상객의 적대관계에 있음을 <아리랑>은 첫머리에 선언하였다. 이러한 관계에서 억눌린 민중의 한 사람인 '영진'이 지배자의 권력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를 그러한 비뚤어진 정상관계에서 소외시키는 방법이다. 따라서 춘사는 '영진'을 광인으로 설정시킴으로서 오히려 비뚤어진 현실(한일합병같은…)을 바로 볼 수 있는 입장을 마련케 한다. 이것은 '영진'에게 행동의 자율성과 의식적 행동을 감행할 수 있게 한다.
일제가 볼 때는 광인의 짓이니까 성격을 파산한 인간의 짓이 되는 것이다.
춘사의 이 변형된 인간상의 창조는 불가피한 현실이고 보면 그 억압된 '표현의 자유'에서 '상징된 세계'로 파고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영진'의 환상-- 사막에서의 '대상의 물'은 곧 일제를 상징하고 일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며 저항이었다. 이 장면은 영화기법 상으로 볼 때에도 뛰어난 표현방법이었다. 이 심리적 몽따쥬의 성공은 곧 영화예술로 출발한 시발점이며, 춘사의 공적의 하나였다.
데뷰 전(前) (1902~1923)
춘사 나운규는 1902년 10월 27일 함북 회령에서 나형권의 육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상도에서 이주하여 6대째 살고 있던 회령은 옛 육진의 하나인 성곽도시이며 두만강에 임한 국경 무역도시로 일찍이 개화된 곳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나형권은 구한말의 군인으로 계급은 부교(副校)였다. 통칭 나부교였던 형권은 한일합병이 된 이후로는 한방의로 전향하여 중류생활의 가정을 꾸미고 있었다. 나운규 위로 민규(珉圭), 시규(始圭) 두 형이 있고 아래로는 여동생 사규(四圭), 오규(五圭), 필규(畢圭)가 있었다. 춘사는 15세때 회령보통학교를 거쳐 신흥고등소학교에 입학했다. 이 신흥학교는 밋숀계 학교로 보흥여학교와 같이 경영되어 오던 유수한 학교로 운규의 가장 안정된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가 졸업하자마자 전에 보흥여학교의 여학생 윤마리아와의 연애사건으로 인해 졸업장을 받지 못한 채 1918년 간도의 명동중학교로 전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조혼의 풍속대로 열다섯에 장가들었으나 연상의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낳았다.
춘사는 작품 <들쥐>에서 윤마리아와의 이루지 못한 사연을 소재로 그 꿈을 재현시키고 있다.
간도에서의 생활은 춘사로 하여금 새로운 체험을 가져다 주게 하였다.
사실 간도는 한일합병 이후 망명객의 거점이었으며 이향실형민들의 집결지였다. 더구나 명동중학은 사실상 독립군 양성소나 다름 없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춘사도 여기에 가담, 소위 제령(帝令) 위반으로 몸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듬해 명동중학도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고 간도에서도 몸 담을 곳이 없게 되자 로서아로 건너갔다.
정처없는 방랑길에서 춘사는 호구지책으로 로서아 백군(白軍)에 입대했으나 인종차별과 학대에 못이겨, 그 해 가을 두 사람의 한국친구와 함께 탈영했다.
춘사는 그때 탈출과정을 「나의 로서아 방랑기」로 잡지에 집필한 바 있지만 며칠을 굶으며 도보로 훈춘(琿春)을 거쳐 북간도로 향하였으나 수중에는 무일푼이었다.
…… 어이하여 구걸을 못하느냐고 묻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백인의 모욕으로만 살아온 자들이다. 이 중에 어느 누가 황인종도 사람으로 여겨주는 집을 찾으러 걸인행세로 가가호호 돌아볼 사람이 있느냐. 여기서 삼십리만 더 가면 조선인 부락이 있다 하니 그 부락에 가기까지는 굶어도 좋다는 것이 우리의 결의였던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은 갈증을 참을 수 없어 어느 농가에 들려 물을 얻어 마셨다.
로서아의 촌부는 그들이 먹은 유리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것을 보고 뼈저린 후회를 했다.
춘사는 이 때의 일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체험으로 간직했다.
훈춘에서 춘사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무리한 생활로 춘사는 이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1921년 춘사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상경(上京) 중동중학에 입학했다.
이 시절에 그는 문학서적을 탐독했고 영화에 이끌려 매일같이 영화구경을 하며 노-트에 메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순탄하게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은 길지 못했다.
그 이듬해 춘사는 일경(日警)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복역, 1923년 여름에 출옥하였다.
데뷰 후(1924~25)
1923년 동아문화협회(東亞文化協會)의 <춘향전>이 흥행에 성공하자 극영화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이듬해에는 단성사 영화제작부가 설치되어 <장화홍련전>이 상영되었고, 부산에서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발족했다. 일본인의 투자로 이루어진 이 회사는 공칭자본금 20만원의 대규모로 스튜디오와 라보를 갖춘 영화사였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상영하기 위해 일활(日活, 니카츠) 배급망과 제휴하여 출발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와의 첫 작품은 <해의 비곡>이었다. 안종화, 이월화, 이채전, 이주경, 유영로, 이경손 등이 전속되어 있었고 일본인 고좌관장(다카사 간조(高佐貫長), 조선명 왕필렬)이 주관하고 있던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영화기업화를 위해 한국인 감독이 필요했다.
당시 ‘조선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것은 한국 사람이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었으니 고좌관장이 왕필렬로 개명한 것은 관객의 요구에 의한 결과였다. <월하의 맹서>를 감독한 바 있는 윤백남을 초빙하게 된 것도 실제 한국인 작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춘사는 출옥 후 ‘예림회(藝林會)’ 극단에서 잠시 인연을 맺은 바 있는 안종화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이 중요 위치에 있음을 알게 되자, 다시 계속하던 학업도 중단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연구생 자격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주인규, 김태진 등의 예림회 시절의 동료들이 입사해 있었다.
춘사는 <운영전>에서 데뷰했다.
한국고전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윤백남 각본, 감독에 주연은 안종화, 김우연이었고 춘사는 엑스트라에 가까운 가마꾼으로 등장했다.
1925년 윤백남은 <운영전>을 끝내고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사퇴하고 상경했다.
그때 그와 행동을 같이하여 상경한 사람은 이경손을 비롯하여 일본인 서천수양, 윤갑용, 김태진, 주인규, 나운규 등이었다.
윤백남프로덕션의 <심청전>에서 춘사는 일약 주연급인 심봉사 역을 맡았다. 이경손 감독의 이 작품은 흥행에 실패하여 춘사의 열의에 찬 연기도 빛을 내지 못했다. 이어 이광수 원작의 <개척자>가 이경손 각본 감독으로 영화화되었으나 춘사는 적역을 얻지 못했고 오랜 제작시일에 결국 고려키네마 명의로 완성했다. 이어 조일제가 설립한 계림영화협회에 전 멤버가 참여하여 <장한몽>을 제작했으나 춘사에겐 이렇다 할 역할이 돌아오지 않아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이탈하고 말았다.
춘사시대 (1926~29)
1926년 일본인 정(淀, 요도)가 조선키네마를 창립했다. 조선키네마사의 운영은 진수수일(津守秀一, 쓰모리 슈이치)이 담당하여 <농중조>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당시 일본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던 유행가의 영화화로 이규설 감독에 복혜숙, 이규설 주연, 나운규가 조연을 맡았다. 이 작품에서 나운규는 적역을 얻어 연기자로서 인정을 받았고 그 뛰어난 연기력에 모두 감탄했다.
춘사의 진면목을 보이게 되자 진수는 그 재능을 아끼게 되어, 명화 <아리랑>이 탄생케 된 계기가 됐다.
춘사는 부산 시절에 이경손의 지도를 받으며 그의 민요 노-트에서 민요 아리랑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민요 아리랑에 담겨진 민족의 이 비애를 스크린에 재현시키려고 틈 있는 대로 적고 있었다. 북간도에서의 생활, 로서아 방랑시절 그리고, 2년 가까운 형무소의 복역 생활에서 얻어진, 나라 없는 민족의 뼈아픈 시련을 한시도 잊을 수 없다.
춘사는 그 체험에서 얻어진 소재를 민족 감정의 뜨거운 불길 속에서 차츰 영상화시켜가고 있었다.
조선키네마의 제2회작으로 나운규의 <아리랑>이 결정되어 착수했다. 그러나 각본, 감독은 김창선이란 명의로 발표하게 됐으니, 김창선이란 바로 진수(津守, 쓰모리)의 한국 이름이었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영화 검열이 가혹하여 조금이라도 민족 사상이 담긴 작품은 여지없이 컷트 당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고유의 서정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울분으로 엮어진 <아리랑>이 횃불을 보긴 힘든 일이었다.
<아리랑>이 상징적 수법으로 제작되기는 했지만 검열의 관문을 뚫고 일반에게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유력한 일본인이 경영하는 작품이었던 때문이다.
조선키네마는 춘사의 <아리랑>이 흥행적인 대성공을 거두자 그로 하여금 계속 작품 활동을 시켰다.
<아리랑>으로 선풍적 인기 속에서 춘사는 각본, 감독, 주연을 독차지하여 영화계의 제1인자로 군림했다.
1926년 <아리랑> 이후 1929년의 <벙어리 삼룡>까지는 사실상 춘사 시대라고 할만큼 영화계는 나운규의 독무대였다.
춘사는 조선키네마사에서 <풍운아>, <들쥐>, <금붕어>를 계속 제작, 발표했다.
<풍운아>에서는 로서아 방랑시절에서 얻은 체험을 토대로 사나이들의 우정에 세계를 휴머니티하게 그렸다.
<들쥐> 역시 젊은날, 이루지 못한 사랑을 스크린에서 맺게 해준 인도주의적 경향이 짙은 작품이었다.
특히 <들쥐>에서는 그의 어렸을 때부터 친구 윤봉춘을 등장시켰고 또한 이 작품은 검열에 걸려 무려 1권(卷)이나 잘려 나가게 되었다.
개작하여 상영했으나 흥행이 부진했다.
영화사측에서는 이로 인해 검열에 걸리지 않는 작품을 만들려고 춘사의 작품 활동에서 손을 떼었다.
<금붕어>가 바로 경영주와의 타협에서 만든 작품으로, 춘사의 둘도 없는 친구 김용국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으로 코믹·텃취의 영화였다.
춘사는 <금붕어> 이후 조선키네마사와 결별을 하게 됐다.
사실 조선키네마사가 전적으로 춘사에게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허용한 것은 그 재능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려는 목적이었고 춘사 역시 일본인 자본으로 자기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이점으로 결합했던 것이니만큼 서로 상반된 이해관계에서 출발한 그 유대관계는 이것으로 끝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1927년 조선키네마사를 탈퇴하여 독립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춘사와 행동을 같이 한 인물은 이명우, 이창용의 기술진과 주삼손(일인), 이경손, 윤봉춘, 이금룡, 전옥, 김연실 등이며 이에 연기진이 가담했다.
나운규프로덕션은 단성사의 후원으로 <잘있거라>에 이어 <옥녀>를 제작했다. 그리고 <사랑을 찾아서>는 조선키네마의 후원으로 제작됐다.
춘사가 탈퇴한 후 조선키네마의 김태진 감독 <뿔빠진 황소>를 제작했으나 춘사의 <잘 있거라>와 경합하여 흥행에 참패하자 다시 춘사로 하여금 조선키네마사에서의 작품 활동을 받아드린 것이다.
이 <사랑을 찾아서>는 두만강에서 북간도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현지 촬영을 감행한 춘사의 야심작이었다.
그러나 검열에 걸려 제목도 무려 세 번이나 바꿔야 할 만큼 애로가 컸었다.
원제는 <두만강을 건너서>였으나 불온하다 하여 <저 강을 건너서>라고 개명했었고 다시 이를 검열당국인 총독부 도서과에서 <사랑을 찾아서>라고 제명을 지어주었다.
이 검열 수난으로 춘사는 다시 조선키네마의 후원을 얻지 못한 채 <사나이>를 착수했다.
이 작품은 홍개명에게 연출을 맡기고 춘사는 출연만 했다.
이 무렵부터 춘사는 극심한 경제적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작품 활동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일 만큼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흥행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수입은 자본주에게 돌아가니 남는 것은 허탈감과 생활고 뿐이었다.
춘사는 이어 <벙어리 삼룡>을 제작 착수했다. 이 작품은 1928년 12월에 촬영 완료하여 그 이듬해 정월에 개봉했다.
결국 나운규프로덕션은 이 <벙어리 삼룡>을 마지막으로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상 영화제작을 할 수 없는 사회환경이었다.
1928년 여름, 호남 지방의 유사 이래 가뭄과 관북 지망의 수재, 대정(大正) 천황의 사망과 사상범들의 검거 등으로 사정이 악화되고 사회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이 천재와 사회적 악조건으로 모든 영화제작은 중단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춘사가 <벙어리 삼룡>을 마지막으로 그의 독자적인 영화연출을 그만 두었다는 것은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즉, 춘사가 <아리랑>에서 광인으로 등장했듯이 <벙어리 삼룡>에서는 하고픈 말을 토하지 못하고 안타까히 발버둥치는 ‘삼룡’으로 작품 의도를 표현하였고 이러한 춘사의 처음과 끝은 ‘미치광이’와 ‘벙어리’로서 변형된 이념을 부각시킨데 작가적 위대성과 특징이 있는 것이다.
병든 춘사(1930~37)
프로덕션을 해산한 이후의 춘사의 작풍은 완전히 전기(前期)와 구별된다.
1930년부터 그가 사망한 1937년까지 약 8년간의 그의 작품 활동은 마지막 <오몽녀>를 최우수작으로 남겼다. 1930년 <아리랑 후편>에 출연하고 이어 다음 해에는 <철인도>를 만들었으며 일인의 작품 <금강한>에도 출연했다.
1932년에 들어서 김옥균의 삼일천하를 그린 <개화당이문>을 착수하였다. 그 후 <임자없는 나룻배>에 머리를 깎고 출연했다.
이어 다음해 <종로>를 발표했으나, <칠번통의 소사건>, <무화과>, <그림자>와 같은 작품도 만들었다.
1935년에 들어서면서 <강건너 마을>을 발표하여 전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리얼리즘의 세계로 파고들어 <아리랑>과 같은 강렬한 주제의식에 육박했다.
이어 발성영화 <아리랑 3편>을 발표했으며 그의 최후작 <오몽녀>만이 빛을 냈다. 발성영화 <오몽녀>는 어촌의 서민 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이 시기부터 춘사의 사생활이나 작가적인 태도가 더욱 건실해지기 시작했다.
전기의 1인 3역을 도맡아 해내던 시기와는 달리 연출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불우하여 1937년 8월 9일 고요한 마지막 장막은 춘사 나운규의 예술과 영혼을 영원히 앗아갔다.
참고문헌
안종화 저(著), 『한국영화측면비사』
나운규, <나의 로서아 탐방기>, 《문예영화》 창간호
市川彩 저(著), 『アジア映畵の創造及建設』
이경손, <무성영화시대의 자전> (신동아)
(영화평론가) ■
(≪영화문화연구≫ 1970년 8월호(창간특집호), 한국영화문화연구사, 1970, 106~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