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가 노만 85
백남 윤교중: 최초의 감독 최초의 제작자
노 만
(전 한양대학교문리대, 영화사)
백남 윤교중은 영화작가로는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윤백남하면 일반적으로는 역사소설가로 혹은 야담가로 널리 알려져있다. 또 극단 문수성 창립자의 한 사람으로 신극운동을 전개한 공로자로 소개되어 있다. 최초의 영화감독으로, 최초의 독립프로덕션을 설립한 제작자로, 한국영화사 첫 장을 차지할 인물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백남 윤교중은 계보적인 면에서 볼 때 누구보다도 먼저 소개되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백남이 영화계에서의 활약은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고, 단 세 작품을 남겼을 뿐이다.
백남은 비록 짧은 기간에 활약했지만 그 선구자적인 역할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단 세 편의 작품을 놓고 '영화작가'로 운위하기 보다는 그가 남긴 공적을 지적해야 옳을 것 같다. 백남 역시 구한말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배우고 일제 하에 사회 생활을 했고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그로 하여금 민족 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민중 계몽의 수단으로 연극, 영화, 교육, 문학 등 다방면에 헌신케 했다.
1888년 10월 4일 서울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한 백남은 서당을 거쳐, 신학문의 물결에 휩싸여 일어계 학교인 경성학당에 입학했다. 여기서 수재라고 평판이 높았고 뛰어난 어학 실력은 일인 교장을 탄복시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1902년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일본 교장의 추천서 한 장을 들고 장도에 올랐다. 그러나 그에겐 외부(현 외무부)의 빙표(현 여권)가 없었다. 밀항자였다.
그는 이미 열다섯에 결혼을 했고 부모님의 반대에 일본 유학은 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반성중학 3학년에 편입하여 백남의 뜻은 이루어졌다. 그 이듬해 동경으로 나와 와세다(早稲田)실업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으니 한국인으로는 처음의 일이었다. 백남의 뛰어난 실력은 당시 유학생 간에 평판이 높았다.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진학했을 때, 당시 한국 황실에서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게 되어 백남도 국비생의 일원이 되었다.
1905년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어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예속되어 점차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일제는 국비유학생 감독관을 파견하여 부당한 위협과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비생은 정치학을 공부해선 안된다고 하여 백남은 와세다대(早大)를 그만두고 히토쓰바시(神田一橋)에 있는 동경 관립 고등학업학교로 전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남은 실의에 빠졌다.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학교 공부 이외에도 배울 수 있는 것이면 견문을 넓혔다.
이 시기에 백남은 문학 방면에 고개를 돌려 많은 작품을 탐독했고 매혹되었다.
백남이 소설이 쓰게 된 그 기틀이 이 때에 잡혔음이 틀림없다.
문학 뿐만 아니라 연극에도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당시 일본은 구미 유학생에 의해 근대극이 도입되기 직전이었으니, 그가 귀국하여 연극 운동을 전개한 계기도 이 시기의 체험에 의한 것이었다. 고상(高商)을 졸업한 윤백남은 1909년 귀국하여 수형조합(手形組合) 부이사에 취임했다. 이 수형조합이란 현(現) 산업은행의 전신으로 한국 침략의 마수의 한 방편이었다. 여하튼 한국으로는 최초 최고의 자리였다. 경제적인 안정을 찾은 백남은 한편 야간에는 기독교전수학관에 나가 강의를 하며, 자기가 배워온 신학문을 후배 학도들에게 전하려는 정열을 보였다.
1910년 한일합병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자 윤백남은 금융계로 진출하려던 방향을 전향했다. 수형조합을 사퇴한 백남은 매일신보의 정경부 기자로 활약하며 집필하기도 했다. 신문사에서는 조일제(趙一齊)와 단짝이 되어 새로 출판하는 신파극계에 관심을 기우리기 시작했다. 혁신단의 임성구 일행의 신파극을 관람하여 현동철(玄東哲)과 사귀어 1913년 드디어 문수성이란 극단을 창립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10년간 무단정치를 해오던 조선총독부는 문화정치로 그 체제를 바꾸며 대대적인 수습을 꾀했다. 그 이듬해부터는 언론의 자유를 표방하며 조선, 동아 양지가 창간되어 문화계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신파극계 역시 10년동안 식상한 관객의 버림을 받고, 그 돌파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소위 연쇄극이 등장하여 그 첫작품 <의리적구토>가 흥행적인 성공을 거두자 곧 연쇄극 붐이 일어났다.
이러한 환경에서 윤백남은 신극 운동을 부르짖으며 최초의 희곡 <운명>을 예술협회극단에 의해 1921년 10월 단성사 무대에서 상장했다.
문수성의 경험에 비추어 백남은 드디어 1922년 1월 15일 민중극단을 창립했다. 그 주요 멤버는 역시 신파극계에서 활약하던 안광익을 위시하여 최일, 나효진, 최란방 등이었다. 그 창립공연은 단성사에서 윤백남의 <등대직>(3막), <기상>(4막)을 들고 나왔다. 그 관람료는 1등석이 1원, 2등석이 80전, 3등 60전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중극단은 그 창립공연만 가진 채 지방 흥행도 못하고 해산 상태에 놓이게 됐다.
그 이듬해, 결국 새로운 멤버에 의해 극단은 혁신했고 윤백남도 다채로운 레퍼토리(창작극 뿐 아니라 번역극을 주로 한)를 가지고 조선극장에서 상연(8일간)했다. 거의 신인에 의해 혁신된 민중극단은 뜻밖의 극영화 제작에 착수케 됐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저축을 장려 선전하기 위해 극영화를 제작하는 데 윤백남에 의뢰했다. 백남은 마침 지방 순회 공연을 위한 자금 조달로 골몰하던 차라, 단원들의 협력으로 제작에 임했다. 윤백남 각본에 감독도 겸하였고 촬영은 일인(日人) 오타 히토시(태천동, 太田同)이란 인물이었다.
약혼한 젋은 남녀가 여러 곡절 끝에 저금한 돈이 두 사람을 결합시켜준다는 내요의 단편 극영화 <월하의 맹세>는 소위 저금사진이긴 하지만 최초의 극영화였다. 2천자 길이에 불과한 단편이긴 하지만 최초의 극영화라는데 의의가 있다. 윤백남은 여기서 어떤 기법으로 표현할는지는 그 작품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연극을 위한 방편으로 제작에 임했기에 영화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구사하지 못했으리라 믿어진다.
4월 9일 경성호텔에서 가진 시사회에서 호평받았고 이로 인해 윤백남은 영화에 깊이 관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저금사진 <월하의 맹세>는 무료로 전국에 순회 상연되었다.
총독부 정책영화 <월하의 맹세>를 끝낸 백남은 예원(藝苑)이란 잡지 발행에 골몰했다. 연예전문지인 이 예원은 그해 6월에 창간호를 발간했으나 계속되지 못했다.
1924년 부산에서 발족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영화를 기업화하기 위해 한국인 감독이 필요했다. 이미 조선키네마 발족에 크게 관여했던 무대예술연구회 출신 사원들이 윤백남을 추천했다. 백남은 이조비사(李朝秘史)에 조예가 깊었고 또한 능숙한 일어는 일인 중역을 탄복시켜 입사케 되었다.
백남이 입사하여 착수한 작품이 고대소설(한문으로 된) <운영전>이었다. 각본을 끝내고 배역을 선정하는 데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조선키네마에는 전속 여배우 이월화가 창립 작품인 <해의 비곡>의 주연을 맡고 있었다.
이월화는 민중극단의 단원이었고 백남이 예명(본명은 정숙) 월화로 지어준 바 있었으나, <운영전>의 주역에는 적당치 않았다. 이에 신인을 픽엎하여 출연시키게 되었으니 그가 김우연이었다. 이에 이월화는 반발하여 경험으로나 연기력에 있어 자기가 김우연보다 우수하다고 고집했다. 백남은 끝내 김우연으로 하여금 운영 역을 맡게 하여 이월화는 조선키네마를 탈퇴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건 역시 영화사상 최초의 주연 경합 분쟁이었다.
안종화, 김우연, 주연에 유영로, 이채전, 이주경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그해 겨울에 완성했다.
백남이 <월하의 맹세>를 감독한 경험이 있었으나 영화 기법이나 연출 수법은 미숙했다. 백남은 보좌한 조감독, 이경손이 본격적인 흥행 극영화 촬영에 많은 힘이 되었다. 사실 백남에겐 <운영전>이 처녀작이나 마찬가지였다. 장편 흥행 극영화로는 첫 작품이었고 촬영 시기가 겨울이라 조명 시설이 없던 때이므로 자연 광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면이 선명치 않고 영화 기법과는 많은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 고유의 생활 감정이 담겨 있어, 그 당시 수준으로는 성공작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지상에서 윤갑용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 옛소설을 개작해서 영화화시킨 백남 윤교중 씨의 노력과 고심에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애씀이 카메라맨의 서투름으로 말미아마 반 이상이 헛되이 되고 말었음은 애석한 일이다. 허지만 테마로 보던지 일관된 정조와 리듬으로 보던지 제1회작 <해의 비곡>보다는 성공이라 하겠다. 크로즈업을 당연히 쓸데 롱 숏트를 쓴 데도 있고 미드 숏이라야 될 장면을 쓰지 않은데도 있다. 야연(野宴)에 조선무용을 집어 넌 것은 매우 영화를 밝게 하였다. 더구나 순 조선음악 타령을 낮게 깔아서 한층 좋았다."
안평대군의 총희 운영과 젊은 김진사와의 사랑을 그린 이 작품에서, 윤백남은 고대소설에서 고유한 한국 풍습 및 작품 세계를 이끌어들임으로써 새로운 현실 창조에 주안을 두고 있었다.
백남은 일인의 제작사에서 한국 고유의 생활 감정을 중시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으나 결국 작품 활동을 계속치 못하고 조선키네마주식회사와 결별하고 말았다.
1925년 1월 한국 최초의 독립 프로덕션이 설립됐다. 경성부 황금정 5정목 77(을지로5가)에 위치한 백남프로덕션 경성 본사는 순 조선영화제작과 외국사진 수입을 목적으로 설립했다.
이 회사의 주요 인물은 모두 조선키네마 소속의 영화인이었다. 그는 부산에서 영화의 사업적인 면을 습득했고 많은 영화인들을 사귈 수 있었다. 백남이 독립프로덕션을 설립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경손, 니시카와 히데오(서천수양, 西川秀洋), 윤갑용, 김태진, 주인규, 나운규, 김우연 등이 여기에 가담했다. 연구생 모집을 하여 전창근, 정기탁, 박제행 등의 신이닝 다수 참가하여 <심청전>을 착수했다.
백남 프로의 창립 작품 <심청전>은 이경손이 각본 감독을, 촬영은 조선키네마의 스틸 맨이던 니시카와 히데오(서천수양)이 담당했고 주연은 나운규, 김우연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모두 신인을 기용했다는 점이다. 백남도 이미 <운영전>에서 얻은 경험에서 당연히 연출을 할만 한데도 불구하고 이경손에 넘긴 점, <운영전>에서 엑스트라에 가까운 단역배우 나운규를 일약 주연급을 등용한 점 등은 백남의 양심과 통찰력, 그리고 후진을 아끼는 하나의 증거였다. 백남은 제작자로서 작품 완성에 뒷바라지만 했다.
<심청전>은 그해 3월 28일 조선극장에서 개봉했으나 흥행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백남프로에서는 계속하여 이광수의 <개척자>를 착수했다. 윤백남, 이경손 공동 각본에 연출은 역시 이경손이 담당했다.
<심청전>의 흥행적 타격은, 계속 다음 작품 <개척자>를 완성시킬 수 없어, 그해 5월 백남은 <심청전>을 수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수출이 여의치 못하여 한국 최초의 독립 프로 백남프로덕션이 해산하는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개척자>는 백남프로의 제2회작이 못되고 고려키네마의 명의로 완성되었다.
독립프로 실패로 백남은 영화에서 손을 떼고 집필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백남 프로의 영향은 군소 프로덕션의 난립을 가져오게 했으니 그가 뿌린 씨는 외롭지만은 않았다.
1929년 한국영화의 위기가 재도하자 백남은 다시 문예영화협회를 창립했다. 이 문영은 윤백남을 중심으로 이기세, 김운정, 염상섭, 양백화, 안종화, 오타 히토시(태천동, 太田同) 등이 찬동하여 먼저 신인 양성에 주력을 두었다. 문영 역시 1기생만 양성하고 해산하고 말았다.
백남은 문영 출신의 신인과 더불어 <정의는 이긴다>를 그 이듬해인 1930년에 발표했다. 그러나 실패작으로 주의도 끌지 못한 채 지나치고 말았다.
이 해부터 위기에서 돌파구를 찾아 안간심 쓰던 영화계는 점차 작품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문예영화협회의 활동은, 크게 영향을 끼쳤으나 윤백남 개인적으로는 완전히 영화와 결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윤백남은 다시는 영화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 ■
(학술지 ≪영상예술≫ 제1집, 한국영화학회, 1974, 42~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