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은 좋은데 신호는 지켜야지
로맨스의 필수요소는 여자주인공을 향한 남자주인공의 '직진'이다. 다정다감 직진, 츤데레 직진, 불도저 직진 등 시대에 따라 유행은 달라졌지만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고지순하게 다가가야 한다. 가히 로맨스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직진이 유행인가. 연하남의 어설프지만 순수하고 풋풋한 직진이 유행이다. 3포 세대를 넘어 7포 세대에까지 도달하며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조건을 따지지 않는 순수함을 원하는 것. 연하남 유행 초반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캐릭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소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식의 직진은 호감 표시가 아니라 강요라는 인식이 퍼지며 점점 연하남들은 여자주인공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요즘 연하남들은 여자주인공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다정다감하게 다가가고 있다.
여자주인공이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연하남들은 차분히 기다리다 마음을 열고 그제서야 직진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빈번하게 볼 수 있다. 네이버 웹툰 '함부로 대해줘', '그놈은 흑염룡' 등에는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날티라곤 1도 없는 연하남들이 등장한다. '함부로 대해줘'에는 학창시절 미술학원 선생님이었던 여자주인공에게 너무나 깍듯하게 대하는 연하남이 나온다. '그놈은 흑염룡'에는 중학교 시절 첫사랑인 여자주인공만을 바라보다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그러나 절대 여자주인공에게는 상처입히지 않는 연하남이 나온다.
JTBC 드라마 '런온'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기선겸(임시완 분)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오미주(신세경 분)는 그런 기선겸에게 당당하게 감정을 표현했고, 기선겸은 그런 오미주에 자신을 돌아보며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려 애쓴다. 여기서 기선겸은 오미주에게 강요하거나 자신의 편의 대로 몰아붙이지 않는다. 오미주가 적극적인 캐릭터라 그럴 수도 있지만 기선겸은 오미주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다정하게 기다린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연하남의 직진 로맨스가 유행하던 중 유행을 정곡으로 겨냥한 JTBC 드라마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가 나왔다. 웹소설이 원작이라는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 첫 회를 보고 느낀 점은 "저 어린 놈이 어디서 성질이야"였다.
1)구름 위에 떠있는 채현승, 행복한 짝사랑
채현승(로운 분)의 직진은 시작부터 강렬했다. 채현승과 윤송아(원진아 분)는 회사 선후배 사이다. 윤송아는 채현승과 함께 거래처 직원을 만났다. 거래처 직원은 채현승의 빠른 업무 습득력을 칭찬했고, 윤송아는 "잘 가르쳐준 사람도 있고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거래처 직원이 나간 후 윤송아는 채현승 어깨를 짚으며 "잘했어"라고 말했다. 채현승은 자신을 후배로만 대하는 윤송아에게 "선배는 내가 애 같죠. 나이도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라며 감정을 표했다.
이후 채현승은 끊임 없이 호감을 드러냈다. 채현승은 윤송아와 시장조사를 나갔다. 채현승은 윤송아에게 사내연애에 대해 떠봤고 윤송아는 "꺼려지기는 하지. 근데 뭐 어쩔 거야.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사내연애든 뭐든 안 하고 배기겠어?"라고 답했다. 이에 채현승은 몰래 흐뭇해했다.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채현승이었다.
채현승은 매장 직원에게 윤송아를 여자친구로 소개하며 시장조사를 이어가기도 했다. 윤송아는 매장에서 나온 뒤 "이번만이야. 그냥 넘어가는 거. 너랑 맨 처음 붙어 다닐 때 들었던 말 뭐야. 요즘은 좀 덜해도 색안경 끼고 갖다 붙이려는 사람 널렸어. 오해 살 일은 안 하는 게 낫잖아. 내가 좀 꼰대 같아 보일 수도 있는데 무슨 말인지 알지?"라며 선을 그었다. 윤송아는 "약속 있어. 남자친구랑"이라며 채현승의 저녁 식사 제안까지 거절했다.
채현승은 멈추지 않았다. 채현승은 윤송아가 떠난 뒤에도 윤송아가 거짓말했다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2)채현승의 현실 직시, 윤송아❤️이재신 목격
채현승은 곧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채현승은 자신의 생일날 윤송아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윤송아는 팀 전체 회식으로 바꿨다. 윤송아는 회식 도중 밖으로 나갔고 채현승은 윤송아를 따라갔다. 채현승은 윤송아가 몰래 나가 같은 팀 이재신(이현욱 분)과 스킨십하는 것을 목격했다. 윤송아 말도 마음대로 해석하며 감정을 키워오던 채현승이 절망하던 순간이었다.
채현승은 누나를 만나 이를 전하며 절망했다. 그러던 중 채현승은 이재신이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이에 채현승은 윤송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3)윤송아를 지키기 위한 채현승, 설익은 표현
그날 이후 채현승은 이재신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했다. 채현승은 이재신, 윤송아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바쁘셨나 봐요. 이쪽, 저쪽"이라고 말했다. 팀 회의 중 이재신을 노려봐 분위기가 싸해지게 만들기도 했다.
이에 채현승 사수인 윤송아는 채현승을 불러 나무랐다. 채현승은 모든 걸 말하고 싶었지만 과거 윤송아가 "누구 몰래 연애하는 거 보면 모르는 척해"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며 "일단 참아볼게요. 들키기 싫을 테니까. 근데 이게 진짜 아니다 싶으면 못 참아요. 지키고 싶으니까"라고 했다.
4)결국 모든 걸 폭로하기로 한 채현승, 막말을?
위태위태한 나날을 이어가든 채현승은 이재신 결혼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이재신이 윤송아와의 저녁 약속을 취소하는 것을 보고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채현승은 윤송아에게 다가가 "선배한테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 저녁에 시간 되죠. 시간 되는 거 같은데. 까여서"라고 말했다. 윤송아가 불쾌해하자 채현승은 "분명히 까였어요. 앞으로 까일 거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라고 경고했다.
윤송아는 "너한테 쓸 시간은 없어"라며 뒤를 돌았고 채현승은 "안 되도 되게 해요. 하나도 안 어울리네.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라며 윤송아 립스틱을 손으로 지웠다.
채현승의 감정선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됐다. 혼자 좋아하고 혼자 들떴다가 혼자 화를 내고 혼자 지키겠다고 나섰다. 자신의 감정을 혼자 감당하지 못하고 주변에 티를 낸 것. 심지어 회사에서 그랬다는 건 너무 유아적이고 비현실적이다. 너무나 매력 없는 남자주인공 아닌가.
로맨스에서 연하남의 강력한 감정 표출은 여자주인공을 향할 때만 가능하다. 그것도 여자주인공이 허락할 때. 혹은 연하남이 좋지만 자신감이 없어서, 현실적인 조건 때문에 등 여자주인공의 마음은 확실할 때다. 채현승은 이재신의 바람을 알려주는 것에서 끝냈어야 한다. 윤송아가 채현승의 어리광을 받아줄 이유는 없다.
채현승이 윤송아 립스틱을 손으로 지우는 장면은 어이가 없었다. 동의 없는 스킨십, 설렘 포인트로 넣었겠지만 채현승이 매력적이지 않으니 더 그랬다.
너무 채현승만 있었다는 점도 문제다. 물론 채현승이 윤송아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주를 이룰 테니 그 서사를 설득할 필요는 있다. 그래도 윤송아의 감정이 너무 배제된 것 아닌가.
중간에 이재신의 향한 윤송아의 마음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윤송아가 받을 충격을 강조할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이재신의 배신으로 슬퍼 할 윤송아를 의도한 것. 윤송아는 채현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재신과는 어떤 관계인지, 지금 상태는 어떤지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 채현승과 윤송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채현승의 짝사랑 회고록 같다.
그러니 더욱 설득이 되지 않는다. 첫 화만 봐서는 윤송아가 왜 채현승에게 빠질지 조금도 예상되지 않는다.
이는 제작사의 의도 자체에 오류에서 시작된다. 제작사 측에서는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의 관전 포인트로 '나만 바라보는 완벽한 후배의 직진, 로망 실현 예고!'라고 했다.
잘생긴 외모는 매력 포인트에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바른 가치관, 센스, 위트, 진지함까지 모두 갖춘 채현승의 존재는 그야말로 로망의 집약체다. 또한 한 여자만을 바라보는 순애보와 그녀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주려는 용기와 남자다움 역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이렇듯 ‘나도 모르게’ 시작된 로맨스를 한 몸에 받을 윤송아를 통해 시청자들은 설렘 동기화 준비에 완료, 보고 있으면 사랑 하고 싶어지는 드라마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러나 바른 가치관과 센스, 위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나도 모르게 시작된 로맨스도 그닥 달갑지 않다. 왜 나 모르게 로맨스가 시작되어야 하는가. 나도 같이 하는 로맨스인데 당연히 나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웹소설로 많은 사랑을 받은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 취향과 주관이 잔뜩 들어간 리뷰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조금도 어필이 되지 않는다면 여심을 100% 저격한 작품은 아니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트렌드 필요없다. 클리셰로 전형성을 노리겠다'라는 의도여도 인기를 끈다면 괜찮다. SBS '시크릿가든'이 그랬고 tvN '구미호뎐'이 그랬으니. 그런데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의 채현승은 그마저도 채우지 못했다.
우리는 치기어린 연하남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런 연하남은 스릴러에서 빌런으로 등장할 때 유효하다. 로맨스에서의 연하남이라면 어리지만 속 깊어야, 또 어린 만큼 순수해야 한다. 채현승의 매력이 언제 나올까. 첫화를 봤을 땐 로운의 비주얼만으로는 극복 불가능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