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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YY Mar 29. 2021

[영화]미나리

-터전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

19. 미나리

-터전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 '미나리' 포스터

지난해,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겠다'라는 생각을 처음 했다. 열정으로 가득했던 예전에는 극한의 취업난에도 공기업 수준이라는 대기업을 때려치웠다. 내 자아를 100% 분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서서히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가던 아나운서 일도 그만뒀다. 인생의 목표는 '하고 싶은 일 하기'던 시절.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모든 게 저절로 완성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사회생활 감각을 잃어가는 것 같아 우연히 시작한 지금 일.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니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실이 보이니 내 기반, 터전도 떠올랐다. 부모님이 마련해준 집에 만족하며 살던 내가 어떻게 해야 더 좋은 집으로 이사갈까 고민했고, 적금도 없이 통장에 쌓아두던 돈을 어떻게 재테크 해야 하나도 고민했다.


이들은 너무 복잡하고 버거웠다. 현실을 직시하니 외로워졌다. 인간을 안식처로 삼지 말자는 내 첫 번째 철칙을 깨고 싶었다. 마음 둘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현실을 알아갔고 기반과 터전은 인생의 첫 관문임을 깨달았다.


'미나리'는 그러나 삶과 마음의 터전을 잡고자 하는 모두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다양한 가치관의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자 노력하는 이야기라서다.


제이콥


영화 '미나리' 

열정만 가득한 이의 정착기를 보여준다. 욕심도 많고 희망도 큰 제이콥. 미국은 가히 꿈의 나라였고 제이콥 역시 꿈을 펼치기를 바랐다. 아무것도 없는 한국인으로 미국에 이민 왔지만 제이콥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이콥은 수준급 병아리 감별사로서 캘리포니아에서 자기 수준보다 큰돈을 벌 수 있었지만 여기 만족하지 않았다. 제이콥은 아칸소라는 시골로 이사하며 넓은 땅을 샀고, 여기서 농사로 성공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제이콥에게는 나름 전략도 있었다. 머리를 쓰며 한국인 파워를 보여주려 했다. 나무 막대기를 들고 다니며 수맥을 찾는 무식한 미국인 방식이 아닌 나무가 있는 곳에 물이 있다는 과학적 추론으로 우물을 찾는다. 제이콥은 "집에서 쓰는 물에는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밭에 쓰는 건 그럴 필요 없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작물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이콥은 한국 작물을 기르기로 결정했다. 미국인인 폴이 "미국 작물을 기르는 게 어떠냐"라고 물었을 때도 제이콥은 "미국으로 이민 오는 한국인 수가 몇 명인지 아냐"라며 한국 작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제이콥의 자신감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제이콥이 찾은 우물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았고 농작물은 말라갔다. 제이콥은 결국 돈을 내며 지역 상수도를 끌어썼다. 돈을 지불하며 사용한 물에 농작물들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해 농사는 풍작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 작물을 팔 가게를 찾지 못한 것. 한 가게와 계약했지만 그 가게는 다른 농장과 계약했다며 일방적으로 거래를 취소했다. 시간이 지나면 폐기할 수밖에 없는 농작물 앞에서 제이콥은 절망했다.


아들 데이빗의 병원비 때문에 돈이 필요했던 모니카는 제이콥에게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자고 한다. 모니카는 열심히 연습한 결과 제이콥 정도로 병아리 암수를 감별할 수 있게 됐고,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제이콥은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한 방을 해내야 한다. 애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보겠냐"라는 말과 함께.


이후 제이콥은 가까스로 농작물을 사겠다는 가게를 찾았지만 농작물 창고가 불타며 그마저도 수포로 돌아갔다.


전근대적 혹은 가부장적 이런 생각은 빼고 말하자면, 제이콥은 열정 가득하게 꿈을 좇던 우리네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하면 된다', '나는 뭔가 될 것이다'와 같은 치기 어린 시절. 내 판단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에 받아들이지 않고 비효율적인 해결책을 동원하더라도 내 방식을 꾸역꾸역 밀어붙이는 때. 내 내면에만 집중한 방식으로는 터전을 잡기 힘들었다.



모니카


영화 '미나리'

안정을 바라는 이의 정착기를 보여준다. 대부분 사람이 이런 유형이 아닐까. 꿈보다는 행복을 좇으며 내 가족을 위해 사는 것. 모니카는 제이콥을 따라 아칸소로 왔지만 아무것도 없는 시골 생활에 불만족한다. 제이콥이 싫어해 교회에도 가지 못한다. 교회를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던 그 시절, 교회에 가지 못한 이민자들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


모니카는 이 모든 걸 감내했다. 제이콥의 '아메리칸 드림 이루기'에 동참하기 위해 불만족하지만 아칸소로 왔고, 교회에도 가지 않는다. 제이콥의 '사업 병'에 기운 가세를 세우기 위해 병아리 감별 연습에도 열심이었다. 제이콥의 농사가 어려워지고 빚만 늘어가며 캘리포니아행이 필수였을 때도 제이콥에게 함께 가자고 설득했다.


그러던 모니카는 결국 이혼 이야기를 꺼낸다. 제이콥이 새로운 가게와 계약하고 데이빗이 아칸소로 이사한 후 수술할 필요 없어졌다는 소식이 들리던 때, 결국 모든 게 좋아졌던 때였다. 가정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던 모니카에게 나아진 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깨진 가족 간 신뢰는 모니카의 터전을 망가트렸다. 모니카에게 터전은 가족애였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만 중심을 둔 방식으로도 터전을 잡기는 힘들었다.



순자


영화 '미나리'

삶 그 자체에 초점을 둔 이의 정착기를 보여준다. 순자의 미국 이민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니카가 오라고 해서 왔고 와보니 손녀와 손자가 있었다. 그래서 순자는 손주들을 돌봤다.


그러나 순자 삶은 그대로였다. 순자는 한국에서 지내던 대로 앤과 데이빗에게 다가갔다. 미국 문화에 더 익숙한 데이빗은 그런 순자를 보며 "할머니 아닌 것 같아."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순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손주들에게 다가갔다. 죽기 싫다는 데이빗에게 "누가 데이빗을 죽게 하냐. 내가 다 막아주겠다."라고 소리 지르며 한국인의 악귀 쫓기를 보여줬다.


순자는 제이콥과 모니카가 아이들에게 가지 말라고 한 뱀 나오는 강가로 가기도 했다. 순자는 좋은 터라며 미나리를 심었고, 아무런 관리 없어 미나리는 쑥쑥 자랐다.


즉, 순자 삶의 터전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삶의 형태는 그대로였다. 제이콥과 차이가 있다면 제이콥은 자신의 생각에 갖혀 계획을 밀고 나갔고, 순자는 자신이 해오던 것이 어울릴 환경을 찾았다. 융통성을 갖고 삶 그 자체에 초점을 둔 것. 해오던 것에 초점을 뒀기에 마음의 터전도 잡을 수 있었고 환경에 맞게 미나리 씨를 뿌렸기에 몸의 터전을 마련해줄 미나리도 수확할 수 있었다. 제이콥이 "할머니가 터를 잘 잡았구나."라고 말한 것도 이런 순자의 노하우를 알아서는 아닐까.



'미나리'는 미국 이민 1세대 이야기다. 이건 너무나 확대 해석한 것이며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실화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터전을 향한 투쟁이 뭐 그리 바뀌었겠는가. 사람이 성장하며 거치는 삶의 단계는 시대가 변해도 그대로다. 치기 어린 시절부터 좌절하며 성숙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 나는 지금 어디쯤 와있나. 그리고 내 터전은 어디까지 잡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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