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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YY Mar 13. 2020

[영화]그린북

뻔한 흐름, 그 속의 디테일

[영화]

5.그린북

-뻔한 흐름, 그 속의 디테일

영화 <그린북> 포스터


전형적인 흐름 속의 디테일

대중성과 예술성이 대척점에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중성 만 과도한 작품은 시시하다. 대부분의 사람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뭉툭하며 극적으로 감정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과도해진다. <그린북>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뻔한 신파, 클리셰 범벅의 이야기.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대의 흑인과 백인 간 우정이라니 너무 뻔하지 않은가.


영화를 보고나니 맞았다. 뻔한 이야기였다. 뻔한 캐릭터에 뻔한 변화, 뻔한 결말이었다. 다만 차이는 디테일에 있었다. 인물을 통해 드러낸 뻔하지 만은 않은 이야기는 나의 오류를 부끄럽게 했다. 전형적인 영화 속 전형적이지 않은, 그러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가 이 영화의 진정한 묘미다.



말하자면  아픈 뻔한 흐름

전혀 친해질 것 같지 않던 두 인물이 친해진다. 인종차별이 존재하던 시절 누구보다 흑인을 혐오하는 백인이 흑인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며 둘은 가까워진다. 자신이 고용되고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보스라고 부르지 않던, 보스의 짐을 들어주던 컨시어지에게 자신의 짐도 들어달라고 신호를 보내던 백인이 흑인에게 마음을 가까워진다. 누가봐도 감동적인 이야기다.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랬기에 흥행할 수 있었을 테니. 그러지 않았다면 투자를 받기 조차 어려웠을 테니. 그리고 풀어가는 과정에 있는 디테일이 훌륭했으니.



캐릭터도 예상 가능했다

어쨌든 마지막에는 백인과 흑인을 화해시켜야 하니 백인을 너무 나쁜 사람으로 설정할 수는 없었을 거다. 백인인 토니는 변화가능성 있는 사람이었다. 토니는 흑인이 쓴 컵은 바로 버릴 정도로 유색인 혐오가 심했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아이들과 아내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어떻게든 돈을 벌었다. 심지어 일하던 클럽이 문을 닫자 내기 까지 해가며 돈을 벌어왔다. 무려 120kg에 달하는 거구와 많이 먹기 대결을 해서 이길 정도니 토니의 책임감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가정적이라는 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언젠간 흑인인 셜리와 친해질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심지어 캐릭터가 변화할 것도 예상 가능했다

토니와 셜리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깔끔하고 예의 바른 돈 셜리와 호탕하고 껄렁한 토니 발레롱가. 셜리는 차분했지만 위기 시 능글맞게 넘어가지 못했고, 토니는 위기를 자연스럽게 넘겼지만 욱하는 성격 탓에 사고를 치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애와 자기혐오를 동시에 갖고 있다. 자신과 정 반대의 사람을 보면 거부와 동경이 동시에 생길 수 있다는 의미다. 상반된 성격의 두 캐릭터가 결국 서로를 좋아하게 될 것은 뻔했다.



그러나 인물들로 디테일을 만들었다

# 셜리

처음에는 단순했다. 인종차별이 있던 시기라해도 어쨌든 대접 받는 흑인은 있었겠거니 했다. 처음부터 엄청난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채 등장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고고한 셜리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불합리한 상황에서까지 점잖을 수 있던 건 셜리가 성숙해서라고 생각했다.


과시는 결핍의 다른 말이라고 했던가. 과시까지는 아니어도 과도하게 예의 바른 셜리의 행동은 정체성의 결핍 못한 데서 오는 것이었다. 조금도 '흑인스럽지' 않았던 셜리. 일부러 그 행동을 버리려는 것이었다. 토니와의 말다툼 끝에 털어놓은 셜리의 속마음은 셜리가 느껴왔던 괴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영화<그린북> 속 한 장면

"그래 난 성에 살아. 돈 많은 백인이 피아노를 치라고 돈을 주지. 문화인 기분 좀 내보려고.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 사람들한텐 나도 그냥 깜둥이일 뿐이야. 그게 그들의 진짜 문화니까. 그런데 하소연 할 곳도 없어. 내 사람들도 날 거부하니까. 자신들과 다르다면서"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으면 난 대체 뭐죠"


자신의 정체성이 뭔지 모르겠으니 자신이 스스로 정체성을 정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셜리는 흑인이다. 명백한 약자였다. 그러나 인기 있는 음악가였고 많은 부를 갖췄다. 명백한 강자였다. 셜리는 어느 정체성에 맞춰야 할 지 몰랐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소속집단이 없으면 불안해한다. 토니에게 가족이 있어 부럽다던 셜리. 그러나 가족이라는 실체적인 인물보다는 속할 곳이 있다는 비실체적 정체성이 부러웠던 건 아닐까. 밭일하던 흑인들을 바라보던 표정도 저 대사를 들은 다음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감정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셜리가 느꼈던 혼란과 외로움. 어디에서나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것 같은 기분. 고향을 떠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전통적인 역할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기분을 안고 살아간다. 셜리의 고통을 통해 본능적인 슬픔을 느낀 것은 물론, 우리 삶의 힘듦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캐릭터 설정이었다. 


#토니 발레롱가

토니는 지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지식보다는 문해력으로 이해한다. 사회 맥락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생존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성격이 불 같고 주먹이 앞선 사람이어도 어떻게든 자기 살 길은 찾는, 선은 지키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 토니는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을 처세술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토니를 지적이라고 평가한 이유는 그가 보여준 성숙함에 있다. 토니가 셜리에게 자신이 더 흑인처럼 살았다고, 흑인이 뭔지 아냐고 묻자 셜리는 진정한 흑인의 삶은 당신이 겪은 그런 게 아니라며 화를 냈다. 토니는 받아쳤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셜리의 말에 느낀 게 있을 수도 있지만 토니도 충분히 할 말은 많았을 거란 점에서 일부러 입을 닫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토니가 진짜 흑인의 삶을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토니는 셜리가 흑인이 가득한 술집에서 돈뭉치를 꺼내자 주위를 살폈다. 술을 마시고 나온 둘은 차로 걸어간다. 그때 토니는 총을 꺼내 두 발 쏜다. 셜리의 차 뒤에 숨어있던 흑인 둘은 총소리에 놀라 도망간다. 돈뭉치 빼앗기 위해 숨어있던 흑인들을 쫓아낸 것이다. 셜리보다는 토니가 이러한 삶에 익숙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토니는 셜리의 말에 더 대꾸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셜리의 예민한 대응에 고개를 숙이는 장면은 영화 내내 나온다. 처음에는 셜리가 보스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영화 초반, 토니의 가족은 8주 동안 떠나있을 토니에게 "한 달 뒤에 봐"라고 말했다. 토니가 8주라고 말하자 "안다. 그런데 너는 한 달 만에 흑인을 치고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스라는 이유 만으로 참아준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결국 토니의 성숙함과 지적임은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숙일 때는 숙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조금은 찝찝하다

만약 토니가 괜찮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셜리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셜리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았더라도 토니가 이렇게까지 했을까. 이 세상엔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더 많고 약자는 약자로 남아있는데 그럼 혐오와 배제는 사라질 수 없는가. 괜히 꼬인 생각들이 머리 속을 벗어나지 못한다. 



혐오와 배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해결될 사회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이런 사회에서도 성찰과 배려를 반복해 사회를 성장시켜왔다. 작품의 개연성을 위해 감독은 이렇게 설정을 했을 것이다. 이정도의 조건도 없으면 토니와 셜리의 우정을 납득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런 조건이 없는 사람들도 화해하고 연대해왔다.


토니가 셜리에게 마음을 연 계기는 셜리에 대한 일반화, 즉 흑인에 대한 일반화를 버리고 셜리 그 자체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셜리의 피아노 실력을 보고 아내에게 "그는 천재다"라고 말하며 존경심을 드러냈고, 그를 바탕으로 셜리를 비하하는 공연실 직원에게 주먹을 날린다. 셜리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인지했기에 가능하다. 


결국 이는 둘이 같은 공간에서 교류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혐오와 배제 문제의 실마리가 보이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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