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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YY Feb 16. 2020

[영화]조커

-현실적인 탄생설화

[영화]

3. 조커

-현실적인 탄생설화


 누가 조커를 비난할 수 있을까. 조커가 주인공이고 그의 시각과 감정을 중심으로 전개됐기 때문 만은 아니다. 조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명백히 나빠서도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우리 속에 있던 문제 의식이 나와서다. 부자는 착하고 빈자는 나쁘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불편한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런 고정관념이 양산하는 논리적 차별이다.


 빈자는 나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쉽게 비난하곤 한다. 사건이 벌어지면 부자는 피해자일 거란 생각을 한다. 흑화되기 전 조커, 아서가 지하철에서 부유한 남성 셋을 죽였을 때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남성 셋은 이유 없이 여성을 희롱하고 아서를 구타한다. 이에 아서는 그들을 살해한다. 그러나 사건을 보도할 때 아서는 절대 악이고 죽은 남성 셋은 무고한 피해자일 뿐이었다. 밝혀진 전말이 없어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예측하려는 노력조차 않는 것은 부유한 이들은 선하다는 고정관념에서 기반한다. 고정관념에 기반한 논리적 차별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고정관념에 생기는 인위적 근거다. 빈자는 부유한 자들에 비해 험한 일을 많이 겪고 살아간다. 사람은 학습의 동물이라 보고 자란 대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빈자가 부유한 자들에 비해 험한 행동을 많이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나면 빈자가 험악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유는 속에 있는 자격지심 때문일 것이라 믿는다. 아서가 한 행위에 이유를 찾지 않는 이유는 그 원인을 마음대로 해석해서다.



 이러한 논리적 차별이 고착화되면 빈자를 향한 조롱은 걷잡을 수 없다. 빈자는 나쁘기 때문에 욕먹어도 싸다는 합리화다. 머레이가 아서의 영상을 틀며 웃음거리로 만든 것도 여기에 있다. 마르고 지저분한, 고작 클럽에서 한 타임 일하는 코미디언. 조롱하고 놀리기 쉽다. 이들을 놀려도 아무도 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조하며 비웃는다. 머레이가 똑같이 행동했다면 사람들은 비웃었을까. 오히려 새로운 코미디의 유행이라고 생각하거나 머레이의 건강을 걱정했을 것이다.


 빈자에 대한 차별은 약육강식에 있다. 빈자는 힘이 없다. 이들을 놀리고 차별해도 반발하지 못한다. 큰 호랑이보다 작은 강아지를 밟는 게 쉬우니까 작은 강아지보다 못한 빈자는 쉽게 밟힌다. 그러나 이러한 반성을 하는 자는 없다. 명백히 비도덕적인 생각이지만 이를 공유하고 재생산한다. 반성할 시점에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 변화의 계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결국 조커의 탄생은 시대적 요구가 아니었을까. 아서의 살인이 대규모 집회로 이어진 건 억압된 것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억눌린 것들을 꺼내고 사회를 정화시키기 위해 누군가 조커를 만든 것이다. 영화 초반에는 당황스러웠다. 개연성이 부족했다. 아무리 뒷부분을 위한 장치라고 해도 과했다. 아무 잘못을 하지 않은 조커를 괴롭히는 아이들, 강도 당했다는 조커를 믿지 않고 월급을 차압한 사장, 조커의 꿈을 비웃는 대중들. 그러나 이 개연성없는 악인들은 결국 시대적 요구인 조커를 탄생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렇지 조커의 대응이 너무 과도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럴 때면 변화되지 않는 현실에 개혁을 요구하다 자기 편까지 잃은 이들을 떠올리면 어떨까.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들어 달라던 노동자들, 평범한 삶을 보장해달라던 장애인들. 처음에는 편을 들던 사람들도 부정적인 개혁 요구가 지속되면 지겨워한다. 그정도면 됐다며 오히려 약자를 말린다. 바뀐 건 없어도 똑같은 얘기가 계속되니 지겹고 부정적인 얘기가 반복되니 피곤하다는 반응이다.  


 아서가 얌전하게 '저를 조롱하지 마십시오' 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했다면 몇명이나 동조했을까. 아서의 현실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있었을까. 오히려 또 다른 웃음거리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혁보다 혁명이 쉽다. 프랑스 혁명처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다. 온건한 개혁파는 더 큰 주류 세력에 눌려 사라졌다. 아서의 살인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혁명을 위한 전초전이었다.


 조커의 바람은 아쉽지만 실패했다. 조커의 삶은 죽음보다 가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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