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라는 이름표와 돈의 무게
몇 년 전부터 취미로 직장인 극단에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연기를 배워본 적도 없고 노래를 썩 잘 하는 것도, 그렇다고 몸을 잘 쓰는 것도 아니지만 아마추어들끼리 무대에 올라간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즐겁게 연습합니다. 그 때 닿은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가끔 극단에 놀러가기도 하고, 몇몇 사람들과는 꽤 각별한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 이건 부디 저만의 생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지난 달에는 오랜만에 뮤지컬 무대에 섰습니다. 사실 연습을 온전히 다 소화하고 올라갔던 건 아닙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간에 하차하게 된 다른 배우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공연을 2달 조금 넘게 앞둔 시점에 급하게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남은 연습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5년 전에 한 번 같은 배역을 경험한 적이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일단 해 보기로 하고 연습실에 갔습니다.
처음에는 연기에 대한 어떤 호승심보다는 '민폐만 끼지치 말자' 정도의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예전에 한 번 공연해봤다는 이유로 내가 무심코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혹여나 다른 사람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을까 더 소극적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습 때마다 짐짓 엄살도 부려 보고, 감정적으로 불편한 상황에서도 과하게 괜찮은 척을 하고, 공연 날짜가 점점 가까워올 때에는 괜히 별 생각이 없는 척을 했습니다. 동료 배우들과의 라포를 쌓는 데 힘을 쏟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상황 자체를 피했습니다. 어떤 동료 배우분은 이런 저를 보고 언제나 침착해 보여서 의지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만, 반대로 누군가는 저에게서 보이지 않는 선을 느끼고 오히려 불편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직장인 극단에서 올리는 공연은 무료로 지인들을 초대하여 진행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는 실제 각종 예매 사이트에 티켓을 판매하고 일반 관객들을 받아서 공연을 올렸습니다(극단에서 직접 만든 작품이라 가능했습니다). 사실상 처음으로 '진짜 관객'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아마 이건 배우보다도 제작진에게 가장 큰 도전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각본부터 음악까지 당신들의 손으로 직접 낳은 자식같은 작품을, 아마추어인 우리들의 손에 쥐여 주었으니까 말이죠.
그래서였을까요. 막상 공연이 시작되니 공연 기간 내내 즐거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혹시나 내가 실수하면 어떡하나, 돈을 내고 볼 만한 가치가 없었다고 관객들이 실망하면 어떡하나,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워서 배우로서의 제 역할에만 온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극장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부터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대에 올라가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때 당시의 저는 본업보다도 더 진심으로 이 공연을 대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본업이 아니라서 더 열심이었던 걸까요.
본업이 아니라서.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두려움의 중심에는 '나는 아마추어인데'라는 생각이 가장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아마추어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고 안일하게 시작했다가 관객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 닥치니 갑자기 돈의 무게가 스스로를 짓눌렀던 것입니다. 김성근 감독님이 언젠가 한 야구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었죠. 여러분은 돈 받고 하고 있어. 돈 받는다는 건 프로라는 것이야. 맞습니다.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에게 제가 아마추어라는 핑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프로 공연과 똑같이 돈과 시간을 저에게 투자했고, 저는 그 돈과 시간의 가치에 걸맞는 책임을 졌어야 합니다. 그 말인즉슨, 관객을 마주하는 그 순간만큼은 제가 프로로서 무대에 서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저는 그 때 그 시간을 충분히 책임졌을까요.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만 후련함보다 아쉬움이 더 진하게 남는 걸 보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때의 제가 불안감에 어쩔 줄 몰라 했던 건, 어렴풋이 이 책임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애써 눈을 가리고 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5년 전, 쭈뼛거리면서 처음 극단에 발을 들였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처음에는 내가 무대에 선다는 사실이 참 민망했습니다. 연기라는 걸 배워 본 적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무슨 연기를 한다는 둥, 공연을 한다는 둥 하는 말이 마치 오만한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감독님들과 스텝 분들이 저를 부르는 '배우님'이라는 호칭이 거북했습니다. 나를 '배우'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게 진짜 프로 배우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지진 아닐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때의 그 알 수 없는 거북함 또한 책임감의 무게 때문이었나 봅니다. 어떤 직업의 이름으로 나를 부른다는 건 곧, 그 이름을 달고 있는 나 자신이 프로라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