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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담 May 30. 2023

냉장고를 사랑해도 되나요?

결혼한 지 1년 만에 냉장고를 .


이전에 살던 전셋집에는 냉장고가 옵션으로 있었다. 냉장고에 문외한이던 내가 봐도 낡고 오래된 냉장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신혼가전을 다 챙겨주지 못하게 된 상황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많은 것을 주고도 서운함을 느끼는 엄마를 보니 그녀의 낡고 오래된 냉장고가 생각나서 찡했다.


동이 채 트지 않은 시간, 출근복을 차려입은 엄마가 밑반찬을 냉장고에 들이밀던 장면을 우두커니 바라본 적이 있다. "이따 저녁에 보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일터로 향한 그녀.


엄마의 발걸 조력 삼아 현관문에 달린 풍경딸랑거렸다. 집안에 복을 가져다준다는 풍경이었는데. 나는 엄마의 잔상이 깃든 풍경을 톡톡 건드리면서 학교에 가기 싫은 마음을 떨쳐내곤 했다.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쌓인 밀폐용기들과 마주하면, 삐뚤빼뚤한 사춘기의 마음이 사뭇 가지런해지는 것 같았다. 계란말이. 진미채볶음. 멸치볶음. 콩자반. 호박무침. 엄마의 음식들로 무장한 냉장고 내부는 따뜻해 보였다. 그리하여 한겨울 피어오르는 모닥불 쪽으로 다가가는 사람처럼 나는 그토록 냉장고를 기웃거렸나 보다.


게도 그런 힘이 있던가? 일상의 피로 속에서 내내 깜박이면서도 다른 이를 위한 양식을 정갈하게 지키는 영혼의 이.


모르겠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가전샵 냉장고 코너에서 알록달록한 집게핀으로 머리를 대충 올려 묶은 한 여자가 웃고 있었고, 그게 정확히 나였다는 것은 알겠다.


싱싱한 매력을 뽐내는 냉장고 앞에서, 그 옛날 엄마의 냉장고가 부리던 신비를 떠올린다. 어느 기술로도 흉내 낼 수 없는 모성에 대해.


내가 새 냉장고에 홀딱 빠진 덕에 엄마는 서운함을 한 꺼풀 걷어냈다는 후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냉장고가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그 냉장고를 닮고 싶어 하는 냉장고가 여기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고로 "냉장고를 사랑해도 되나요?"에 대한 나의 대답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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