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란 개인에게 비극적인 일일지 몰라도,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는 멸종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유전적 전략일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10억 년 전 지구에는 어느 정도 자라면 더 이상 늙지 않고 장년의 상태로 최대한 오래 생존하는 방식을 선택한 생명체도 많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현재 지구에는 대부분 '노화하고 사망하여 세대가 바뀌는 방식'을 선택한 종만 남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에는 세대교체를 통해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방식이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다음 세대가 번성할 기회를 제공하려면 전 세대는 노화해서 쇠약해지는 것이 불필요한 경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후손을 남기지 않고 태어난 김에 최대한 죽지 않는 방식을 선택한 종으로 플라나리아가 남아 있습니다.)
노화가 우리에게 정해진 운명임을 주장하는 근거 중 '대립적 다면발현'이라는 진화생물학적 개념이 있습니다. 젊을 적에는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던 것(유전자, 호르몬 등)이, 삶의 후기에는 해로운 효과로 바뀌어 노화와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역설적 현상을 말합니다.
성장호르몬(GH)이 대립적 다면발현의 대표적인 예로 자주 언급됩니다. 성장호르몬은 젊은 시절 신체 성장, 근육 및 뼈 형성, 그리고 전반적인 신진대사 활성화에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 이후 성장호르몬은 몸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과도하게 세포를 증식하게 만들고, 산화 스트레스를 늘리고, 그 결과 DNA 손상이 축적되어 암 발생 위험이 높아집니다. 무엇보다 성장호르몬은 노화하면 빠질 수 없는 인슐린 저항성을 유발하는 강력한 인자입니다.
성장호르몬이 시기에 따라 우리 몸에 정반대의 영향을 끼치는 것을 알고나면, 마치 우리의 DNA 어딘가에 "후손을 남기는 데 전념하고, 일정한 시간이 되었다면 이제 늙고 약해지라" 는 메시지가 숨겨진 것 같아 섬뜩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노화가 정해진 운명이라고 하니 어딘가 모르게 손해보는 느낌이 들고, 후손만 만들고 나면 우리의 존재 이유는 종결되었다는 듯 들려서 서글프기도 합니다. 그런데 노화란 과연 개인에게 마냥 나쁜 일이기만 한 걸까요?
사실 노화를 신체적 기능 저하, 질병 등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노화한 이후에만 느낄 수 있는 삶의 정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성호르몬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여성은 가임기 동안 성호르몬에 휘둘리며 살아갑니다. 에스트로겐은 생식을 준비하는 호르몬입니다. 배란을 준비하며 자궁내막을 증식시킵니다. 에스트로겐은 외형적 여성성을 강화시킵니다. 반대로 프로게스테론은 자궁을 유지하고, 임신이 되지 않을 때에는 생리 주기를 종료하는 호르몬입니다. 높은 프로게스테론은 자궁을 안정된 둥지로 만들어 임신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입니다. 프로게스테론이 낮다면 태아는 자궁에 착상하지 못합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에스트로겐은 '매력적인 여성성'을, 프로게스테론은 '어머니의 모성애'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두 개의 호르몬이 주기성을 띠며 분비되는 이유는 예상하셨겠지만 다름 아닌 임신을 위해서입니다. 문제는 그 두 호르몬의 교체 시점을 예측할 수 없고 심지어는 교체 과정이 부드럽지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변덕스러운 호르몬은 여성의 기분을 크게 좌우합니다. 호르몬 변화로 인한 신체적 불편함까지 더해지면 그 고통은 더욱 커집니다.
폐경은 이러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의 감소로 인한 생식 능력의 종료는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 그리고 월경이라는 생물학적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매달 반복되는 호르몬의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예측할 수 없는 임신의 가능성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실감에 힘들지 몰라도 곧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매달 희망을 가지고 생명을 준비하나 대부분은 붕괴되는 허무함이 종료된 그 이후가 어쩌면, 종의 존속을 위해 쓰여졌던 개인의 짐을 훌훌 털어낸, 실질적인 삶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노화는 단순히 쇠퇴나 죽음 전의 고통스러운 과정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다음 장을 열어주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수십억 년을 통해 인류라는 종이 선택한 길에 슬퍼하지만 말고, 늙어가는 본인의 몸에서 새롭고 깊은 영감을 얻어보면 어떨까요? 예전의 나는 비록 젊고 활기차고 지금보다 건강했을지 몰라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기엔 어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듦으로써 나 자신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존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상을 더 긴밀히 이해해 낼 수 있습니다.
젊음이 다시 돌아오지 않음에 억울해만 하다 보면, 소박하나 역시 소중한 생의 순간들을 그냥 지나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늙기 두려워 마시고 기대해 보십시오. 우리의 종이 이러한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 위대한 생명의 비밀을 알아낼 수도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불쑥 글을 올렸음에도 좋아요로 환영해주시고, 감히 엄두가 안나고, 부끄러워 답도 못 달고 있었음에도 지난 글을 통해 저에게 용기를 보태어 주신 많은 작가님들께 진심에서 우려나오는 감사와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라는 제 처녀작을 이제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얼마나 제 괴작이 허술한지 깨닫고 있습니다. 저는 아예 준비가 되지 않은 자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럼에도 제가 열중하고 브런치 작가님들의 도움을 얻어 발전시킬수 있었던 그 과정과 시간은 애틋해서 그냥 고개를 돌려 무시하고 살기란 또 어려웠습니다. 비단 남겨둔 수십만 자의 활자 뿐만 아니라 그 간 작가님들과 나누었던 교류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기간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딴에는 꽤나 몰입을 했던 것이 몸에 부담이 되었든지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둬야 할 것 같았고 그래서 지금도 도망치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행복하고 의미있던 시간이었지만 과하게 몰입하고 그 몰입에 가치가 인정받기를 희망하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니 버거웠습니다. 그걸 버티기엔 제 몸이 너무 나약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가끔 쓰고 있습니다. 어차피 진짜 작가도 아닌데 철저하게 (그렇다고 결과도 별로인데) 무얼 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생각나는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툭 나온 글이 쓰고보니 제가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에서 말하고 싶었던 주제였던 것 같아서 인사도 드릴 겸 쑥스럽게 고백을 드리고자 합니다.
메타버스에서 데이터화 된 영혼으로 침잠하던 쿠미코와 갑작스러운 죽음을 앞둔 엘리자베스는 아마 늙어가는 경험을 본인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장 안타까워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늙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하고 노화란 무가치 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생명체로서의 존귀함 (특히 AI등이 더욱더 의미가 더해질 미래세계에서는) 은 어쩌면 "늙을 수 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 직업에서 얻은 개똥 철학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쓸 글들에도 아마 댓글을 열 엄두는 안 날 것 같습니다. 한분 한분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인연에 이렇게 예의없이 혼자서 얼렁뚱땅 넘어가버리는 것에 대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기를 간곡하게 바랍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