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떠난다고 해서 잊는 것은 아니야

by 예 진리


서울을 떠나기 전, 나는 한 달이라는 시간을 들여 공간과 관계를 정리했다.




이전직장 동료들과 상사들을 만나고,

함께 실습하고 수련했던 인연들과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과도 만났다.

좋더라.

‘내가 관계를 참 잘 다듬고 이어왔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했다.

모든 사람들이, 전부가 다 같은 분야였다.

나는 이 분야에서 일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이토록 많이 만났는데,

그런데도 이 분야가 힘들고,

한켠에는 새로운 영역으로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걸까?

아니면,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 해 보는 것이니까 해볼 수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분야 안에서만 바라보면 내 시야가 너무 좁아진다.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의 다른 선택을 만들 수도 있다면,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




나는 부산에 내려와 작업실에서

누가 볼지 모르는, 어디에 낼지 모르는 글을 써보고 있다.

여전히 내가 뭘 하면서 살지는 모르지만,

남들이 보기엔 버리는 시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도전 해보려 한다.









조금 느리게, 그러나 나답게

서울을 떠난다는 건 단지 도시를 떠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나를 닳게 했던 방식과, 나를 잊게 했던 속도와,

나를 증명하려 애썼던 삶의 결과 작별하는 일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반짝였고, 무너졌고, 회복했고,

그리고 마침내, 나답게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이 글은 그 결심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다.


도시의 빛과 속도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공간과 관계, 일상과 성찰 속에서 조금씩 나를 되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나를 되찾는 시작이라는 것을.

조금 느리게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그 느림 속에서야 비로소, 나는 나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더 이상 도시의 속도에 나를 끼워 맞추지 않는다.

대신, 나만의 리듬으로 걷는다.


담백하게, 무해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내게는 가장 진실한 삶의 방식이다.

이제는 비효율적인 시간들을 누리며 살아보려고 한다.


이 글이, 서울에서 조금씩 닳아가며 버텼던 누군가에게

조용한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당신의 삶에도,

당신만의 속도가 있음을 기억하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