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릭아트 2017년 4월 기고 / 원리를 찾는 모험가
여기 탁자가 있다. 탁자를‘탁’하고 내리치면 모든 것은 변한다. 그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동시다발적이라 잡아내기 어렵지만, 어쨌든, 그로부터 ‘모든 것은 변했다’. 변화의 대전제는 우주의 규칙. 윤성필은 착실한 탐구자가 되어 이‘우주의 원리’를 따른다. 그리고 작업을 거듭할수록 뼈대는 단단해진다. 그는 우리가 발견을 못할 뿐이지 모든 것은 규칙 안에서 변한다고 말한다. 우주의 법칙으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사물도 모두 우주의 축소판으로, 그 궤도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원리는 사람에 따라 적절하게 적용된다. 철학자에게는 문장이고, 과학자에게는 숫자이고, 예술가인 본인에게는 작업 활동이다. 작품은 우주의 이치를 풀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언어다. 세상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이치다.
단체전으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는 작가들이 많지만 윤성필은 그렇지 않았다. “전시를 열어줄 공간도, 함께할 주변 작가 동료도 많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 불도저처럼 밀고 왔다”는 작가는 두 번이나 적을 옮긴 미술 대학을 마치기도 전, 홀연히 영국으로 떠났다. 준비된 입학 통지서도, 기댈 언덕도 없었지만 오직 “사람들에게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서”그랬단다. 작품을 만들어도 세상에 선보일 방법이 없으니 일단 더 큰 대륙으로 내달린 것이다. 순수하고, 어쩌면 무모한 결정이었지만 그는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말한다. ‘되면 한다’보다는 ‘되려면 한다’는 명제처럼 움직였다. 이는 작업방식에도 적용된다.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실행한다는 그는, 꼼꼼한 드로잉 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작업에 들어간다. 수첩에 끼적거린 에스키스는 ‘그림’이라기보다는 공학도의 노트 같다. 얼마의 간격으로 판을 자를지, 어디에 어떻게 구멍을 뚫을지를 계산해 놓은 메모지이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확정되면 작업은 곧바로 시작된다. 재료를 직접 주무르며 물질로 드러낸다.
이 ‘직통’의 행보는 그의 일관된 행동 방식이기도 하다. 영국으로 가기 전, 그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16장의 엽서로 제작했다. 500부가량 인쇄한 작가는 갤러리, 미술관, 비평가 등에게 2주 간격으로 그것들을 보냈다. 앞면에는 작업 사진, 뒤에는 한 줄로 된 간결한 작업설명이 전부인 엽서. 결과는 당신이 예상한 대로 대다수로부터 무응답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계기는‘윤성필’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고 그는 굳게 믿는다. 후에 만난 평론가로부터 당신이 누군지 궁금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서울 한복판 대형 빌딩을 위한 조각가로 초대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의 작업 뿌리도 하나다. 시리즈가 거듭돼도 방식이 변화될 뿐 주제는 일관한다. “모든 것에는 움직임이 있고 정해진 규칙이 있다”는 것. 그 시발점은 또한 ‘우주의 원리’다. 그리고 철학과 물리학을 길로 삼는데, 양자역학은 꾸준한 관심사다. 양자물리학은 세계가 확률로 움직인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 있음을 강조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중력의 법칙은 여전히 확고하다는 것이 그 근거다. 우리가 낱낱이 밝히지 못해 확률을 활용할 뿐 ‘대단위의 규칙’이 분명히 있음을 그는 상기시켰다. 그에게 무규칙이란 없다. 우주는 하나의 유닛이며 연못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생성되듯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는 이 원리를 몇 개의 시리즈로 풀어냈다. ‘Energy’ 시리즈에서는 용접으로, ‘정중동(Movement in Stillness)’시리즈에서는 오려 내고 꺾어서 하나의 판을 입체로 만들었다. 철판의 안정감, 평평함과 고요함(정, 靜)에서 운동감(동, 動)을 끄집어낸 것이다. 이후 시도한 평면작업 ‘Cosmos, Chaos and Circulation’ 시리즈에는 철가루와 자석이 등장한다. 캔버스 뒷면에서 원을 그리며 자석을 돌리고, 앞면에는 이 자기력을 따라 흔적을 남긴 철가루의 이동을 포착했다. 2시간의 회전 뒤, 캔버스 위에는 철가루의 경로가 원을 그리며 남게 된다. 같은 시리즈 안에는 ‘무규칙’ 버전도 있다. 이 버전에서는 원의 궤도를 없애고 자석을 제멋대로 움직이도록 했다.
이때 철가루의 운동은 자석을 따라 무작위의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이 안에 ‘규칙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만 그럴 뿐 자세히 관찰하고 근본을 생각해볼 때, 이 역시 규칙이 있다. 자기력의 원
리라는 것이고 이것은 언제나 엄격하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작업을 시도했다. 사람이 작품 앞에 서면 센서가 작동하고, 작품 뒤의 자석은 꼭짓점을 중심으로 뱅글뱅글 돈다. 관람객은 철가루를 작품에 뿌린다. 철가루 대부분은 중력에 따라 자유낙하 하지만, 자석에 붙은 것은 움직임을 따라 회전한다. 그리고 원으로 된 흔적을 남긴다.
그의 작업은 대부분이 곡선과 원이다. 그에게‘원’은 어떤 의미일까. 이 는 ‘순환’의 표식이다. 심한 천식을 겪으며 죽음을 떠올린 후 불교 철학은 그에게 ‘모든 것은 움직인다’ 그리고 ‘순환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우주를 돌고도는 윤회의 영역으로 보게 한 것이다. 그는 철학적 기반이 이제 꽤 단단해졌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작업은 이를 삶에 대입한 세세한 공식이 될 것이라며 기대하는 내색을 비췄다. 이 가지는 기본 뼈대를 풍성하게 할 살점이 될 것이다. 재료도 이전과는 다르다. 사진 인화의 기법을 사용해 사람 얼굴의 겹침을 보여준다. 작품은 ‘순환’을 넘어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즉, 자타불이(自他不二)로 귀결된다. 순환의 과정에서 겹치고, 얽히고 합쳐지는 나와 타자의 관계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조립된 이케아 가구’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 조립은 설명서대로가 아니다. 의자의 재료를 색다른 방식으로 조립하고 상상력을 덧붙여 만든 탁자다. 그는 재료를 이해하고 새로운 해석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작업 과정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생각의 뼈대인 우주의 원리를 조립해 살을 붙이지만, 핵심은 절대로 잃지 않는다. 우주는 점점 커지고 있다는 우주 팽창론과 각각 원자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하다는 양자역학을 이해는 하되 자신의 근본 원칙인 순환하고 닫혀있는 철학적 우주를 깨지 않는다.
그에게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을 물었다. 뜻밖에도 그는 작업하는 ‘행위’를 한 번도 즐긴 적은 없단다. 오히려 그 과정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미세한 차이에도 어긋나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고, 용접하거나 철판을 다룰 때 따르는 신체의 고단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작품으로 완성됐을 때의 기쁨은 그 스트레스를 넘는 무시무시한 원동력이다.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달려든다는 그에게 결과에 대한 기대와 완성됐을 때의 성취는 브레이크 없는 사이클이다.
“결과에 늘 만족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 원천은 도전과 결과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다. 그리고 만족의 기쁨이 보는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닿는다고 여긴다.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고, 결과를 얻어내는 연구자는 질문만을 일삼는 염세주의자 보다 언제나 강력하다.
작가 윤성필은 1977년생으로 골드스미스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슬레이드 스쿨 오브 파인아트에서 조각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영은미술관, 한미 갤러리 등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16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OCI 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영은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바 있다. 현재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