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다듬어진 숲

by 이우선주

'필드트립? 계획?'


태림은 교감이 자신의 자리를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교감은 자리에 없었다. 겨우 홈룸 시간에 대한 가닥을 잡았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하는 마음으로 초조하게 출입문만 쳐다봤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서인지, 교사 오피스는 행정 업무 담당 직원들 외에는 거의 자리가 비워진 상태였다.


태림은 초등 교사실에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해담과 태림이 식사 중 대화를 나누면서, 태림이 오피스 동에 있는 교사 오피스에서 오전 시간을 보냈다는 말을 꺼내자, 먼저 식사를 끝낸 엘더가 업무용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초등은 맨 끝에 있으니까, 오피스 동하고는 거리가 멀잖아요. 태림 선생님도 초등 교사실에서 간간히 쉬어요. 우리는 거의 거기서 회의하고 커피 마시고 하니까. 킨사 선생님 방도 초등 교사실 안에 있어요."


교사실이 있다는 이야기는 교감으로부터 얼핏 들은 것 같은 기억이 났지만, 직접 안내받은 적은 없었기에 태림은 얼굴에 궁금한 빛을 띠고 엘더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엘더의 시선은 태블릿만을 향해 있었고,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태림은 그곳의 누군가는 절박한 자신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교사실로 향했다.


초등 교사실은 시드스쿨의 다른 화려하고 세련된 공간들과는 확연히 대조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을 따라 놓인 오래된 책장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부 선반은 아이들의 작품이나 알록달록한 교구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엔 누렇게 바랜 종이뭉치와 겹겹이 쌓인 파일들이 어수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혹시 태림 선생님이세요?”

문을 연 태림의 왼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풍성한 파마머리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킨사예요. 초등 총괄입니다. 진작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네요. 미안해요."


벽면에 붙어 서있는 정수기와 그 옆 테이블 바구니에 있는 믹스 커피를 뜯어 머그잔에 털어 넣던 킨사는 태림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표정을 해 보였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머리 스타일과 둥근 눈썹, 웃을 때 살짝 접히는 눈가를 따라 생기는 몇 가닥의 주름이 온화한 느낌을 주었다.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태림은 킨사가 인상을 자주 쓰는 버릇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미간에 패인 골은 긴 시간 자주 얼굴을 찌푸려 안면 근육이 그 모양대로 자리 잡은 결과였다.

태림의 부모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흔적이었기에, 태림은 순간 킨사에 대해 어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킨사의 음성은 낮고 부드러웠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담아 컵을 요령 있게 돌려가며 믹스 가루를 녹이는 모습은 친근하기까지 했다. 짙은 회색 셔츠 안에는 검은색의 목 폴라를 입었는데, 검은색의 정장 바지와 양말까지 검은색으로 맞춘 단정하고 깔끔한 스타일이 눈에 띄었다.


킨사는 방금 탄 커피잔을 태림에게 내밀었고, 태림은 이를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그리고 새로 커피를 타기 시작한 킨사 옆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따스한 머그잔에 손을 녹였다.


초등 교사 오피스는 복도에도 천장형 히터가 설치된 다른 공간들과는 달리 바깥의 찬 기운이 실내에서 그대로 맴돌았다. 바닥은 오래된 합판 마감으로 군데군데 긁힌 자국과 닳은 부분이 눈에 띄었으며, 중앙에 놓인 테이블도 다른 공간에서 쓰다가 옮겨온 듯한 느낌을 주어, 딱히 인테리어라고 부를 만한 요소가 없었다.

테이블 주위의 긴 의자는 쿠션이 얇고 약간 딱딱해 보였고, 사용된 흔적으로 가죽의 광택이 벗겨져 있었다. 양쪽의 긴 의자 사이에는 2인용 소파와 3인용 소파가 하나씩 배치되어 있었다.


킨사는 태림에게 식사는 잘했는지, 학교는 어떤지 등 가벼운 대화를 이끌며 의자에 앉았고, 태림을 그 옆 소파로 안내했다. 소파에 놓인 쿠션은 푹신하기는 했지만, 겉감의 색이 바랜 데다 실밥이 드문드문 튀어나와 있었다. 소파 옆 작은 전기난로는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나, 추운 날씨와 긴장감으로 얼어붙은 태림을 약간 녹여주었다.


"저... 필드트립 계획을 다음 주까지 제출하라는 내용을 방금 전달받았거든요. 이게 제 업무가 맞나요? 제가 아는 게 거의 없어서..."

태림은 괜히 자신이 준비에 게으르고 자격이 부족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에 말끝을 흐리며 테이블에 찍힌 펜 자국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 당황스러우셨겠어요. 주 진행은 해담 선생님이 하실 거예요, 1학년 담당이신 분."

킨사가 가볍게 태림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림은 안도감과 약간의 당황감으로 눈을 크게 떴다.


"하아아암. 처음 듣는 목소리네?"


태림에게도 처음인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교구 보관실에서 목베개와 담요를 들고 나온 사람은 자령으로, 식사 후 잠깐의 낮잠을 즐긴 모양이었다. 자령은 초록색의 펑퍼짐한 니트를 입었는데, 그 색이 어찌나 진한지 인조잔디 사이에 누우면 아마 찾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태림입니다. 5학년 담당으로 새로 왔습니다."

태림은 일어나 고개를 약간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아, 들은 것도 같고. 필드 트립 준비하나 봐요?"

자령은 말이 빠르고, 억양이 세면서도 발음이 정확했다. 자령은 태림이 대답을 위해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할 때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필드 트립 진짜 골 때리지, 고생하겠네. 교장하고 교감 선생님 결재 둘 다 받는 게 관건인데, 누구 장단에 맞춰야 할지 도대체가 모르겠어요. 안 그래요?"

자령이 일어선 채 있는 태림을 아래위로 훑으며 킨사 옆 의자에 앉았다.


킨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령의 말을 받았다.

“뭐, 쉽진 않죠. 하지만 교감 선생님은 항상 디테일을 중요하게 보시니까, 세세한 계획을 잘 준비하면 별 문제없을 거예요. 특히 시간 계획과 안전 관리에 신경 써야겠죠.”


자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킨사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그런데 교장 선생님 결재받으려면 또 애들 참여도랑 재미 요소를 강조해야 해요. 막연한 규율만 강조했다가 교장 선생님 눈 밖에 나면 곤란해지죠. 그 두 분, 생각보다 취향이 확 달라요.”


킨사가 태림에게 필드트립 준비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점들을 간단히 설명하는 동안, 자령은 의자에 기대 앉아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초록 니트가 부드럽게 주름지며 몸에 맞춰졌다.

자령이 둘의 대화의 흐름을 끊으며 불쑥 말을 던졌다.


“근데,”

자령이 목소리를 낮추며 입꼬리를 약간 올렸다.

"여기는, 다른 곳이랑 조금 다르다는 건 알죠?”


“다르다뇨?”

태림이 되물었다.


자령은 답하기 전, 킨사 쪽을 힐끗 보며 잠시 말을 멈췄다. 킨사는 조용히 커피잔을 들고 있다가 시선을 피하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자령은 고개를 다시 돌려 태림을 보며 말을 이었다.


“시드스쿨은 자율성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그 자율성도 결국은 누가 정한 기준 안에서만 허용되는 거죠. 예를 들면…”

자령은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필드트립에서 아이들이 진짜로 뭘 하고 싶어 하는지는 상관없어요. 결국, 우리가 정해준 ‘자율적인 활동’만 할 수 있거든요.”


태림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자령의 표정을 살폈다. 자령은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댄 채 가볍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교감 선생님은 규율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고,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보이는 걸 중요하게 여기세요. 둘 다 자율성을 강조하지만, 결국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결과물은 아주 ‘통제된’ 자율성이라는 거죠. 그게 이 학교의 방식이에요. 잘 적응하실 수 있겠죠?”


자령의 말투는 가벼웠고, 교장과 교감에 대한 약간의 조소가 느껴졌다.

킨사가 조용히 웃으며 분위기를 정리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돼요, 태림 선생님. 처음이니까 천천히 익히시면 돼요. 해담 선생님과 함께 준비하시면 큰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킨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태림에게 다독이듯 말했다.


하지만 자령의 말이 남긴 묘한 불편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태림은 손에 쥔 커피잔이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다.


킨사가 덧붙였다.

“그리고 필요한 건 저에게 물어보세요.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해담 선생님이 아마 기본적인 부분은 준비해 두셨을 거예요. 처음이니까 가볍게 익혀가는 기회로 삼으시면 돼요.”




홈룸 시간이 되어 태림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이들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용히 책상 위에 손을 올리고 태림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태림의 지시를 기다리는 준비 태세처럼 보였다. 순간, 태림은 예상보다 차분한 분위기에 조금 놀랐다.


교탁으로 걸어가며 태림은 가볍게 숨을 고르고 말했다.

“앞으로 홈룸 시간에 무엇을 하며 보낼지 마저 정해보려고 해요.”

교실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몇몇 아이들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고, 다른 아이들은 태림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여러분이 원하는 활동을 정해볼 건데요, 한 가지 기준은 있어요.”

태림은 아이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리고 함께 지킬 규칙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이들 사이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있었다. 한두 명이 서로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이내 다시 시선이 책상 위로 내려갔다.


“예를 들면, 독서 시간, 팀 프로젝트, 아니면 토론 활동 같은 게 있을 수 있겠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 교실에는 히터 소리만 윙윙 울렸다.


“혹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보세요.”

태림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뒷줄에 앉은 아이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체육관에서 농구하면 안 되나요?”


태림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에요. 다만 체육 시간과 겹치는 활동은 피하는 게 어떨까요? 홈룸 시간은 평소에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학생들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태림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시드스쿨의 교육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이렇게도 조용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태림은 한편으로 이 상황이 다루기 쉽다고 느껴졌다.


“좋아요. 그러면 각자 하고 싶은 활동을 하나씩 적어내 주세요. 제가 정리한 다음, 우리가 지킬 규칙도 함께 정해볼게요.”


태림은 칠판에 ‘홈룸 시간 제안’이라고 적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렇게 하면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아이들은 특별히 반발하지 않고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태림은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정리해 가는 과정에서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학교의 '철학'이자 자신의 '교육관'인 자율적인 교실이, 예상보다 훨씬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을 귀가시킨 뒤, 뒷정리를 하던 태림에게 복도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노크를 했고, 태림은 놀라 위에서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채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태림 선생님."


시드 스쿨로 온 이후 교장과 나눈 첫 대화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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