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뿌리
"후원자의 자식이라..."
태림은 복도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참여가 단순한 방문인지, 아니면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의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태림은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마음이 아주 불편했다.
집합 장소에 도착했을 때, 태림은 한눈에 로빈을 알아볼 수 있었다. 평소 조용하고 질서 정연한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드는 한가운데 처음 보는 인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동그란 머리모양에 날카로운 턱선이 눈에 띄었다. 쌍꺼풀은 없으나 꽤 큰 눈, 웃을 때 끝부터 가늘어지며 눈썹을 들썩이는 버릇이 있는 로빈은 학생들과 벌써 친해진 듯 하이파이브를 하고 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로빈의 머리카락을 풀썩이고, 소매를 잡아당기며 다소 무례해 보이는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지만, 로빈은 신경 쓰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태림은 다정해 보이지만 묘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로빈을 조금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동양인의 외모였으나, 입매나 분위기, 옷차림에서 풍기는 느낌은 로빈이 한국에서 자라지는 않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더군다나,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에 헐렁한 후드티와 조거 팬츠 차림, 그리고 커다란 배낭까지, 로빈의 모습은 '후원자의 자녀'라는 직함과 어울리지 않는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로빈은 이제 아이들 무리에 둘러싸여 아이들의 키를 맞추어 눈을 맞추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때, 태림을 발견한 몇몇 아이들이 곧바로 장난을 멈춘 뒤 태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머지 아이들도 태림을 보자마자 로빈에게서 떨어지며 얌전해졌다. 태림은 로빈을 너무 오래 응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혹스러워졌다.
"안녕하세요! 태림 선생님이시죠?"
당황감에 굳어버린 태림에게 로빈이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로빈의 목소리는 밝으면서도 차분했지만, 지나치게 친근한 태도에 태림은 약간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내 로빈이 내민 손을 살짝 잡으며 대답했다.
"아, 네. 로빈 씨...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오늘은 로빈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시면 안 되겠죠?"
로빈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 속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태림은 로빈이 다소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로빈 또한 자신을 경계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태림과 로빈이 첫인사를 나누고 있던 시점, 교장이 평소보다 과한 웃음을 띠고 멀리서부터 로빈을 부르며 등장했다.
"아이고, 로빈 씨, 잘 오셨습니다. 캐나다에서부터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 바로 참여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사려 깊은 교장의 말투는 평소보다 더욱 부드러웠고, 그는 중간중간 태림과 눈을 맞추며 한 번씩 인자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태림 선생님이 잘 도와주실 겁니다. 한국은 처음이라고 하셨죠?"
"... 네. 제 기억상으로는요."
로빈은 분명 눈에 띄게 경계심을 드러내며 말했지만, 교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좋은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자, 늦기 전에 얼른 출발하시죠. 태림 선생님은 잠시만, "
교장이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말투로 버스에 올라타라고 지시하고는, 등을 돌려 태림에게 조용히 당부했다.
"저, 중요 후원자님의 자제분이시고, 또 아동 교육 분야를 전공하셨다고 하니, 태림 선생님이 신경을 좀 써 주세요.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잘할 수 있죠?"
태림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교장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자신이 이미 로빈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되어 괜히 날을 세우는 것 같아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쿠아리움으로 이동하는 동안, 태림은 로빈이 자꾸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신경에 거슬렸다. 필드트립 전, 태림은 아이들에게 이동 중, 특히 버스에서 질서를 지키고 조용히 할 것을 당부했다.
로빈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질문하고, 관심을 끌어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태림은 한국에 처음 방문한다던 로빈이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대화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로빈과 아이들이 큰 소리로 웃자 태림은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나 그쪽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 참던 태림이 한 마디 하려는 순간 버스가 좌회전을 하며 몸이 잠시 기울었고, 태림이 중심을 다시 잡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자, 버스는 아쿠아리움 외부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버스가 멈추자, 아이들은 태림의 지도를 받아 질서 정연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자, 모두 내려요! 혹시 무슨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요!”
태림보다 앞서 버스에서 내린 로빈이 외쳤다. 로빈의 목소리는 활기찼고, 아이들은 로빈이 주는 제한 없는 자유감에 이미 매료된 듯 보였다.
태림은 아이들 사이에서 로빈의 인기와 영향력을 실감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쿠아리움 입구로 들어서며, 태림은 해담이 미리 준비해 둔 필드트립 계획표를 꺼내 들었다. 세세하게 작성된 스케줄을 보며 태림은 속으로 안도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 이제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태림이 목소리를 높이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시선은 이미 로빈에게 향해 있었다. 로빈은 태림의 말을 가로막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레 아이들의 질문에 응답하며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굳이 태림에게 주도권을 넘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여러분, 이쪽으로 가면 바다사자 쇼를 볼 수 있어요. 근데 바다사자랑 바다표범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
로빈이 던진 질문에 몇몇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 태림의 손에 쥔 스케줄표가 무색해진 것에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로빈은 이미 계획된 코스를 무시하고 아이들을 새로운 경로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림은 그 장면을 지켜보며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학생 무리와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짐을 통해 로빈에게 불만을 표시했으나, 로빈은 눈치가 영 없는지 태림에게 손짓하며 얼른 오라고 재촉까지 했다.
‘본인이 계획한 것도 아니면서, 얼마나 잘 안다고 저렇게 무턱대로 행동하지?’
하지만 로빈은 아이들과 교감하며, 아이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로빈을 따라다니며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태림은 아이들과 로빈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지금까지 고민하며 친밀감을 형성하고자 노력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나 허탈한 심정이 들었다.
“로빈 씨, 잠시만요.”
태림은 결국 참지 못하고 로빈을 불렀다.
“지금 가는 경로는 계획된 코스가 아닌 것 같은데요.”
로빈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태림을 바라보았다.
“아, 미안해요. 아이들이 이쪽에 더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아서요. 이왕 나온 김에 최대한 즐겁게 해 주고 싶어서요.”
“하지만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안전하고 효율적입니다.”
태림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로빈은 잠시 망설이다가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선생님이 맞습니다. 그러면 계획대로 진행하죠.”
하지만 태림은 로빈의 태도가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더 이상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로 보였다. 심지어 로빈은 바로 대화를 마치겠다는 표시로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신발 앞 코로 바닥을 두어 번 내리찍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식사 시간을 맞이하자, 태림은 다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로빈과 아이들 사이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태림은 그 소리가 자신에게 점점 더 거슬리는 소음처럼 느껴졌다. 로빈은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음식을 고르도록 했고, 심지어 몇몇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간식을 나눠 먹었다.
반면, 태림은 아이들이 질서를 유지하며 규칙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용히 줄을 맞추도록 지시했지만, 아이들은 이미 로빈의 방식에 더 익숙해 보였다.
“여기 보세요!”
로빈이 한 아이를 들썩이며 장난을 치는 모습에, 다른 아이들도 따라 웃으며 장난을 쳤다.
태림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질투와 분노감으로 마구 뒤섞인 감정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