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잎새
로빈이 머리를 장난스럽게 흔들어대자, 아이들은 더 크게 웃으며 서로를 밀고 당기며 놀이에 빠져들었다. 그 웃음소리는 태림의 귀에 울리는 종처럼 반복해서 맴돌았다. 점점 커져만 가는 소음 속에서, 태림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누르며 로빈을 불렀다.
“로빈 씨.”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꾹꾹 주어 로빈을 부르고, 잠시 아이들 틈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자는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러나 로빈은 자신을 왜 불렀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아이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충분히 알아들었음에도 자신을 고의적으로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은 태림은 목소리를 높이며 단호하게 로빈을 다시 불러 잠시,라는 말로 채 문장을 완성할 아량도 없는 상태로 로빈을 불러냈다. 아이들과 즐겁게 놀던 로빈이 태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빈의 미소는 잠시 멈췄지만,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표정이었다.
식당의 뒤편으로 먼저 향한 태림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감정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로빈을 쏘아보았다.
“여기서 이렇게 장난을 치시면 안 됩니다.” 태림은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으나, 목소리의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아이들이 질서를 지키며,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로빈은 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태림은 악의가 없는 자신을 왜 공격하는지 모르겠다는 저 표정이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필드트립을 망치고 있는 장본인이, 오히려 본인을 가해자처럼 바라보는 시선에 태림을 더욱 화가 치밀었다.
“선생님, 여기까지 나와서 꼭 그렇게 딱딱해야 하나요? 아이들은 지금 정말 행복해 보이잖아요.”
행복? 저것이 행복일까? 태림은 제어를 잃은 아이들의 과도한 흥분이 가져오는 일시적인 즐거움에 지나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었으나, 로빈의 지나치게 안일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잘 나가는 후원자의 자식이라, 본인은 금수저라 누군가의 통제를 받아본 일이 없어 절차도, 질서도 모르나 보네'
처음 동행하게 되었을 때부터, 왠지 그간 열심히 준비한 해담의 노력이 전부 무시당하고, 로빈이 본인의 흥미만을 탐닉하기 위해 해담을 몰아낸 것 같아 불만스러웠던 마음이 불씨였던 것일까. 태림을 속에서는 아이들을 핑계로 필드트립의 방향성을 멋대로 바꿔버리는 로빈을 향해 미움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했다.
“일시적 행복감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태림은 스스로도 찰나 동안 놀랄 정도로 차갑게 말했다.
“아이들은 책임감을 배워야 합니다. 질서를 지키는 법도요.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교양 없고 못 배웠다는 소리만 듣겠죠."
로빈은 잠시 태림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저는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기면서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억지로 가르치려는 방식보다는요.”
태림은 귀를 의심했다.
"억지라고 하셨어요 지금?"
태림은 입술을 꾹 다물고 로빈을 쏘아보았다. 목소리는 한결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억제되지 않은 분노가 배어 있었다.
로빈은 잠시 멈칫하더니, 태림의 강한 반응에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네… 기분이 상하셨나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태림의 가슴속에 억눌린 감정들이 한꺼번에 불이 붙어 폭발을 일으키는 느낌이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요?”
태림은 비웃듯 되물었다. “아이들을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려는 제 방식을 ‘억지’라고 폄하해 놓고는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가 아니었다고요? ”
태림은 숨을 들이쉬며 말을 멈췄다. 눈가가 약간 뜨거워졌다.
로빈은 태림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짧은 한숨을 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이 그렇게 들릴 수 있다는 건 이해해요. 사실, 제가 무례하게 들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한국어는 부모님 하고만 써와서 단어의 무게를 잘못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 말에도 태림은 진정되지 않았다. 상황이 불리해지니 갑자기 한국어가 서툰 척하는 것처럼 느껴져 로빈이 아주 비겁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례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죠. 당신이 지금 제 교육 방식을 전면 부정하는 걸로 들렸다고요.”
태림은 로빈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서며 계속 말했다.
“저는, 최소한, 아이들이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게 교사의 역할이라고 믿어요. 그런데 그걸 억지라고 규정지어버리시네요?”
로빈은 말없이 태림을 바라보았다. 아까의 천진한 표정은 사라지고, 투명한 피부 탓에 목 부분부터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좀 더 신중하게 말하도록 할게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한 건, 아이들이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배울 수도 있다는 점이었어요. 제가 그렇게 자랐거든요. 모든 걸 일일이 가르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죠.”
태림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로빈을 바라봤다. 태림은 로빈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로빈의 태도와 방식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림은 더 이상 로빈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로빈에게 쏘아대던 레이저 광선 같은 눈빛을 거두고, 로빈에게 시선조차 두지 않은 채 빛깔 없는 눈동자로 돌아서서 아이들을 향해 돌아갔다.
아이들은 여전히 신나 있었고, 심지어는 수저로 학교 식당이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장난도 치고 있었다.
태림이 이를 말리려는 찰나, 한 아이의 젓가락이 손에서 튕겨져 나갔고, 맞은편에 앉은 학생의 눈을 찔렀다.
“아야!”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며 공기가 얼어붙었다. 태림은 본능적으로 다친 아이에게 재빨리 뛰어갔다. 한 아이가 눈을 감싸고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 앉은 다른 아이는 두 짝 중 하나만 남은 젓가락을 움켜쥔 채 얼어붙어 있었다. 주변의 웃음소리도, 장난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 다쳤어?” 태림은 자세를 낮춰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이의 손가락 사이로 살짝 붉어진 피부가 보였다. 큰 상처는 아닌 듯했지만, 아이는 고통과 두려움에 울먹이고 있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태림이 안심시키려 했지만, 이미 걱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학부모들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교감 선생님은 분명히 아이들 관리 소홀이라고 꾸짖으실 거야. 나 잘리는 거 아냐?’
‘교장 선생님은?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후원자들 앞에서 망신이라도 당했다는 말이 나오면 어쩌지?’
그때 로빈이 자연스럽게 아이 옆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많이 놀랐구나. 괜찮아, 천천히 숨 쉬어 보자. 들이마시고… 내쉬고. 잘하고 있어.”
로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단호했다. 그는 아이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계속 다독였다.
“괜찮아. 지금은 조금 아플 수 있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로빈의 진정 어린 말에 아이는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태림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이 대처할 시간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태림은 다친 아이를 바라보며 얼굴을 더 굳혔다. 한순간의 부주의로 일이 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준비 과정에서 자신이 이 필드트립의 주도적인 역할은 아니었지만, 결국 책임은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오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로빈까지 달고 왔으니, 자신을 향해 쏟아질 질책이 벌써부터 두려웠다.
태림은 장난을 친 아이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이쪽으로 와서 선생님이랑 이야기하자.”
아이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태림 앞에 섰다. 태림은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말해 보렴.”
“그냥… 장난이었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아이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
“장난이었다고 해서 다 괜찮은 건 아니야.” 태림은 단호하게 말했다.
“너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죄송해요…”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빈이 그 순간 다가와 아이 곁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많이 놀랐지? 괜찮아. 우리 모두 실수를 할 때가 있어. 중요한 건, 실수를 통해 뭘 배울 수 있느냐는 거야. 이번에는 다행히 큰일이 아니었으니까, 다음에는 더 조심하면 돼.”
태림은 로빈의 도 넘는 참견에 화가 나 손끝이 저려올 지경이었다.
“로빈 씨.” 태림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건 단순히 위로할 일이 아니에요. 이 아이가 자신의 행동의 여파를 배우는 게 더 중요합니다.”
로빈의 눈에 미세한 긴장이 스쳤다.
“저도 동의합니다, 태림 선생님. 하지만 지금은 아이가 겁에 질려 있는 상태잖아요. 먼저 진정시킨 후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태림은 로빈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책임은 즉각적으로 배워야 하는 겁니다. 미루면 제대로 깨닫지 못해요.”
로빈은 약간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책임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배우도록 돕는 게 더 효과적일 때도 있어요.”
태림의 눈이 번쩍였다.
“자연스럽게요?” 태림은 소리치듯 말했다.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나중에 문제가 더 커지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설마 로빈 씨가요? 아니잖아요. 이런 건 저와 해담 선생님처럼 현장에서 모든 걸 관리하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겁니다. 저는 교사니까요."
로빈은 당황한 기색으로 태림을 바라보았다.
“그럴 의도로 말씀드린 건 아니에요. 다만—”
“후원자의 자제분이라 책임감 같은 건 경험해보지 못하셨나 보군요.” 태림은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로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로빈은 태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하죠?” 태림은 말끝을 올리며 비꼬았다. “아이들에게 질서 있는 규칙을 가르치는 걸 ‘억지’라고 비난한 사람에게?”
로빈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순간, 다친 아이가 눈물을 닦으며 로빈을 향해 말했다.
“선생님, 저…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졌어요.”
로빈은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되찾았다. “고맙구나. 너도 잘 참아줘서 고마워.”
태림은 그 말을 들으며 속이 뒤집어지고 이제는 메스꺼운 느낌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