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소요
보고서를 마무리한 태림은 완전히 지쳐 겨우 씻고 잠이 들었다. 어찌나 피곤했는지, 태림은 방 안의 전등조차 끄지 않고 잠들었다.
겨울의 끝에 끈질기게 붙어있는 추위는 아직 한창처럼 느껴졌다. 방을 메운 서늘한 공기에 머리가 띵해진 태림은 비틀거리며 난방을 켰다.
창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자꾸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기분에 태림은 잠이 깼다. 필드트립 이후 이틀의 주말이 있었기에, 오늘은 늦게까지 자도 되는 날이었지만, 더 이상 누워있기 답답해 일어나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늘이며 짧게 스트레칭을 했다.
시드스쿨의 교사들은 모두 교사 기숙사를 써야 했다. 교직원들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지만, 교사들은 아니었다. 평일에 학교 밖을 나갈 때도 시드스쿨 내부 네트워크를 통해 외출 보고를 해야 했다. 행선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 외출 및 복귀 시각을 적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주말에는 본가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는 등 자리를 비웠다. 오늘따라 교사 기숙사 동이 더욱 고요했다.
태림은 집을 박차고 나와 시드스쿨에서 생활한 지난 몇 주간 단 한 번도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태림에게 연락하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심란했던 태림은 나갈 채비를 하고 교사 오피스에 도착했다. 태림은 무엇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다음 주 수업 준비를 보강하고, 앞으로 있을 행사들을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
오피스는 거의 모든 자리가 공석이었다. 태림이 모르는 중, 고등 파트의 교사들이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소수의 인원이 드문 드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소보다도 훨씬 차분한 분위기에 조금 기분이 나아진 태림은 업무에 몰입했고, 어느 순간 햇빛에 눈이 부시다는 것을 자각한 태림이 시계를 봤을 땐 거의 정오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그때, 오피스의 차단막이 열리고 닫힐 때 나는 '우웅'하는 기계소리가 낮게 들렸고, 누군가 거의 소곤대는 목소리로 태림을 불렀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본 태림을 우뚝 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교장이었다.
교장은 태림에게 고개를 약간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태림 선생님, 어제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약간의 안도감마저 담겨 있었다.
“저도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물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겠죠.”
태림은 교장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말이 전적으로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교장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교장은 태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계속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을 위해 최대한 조용히 처리했습니다. 학부모님들도 큰 소란을 원하지 않으셨고, 학교 이미지도 중요하니까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태림을 살펴보며 덧붙였다.
“저는 태림 선생님이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어제의 일로 너무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교장은 눈은 웃지 않았지만, 말의 공백 사이까지도 미소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는 중간중간 눈썹을 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림을 안심시키려 하는 모습이었다.
“태림 선생님은 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해낼 거예요. 믿습니다.”
태림은 계속되는 교장의 위로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안도감과 서러움이 동시에 눈물샘을 터뜨리려는 것을 태림은 간신히 막아냈다. 그러면서도 태림은 교장의 배려와 든든함에 감탄했다. 부하 직원으로서의 충성심이 마구 솟아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때, 복도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교장은 급한 느낌으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오피스를 나갔다. 복도에서 누군가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들렸지만, 태림은 교장이 준 위안에 마음이 편해져 그의 대화 상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기분이 나아진 덕분일까, 태림은 허기를 느끼고 식사를 하러 나가기로 했다. 오피스에서 막 출발해 복도를 걷는 태림의 앞에 교감이 서있었다. 태림은 아까 교장이 교감과 대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스침과 동시에, 사고에 대해 교감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교감 선생님, "
교감은 차갑고 짙은 눈동자로 태림을 응시했다.
"사고가 잘 해결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주의 하-"
무거운 분위기를 깨려 평소보다 조금 격양된 톤으로 말하던 태림은 교감이 인상을 잠시 찌푸리며 그만하라는 손짓을 해 보이자, 매우 당황하며 말을 멈추었다.
“교장 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겠지만,” 교감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어제 일이 조용히 넘어간 게 누구 덕분인지 아시는 게 좋겠군요.”
태림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교감은 한쪽 입술을 약간 씰룩인 뒤 말을 이었다.
“로빈 선생님이 학부모들에게 직접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 덕분에 학부모들이 진정할 수 있었고, 일이 커지지 않은 겁니다.”
교감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태림 선생님께서 해결에 기여한 것처럼 생각하신다면, 사실과는 다르다는 걸 명심하세요.”
교감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휙 돌렸다가, 다시 태림을 돌아보고는,
"교사 기숙사 관리비가 너무 많이 나오던데, 괜한 에너지 낭비를 피해 주시면 좋겠네요." 하고 흘리듯 덧붙였다.
태림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서 있었다. 얼이 빠진 태림을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쳐다본 뒤 교감은 복도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교장의 부드러운 위로와 교감의 차가운 반응에, 태림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교감은 어제 태림이 학부모들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며 사과하던 것은 기억에 없는 모양이었다. 태림은 왜 다른 교사들이 교장을 훨씬 존경하고 편하게 생각하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교감은 차갑고, 권위적이며, 불친절했고, 태림의 마음에는 교감에 대한 반감이 깊게 자리 잡았다. 이와 대비되는 교장의 이미지는 하루가 지나가면서 더욱 부드러워졌고, 저녁 즈음에 태림은 그의 번쩍이는 이마와 끊임없는 미소는 진정한 리더십의 상징처럼 느끼기까지 했다.
하루가 거의 다 끝나가던 때에, 태림은 침대에 누워 어제 사고와 이어진 질책, 그리고 오늘을 되짚었다. 괴로움과 분노가 교차했지만, 태림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모든 상황에 대해 다시 정리하려고 애썼다.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무너진 상황을 자신이 얼마나 불안해하는지를 문득 깨달았다. 동시에 어릴 적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태림은 늘 규칙을 잘 따르는 아이였고, 그것이 자랑이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 규율에서 벗어나거나 잘못하면, 부모의 말은 항상 날카로웠다.
“네가 이래서 어디 가서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겠니?”
그 말은 꾸중 그 이상이었다.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태림은 부모의 인정은커녕, 스스로가 존재 가치조차 없다고 느끼곤 했다. 규칙과 질서는 태림을 버티게 해주는 기반이었다.
그렇기에 로빈처럼 규율을 쉽게 무시하는 사람은 태림에게 있어 그 기반을 흔드는 존재로 느껴졌다. 필드트립에서 로빈의 행동은 태림이 견뎌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것이 태림을 그렇게 분노하게 만든 것이었다.
태림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로빈에게 자신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반응했다는 생각이 태림을 불편하게 했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마음대로 이끌던 모습과 자신에게 '억지'니 뭐니 해가며 비난하던 모습이 생각나니 다시금 괘씸해졌다. 더군다나 오늘 교감에게는 로빈 덕분에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까지 들은 것을 생각하니 분했다.
하루종일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라 태림은 침대 머리맡의 충전기에 하루 종일 연결되어 있던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순간, 에너지를 아껴 쓰라는 교감의 말이 떠올라 괜히 움찔했다.
평소에 연락하는 사람이 딱히 없어 사실 쌓여있는 연락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시드스쿨 사내 메신저 앱에서 알림이 몇십 개가 와있었다. 주말에 이런 일이 없었던 터라, 태림은 내심 조마조마하며 앱을 켰다.
“We’re excited to announce that Robin has joined us! You can now find them in the company messenger.(로빈 님이 시드스쿨 교직원으로 등록되었습니다. 메신저를 통해 로빈 님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습니다.)”
놀라움과 혼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은 태림은 로빈의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경악하며 로빈의 프로필을 눌렀다. 어딘지 모를 산에 올라 한참 상기된 얼굴로 찢어지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튀어 오르자, 동명이인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기대마저 좌절되었다. 사진 옆으로 소개 문구가 나타났다
'교육학 전공, 창의적 학습 방법 연구' 그리고 '인지치료와 놀이 기반 학습을 활용한 아동 정서 지원.'
그 문구는 태림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런 배경이 있어서 그런 행동들이 나온 거였나.’
태림은 로빈이 필드트립 중 보여줬던 태도들이 떠올랐다. 아이들과의 거리감을 좁히고 다친 아이를 다독이며 차분하게 설명했던 모습들. 태림은 스스로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빨갛게 손톱자국이 남았다.
아이들과의 자연스러운 소통, 그리고 아이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그 여유로운 태도가 자신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태림은 알고 있었다. 그런 묘한 패배감이 자신을 더욱 날카롭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림이 선택한 교육 방식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태림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화면을 스크롤하며 로빈의 프로필을 다시 읽었다.
태림은 고개를 살짝 흔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은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혼란은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그때, 네트워크 메시지 알림이 화면에 떴다.
“태림 선생님, 주무실까요?”
보낸 이는 로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