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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 Dec 19. 2019

짜증내지 맙시다

나는 짜증 내는 사람에게 매우 취약하다. 차라리 불같이 화를 내거나 조목조목 논리 정연하게 따져 물으면 대꾸할 말이라도 생길 텐데, 짜증 내는 이에게는 어떠한 말도 행동도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무방비상태로 놓여야 하는 그 상황이 겪어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짜증의 사전적 뜻을 찾아보니 '마음에 꼭 맞지 아니하여 발칵 역정을 내는 짓. 또는 그런 성미.'라 한다. 그것 참... 저 뜻을 보고는 세상사 마음에 꼭 맞는 게 어딨다고...하며 혀를 찼다.


사실 살아가다 보면 화와 짜증을 구분해서 내는 이는 없다. 그냥 그때 마음이 내고 싶은 본능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일 때가 훨씬 많을 것이다. 나 역시도 크고 작게 마뜩잖은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고, 개중에 얼마는 나도 모르게 짜증을 냈던 순간이 꽤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때엔가 내가 짜증을 받아내야 하는 당사자가 되어보고 난 이후, 단순히 짜증을 낸다는 것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기함할 노릇이며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지 단박에 알았다.


내가 누군가와 투닥거리는 그 시작에는 늘 짜증이 있었다. 그게 내 것이었든 그들의 것이었든, 화를 부르는 그 기저에는 짜증 섞인 말투와 행동, 눈빛이 항상 자리한다. 그것들이 오고 간 이후부터는 사실 왜 짜증이 났었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태도 자체에 또 화가 나기 시작한다. 사실 화를 낸다고 해결되는 것 또한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냥 기분이 조금 풀리는 정도? 헌데 그것도 해보니 화내고 되려 더 무안하거나 별 감흥이 없는 때가 빈도상 훨씬 많았던 기억이다. 화내도 분은 안 풀리고, 화내고 후회한 적이 사실 훨씬 많다. 


다 알지만 또 사람인지라 비슷한 상황에서 슬금슬금 화가 치밀어 오르고, 참자 참자 해도 못 참는 한 순간이 오면 나는 또 똑같이 욱 하는 사람이겠지만, 적어도 짜증은 내지 말자고 자꾸 곱씹는다. 진심으로 짜증은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짜증은 내는 이도 듣는 이도 보는 이도 모두 짜증 나게 하는 신기한 구석까지 가졌다. 비루한 생각일지 몰라도 짜증을 낼 거면 차라리 화를 내자 싶다. 화는 내는 이유도 내용도 적어도 뉘앙스라도 담을 수 있으니. 혼잣말이지만 혼잣말 같지 않은 짜증보다야 낫지 않으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사실 곱고 좋고 온화하기만 한 사람일 수 없는 이상, 화도 내면서 살아야 하고 성질도 가끔은 부려가며 살아야 진짜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거기서 그칠게 아니라 여차 저차 해서 화를 내고 상황이 정리되고 난 후, 사과해야 할 대상이 있으면 적절한 타이밍과 언어로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알고 사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그 사과가 단순히 미안함의 집합체가 아니라, 사실 그때 내가 왜 화를 냈었고 그때 마음이 이러저러했고 그래서 그런 것이니 '화냈었던 나'를 조금 더 이해해줄 수 있겠냐고 상대방에게 여지를 주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사과를 하는 것은 화낸 이의 몫이지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지 이해만 하고 그칠지는 받는 이의 몫이다. 나의 사과가 당연히 상대방의 화 풀림이어야 한다는 공식은 틀렸다.


나는 사람에게 가장 취약한지라 뒤늦게 인간관계가 가지는 심오하고도 어렵지만 오히려 단순하기도 한 이치들을 이리저리 부대껴가며 배우는 중이다. 어렸을 때는 참 어리석게도 싸우고 나서 먼저 사과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싸우고 나서 그 불편한 어색함을 굳이 참고 견뎠고, 그러던 중 이래저래 사람을 잃어보기도 했다. 진짜 내 사람이 아닌 사람은 싸우지 않고도 자연스레 곁을 떠나게 될 테지만, 굳이 싸움까지 만들 만큼 애정이 각별한 사람이라면 잘 싸우고 잘 풀고 오래도록 보는 게 조금 더 현명하게 사는 법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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