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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희 May 19. 2020

스물아홉서른둘

좌충우돌 결혼 이야기

엄마는 아홉 수라며 계속 선자리를 들이 미셨다. 지금은 여자도 서른을 훌쩍 넘겨 결혼해도 괜찮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스물아홉은 노처녀였다. 나는 독신주의자였다. 막연히 멋있기도 했고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될까 무서웠다. 그 날은 설날 연휴였다. 심심하기도 했고 지금까지 착하게 살았으니 하루쯤 아무에게나 비싼 밥 한 끼 얻어먹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잔소리도 이번 한 번으로 정리하면 나에게는 일석이조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인생이 어디로 갈지 누가 알겠는가?(헛웃음)


엄마는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느니 혼자 살아도 괜찮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긴 한데 막상 혼기가 꽉 찬 딸이 있으니 부담스러웠나 보다. 우리 가족은 19평 아파트 일층에 살았다. 방 두 칸에 좁고 기다란 복도와 주방이 있는 서민 아파트였다. ‘예삐’라는 몰티즈 강아지 한 마리도 같이 살았다. 이 녀석도 나처럼 아빠를 싫어했는데 그래도 나보다는 착했다. 주인이라고 아빠가 들어오면 마지못해서 라도 꼬리 치고 반기고 그랬다. 


어느 날 엄마는 우리 아파트 앞 동에 사시는 분께 조카를 소개받으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분은 엄마가 출근하실 때 같이 버스를 타고 가면서 며칠 동안 엄마를 설득하셨다고 한다. 나의 시당숙이 되셨다.(헛웃음) 


그 날이 왔다. 00역 커피숍에서 시당숙과 그 남자 그리고 엄마와 내가 만났다. 시당숙과 엄마는 싱글벙글 웃었다. 마주 앉은 통통한 얼굴의 그 남자도 그랬다. 당숙과 엄마는 커피를 한자 같이 마시고 좋은 시간 보내라고 하시면서 자리를 떠나셨다. 엄마는 환하게 웃었다. 근데 그 분위기는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정말 구리다. 뭔가 키득거리며 커피숍에 남은 두 사람은 놀리는 듯한 야릇한 미소였다. 순간 괜한 짓을 했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맛있는 밥이나 얻어먹고 가자는 생각만 들었다. 이렇게 말하니 양심불량 쓰레기로 보이겠지만 만남의 끝을 보면 난 무죄다. 


나는 어른들이 나가고 그 남자에게 밥 먹으러 나가자고 했다. 이건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둘 다 시간을 때워야 했기 때문에 밥을 먹으러 가려고 했을 뿐이다. 그래서 아침도 굶고 나왔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는 배가 불러서 밥 생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망했구나!’

나: “그럼, 어른들 가셨으니 밥 먹으러 나갈까요?”

그 남자: “아... 죄송한데 제가 배가 불러서 밥 생각이 없습니다.”

나: “아, 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았지만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괜찮다고 해야 하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젠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운동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탁구 이야기까지 나왔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나:  저 초등학교 때 탁구 선수였어요.

그 남자: 오호~그럼 탁구 잘 치시겠네요!

나: 초등학교 때 탁구 선수할 사람 손들라고 해서 한 거라 어디 가서 잘 친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죠...

어차피 다시 볼 사람도 아니라 약간의 허풍을 떨고 싶었나 보다.

나: 그래도 여자치고는 그럭저럭 쳐요!


그 남자는 피식 웃으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탁구를 치러 가자고 했다. 자꾸 이 남자에게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순간의 재치를 발휘해서 설 연휴라 탁구 연습장 쉴 것 같다고 우겼다. 하지만 그 남자의 등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커피숍 문 쪽으로 이미 향해 가고 있었다. 얼떨결에 그를 따라나섰다. 나는 문 연 탁구장이 없기를 빌었다. ‘설마 오늘따라 이렇게 재수가 없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그 남자의 차에 탔다. 그 당시는 공룡시대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는 공룡시대나 마찬가지다. 그 남자의 눈은 차 창 너머로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좁은 상가 건물들 사이로 그 남자의 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내 배 속은 꼬르륵거렸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그냥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뒤통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문이 열린 탁구장을 발견했고 우린 탁구를 치게 되었다. 그는 환한 얼굴로 내기 탁구를 하자고 제안했다. 어찌나 해맑던지... 착한 일 하는 샘 치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남자는 내가 진짜로 탁구 실력자인 줄 알았나 보다. 그 날 만난 선을 본 여자라고 생각을 조금도 안 하는 것 같았다. 스매시에 커브볼에 아주 신이 났다. 나는 이리저리 똥개 마냥 탁구공 주으러 다니기 바빴다. 내가 수세에 몰리자 멋쩍은 지 몇 점 봐주고 게임을 몇 번 더 했다. 게임은 그 남자의 멋진 승리가 되고서야 끝났다. 나는 탁구 경기가 끝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집에 가서 밥 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는 데 탁구장 사장님이 내 팔을 붙잡으셨다. 남자분이 게임 비를 안 냈다고 하면서 나에게 내라고 했다. 내기였으니 당연히 진 사람이 내는 게 맞다. 하지만 억울했다. 배가 고파서 더 억울했나 보다. 내기였지만 선을 본 여자에게 게임비까지 내라고 하는 건 똥매너다. 내 얼굴은 일그러졌다. 아무튼 게임비를 내고 나왔다. 그 남자는 멀찌감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까처럼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아주 재미있었다고 말을 건넸다. 아하 정말 인간은 불통의 동물인가 보다. 그 남자는 나를 집까지 데려 다 주었다. 그 남자가 차에서 내리면서 연락하겠다고 하길래 엄마를 통해서 연락드리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 말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를 머금은 채 그 남자는 알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떠났다. 

나는 집에 가서 밥을 한 솥 비벼 먹었다. 


내 마지막 이십 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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