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문명 바깥에서
문명 안쪽으로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나희덕 시인을 생각하면 나의 몸과 마음에서 산목련 꽃이 핀다. 그는 산목련꽃을 닮았다. 언젠가 말했다. 자식들에게 이미 유언을 남겼다고 하였다. 자신이 죽으면 무덤 대신에 산목련 한 그루 심어달라고 하였다. 그 산목련 나무 아래 나무 의자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후손들이 가끔 찾아와서 그 나무의자에 앉아서 쉬었다 가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바로 그 나무의자가 되고 싶었다. 나무 의자가 되어 오래도록 바라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 가끔 산목련꽃 종소리가 의자에 내려앉아서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할 것 같았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그가 죽기 전에 이어도공화국에 산목련을 심고, 그 산목련 나무 아래 나무 의자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러면 그가 삶에 지칠 때 가끔 찾아와서 그 나무의자에 앉아서 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서 행복한 것도 좋지만 살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 시대의 시인들 중에서 내가 가장 배우고 싶은 시인은 나희덕 시인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나는 시의 입구에서 문턱에 걸려 넘어져 지금껏 일어서지 못하고 울고 있는데, 나희덕 시인은 처음부터 꾸준하게 자신의 시를 잘 가꾸면서 자신의 시의 영역을 조금씩 더 넓혀왔다. 이제는 우리나라 시인을 대표하는 큰 시인으로 우뚝 섰다. 그러는 동안 남모르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겠는가. 또한 꾸준하게 성장하여 유명인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시인께서 보내준 <<문명의 바깥으로>>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제3부의 <바로 보려는 자의 비애와 설움> 파트가 가장 피부에 와닿았다. <흙의 시학>이나 <문명의 파수꾼 김종철> 파트는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중요한 파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시를 쓰는 사람들 입장에서, 시와 삶의 고비고비를 어떻게 건너갈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희덕 시인은 김수영 시인의 삶과 문학에 기대면서 어두운 터널을 잘 건너온 듯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김수영이라는 등대의 불빛을 보고 고비를 잘 건너온 듯하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김수영의 연보를 보면서 자신의 삶과 시를 비교하면서 발걸음을 한 걸음씩 앞으로 전진시켰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 좋았다. 나는 많이 늦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지금부터라도 희미한 불빛을 등대 삼아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만 하겠다.
나는 어쩌면 자신이 없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나를 넘어뜨린 그 돌부리를 원망하며 너무 오래도록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3년만 발전소에서 일을 해서 수술비를 마련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3년이 30년이 넘도록 발전소에 숨어서 살았다. 발전소에 숨어서 살면서 많은 고민도 하였다. 오늘날의 문명의 발전은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오늘날 정신없이 치닫게 만든 원인이 바로 내가 만드는 전기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전기가 발명되고 컴퓨터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은 급속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 밟은 가속페달은 우리를 스스로 멈출 수 없도록 마비시키고 말았다. 전기나 문명은 자신의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은 그들의 그림자일 뿐이다. 나는 30년 넘게 전기를 만들었지만 바로 그 전기라는 놈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아마도 전기의 얼굴을 직접 보았다면 나는 어쩌면 죽었을 것이다. 전기는 만저도 죽고 함께 살아도 죽는다. 신 또한 전기를 닮았을 것이다. 어쩌면 신의 모습도 전기처럼 어떤 힘의 파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기의 그림자는 빛이며 속도이며 뜨거움이다. 전기의 그림자에서 나는 가끔 신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런 전기를 만들기 위해서 나는 땅속에 묻혀있던 나무들의 시체를 꺼내어 부관참시처럼 다시 한번 화형에 처하는 만행을 저질러야만 했다. 또한 먼 옛날에 죽어서 기름이 된 많은 동물들의 영혼을 꺼내서 다시 한번 화형에 처하는 무자비함을 중단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나는 많은 나무들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수많은 동물들의 아우성소리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리하여 나는 조금이라도 그 빚을 갚기 위하여 나무를 심고 가꾸기 시작했다. 내가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저질렀던 부관참시를 회개하며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석탄의 후손들인 식물들과 더욱 가까워졌고 흙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흙이 되셨고 나 또한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흙으로 돌아가서 식물들의 뿌리를 따뜻하게 안아줄 것이다.
나는 5무(無) 농업을 한다
무경운, 무농약, 무제초, 무비닐, 무비료
나는 흙과 한 식구라서 죽일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흙이 놀라 자빠지는 것을 보았다
쟁기가 지나가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함께 쓰러졌다
토성에서 온 나는 흙의 가슴으로 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호미 하나로 농사를 지었다
가난했지만 지금은 반월산 흙집에서 잘 산다
요즘 사람들은
호미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괭이나 쟁기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옆 밭에서 트랙터로 갈아 뭉개고 있다
놀라 자빠지는 것을 넘어 아비규환의 표정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흙의 목숨은 겨우 붙어 있다
곁에서 포클레인이 길을 만들고 있다
흙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목숨들을 몰살시킨다
검은 아스팔트의 공동묘지 위로 사람들은 달린다
흙에서 온 사람들은 흙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불 속으로 뛰어든다
나희덕 시론집
저자 나희덕
출판 창비
발행 2023.04.28.
시는 세계의 어둠을 어떻게 밝히는가
한국시단의 기둥 나희덕, 상처 입은 세상을 어루만지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완성된 생태와 문명의 시론집
대산문학상, 백석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시단의 큰 기둥으로 우뚝 선 나희덕이 시에 대한 철학과 그간의 관심사를 촘촘하게 엮어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를 펴냈다. 1989년 등단 이래 쉼 없이 추구해온 생명·생태·환경 등의 시적 주제가 유려하고도 날카로운 언어로 가득 차 있다. 나희덕은 시인으로서의 작품활동은 물론이고 깊이 있는 비평문과 마음을 보듬는 산문으로도 정평이 난바, 이번 시론집은 평론가로서 또한 에세이스트로서 활발히 활동해온 또 하나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발표한 글들을 벼리고 선별한 다음 일관된 주제와 일정한 호흡으로 치밀하게 구성해낸 덕분에, 에세이처럼 쉽고 흥미롭게 읽히면서도 저자의 문장과 주제의식이 뇌리에 또렷이 각인되는 것이 특장점이다.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창비 2003) 이후 이번 시론집을 묶어내는 데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것은 저자가 얼마나 꼼꼼하게 글들을 직조해냈는지를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하다. 이상기후와 팬데믹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독자에게 『문명의 바깥으로』는 시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저자는 끝까지 시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며, 세계의 어둠을 밝히며 시가 열어젖히는 새로운 지평에 대해 꼿꼿하게 써내려간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여전히 시 읽기가 가치 있으며 또한 즐거운 일임을 깨달을 수 있다.
이론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문장은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문명의 바깥으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1부는, 자본주의의 말기적 증상과 이로 인한 생태위기의 현실에서 시의 역할을 되짚어보는 글 모음이다. 자본세(Capitalocene)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지금’을 사는 시인들은 어떤 의식을 바탕으로 저항하고 있는지를 톺아보는 작업이 특히 인상적인데 백무산, 허수경, 김혜순의 시를 통해 이를 살펴보았다. 강성은, 이장욱, 이근화의 작품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추적해 본 것도 유의미한데 최근 발표되는 ‘반려동물 시집’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지금, 저자 스스로의 시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몸과 마음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지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제2부는 작가론들이다. 나희덕의 문학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정현종 김종철 강은교부터 신예인 조온윤 박규현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도 다양한 시인에 대한 글이 모였다. 분석에 치중하는 여느 작가론과는 달리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담담한 사념이 풍성하게 포함되어 있어 마치 각각의 작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문체가 편안함을 준다. 세상을 떠난 기형도, 박영근, 최영숙에 대한 글은 특히 독자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제3부는 백석, 윤동주, 김수영, 김종삼에 대한 글로 학술적으로도 유의미하며 한국 현대시의 밑바탕을 크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탁월한 글들로 꾸려졌다. 특히 김종삼의 「라산스카」 시편에 대한 비평문은 마치 추리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흥미진진한데, ‘라산스카’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폭넓은 문화적 지식을 동원해 추적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백낙청과 김현이 각각 엮은이로 참여한 김수영의 두 선집을 비교분석하는 글 또한 한국시 독자라면 스쳐갈 수 없는 대목인데 엮은이의 문학적 성향이 선집을 어떻게 다채롭게 꾸려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며 김수영이라는 거대한 시인을 더욱 다채롭게 조망하게 된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끌어당기는
‘나희덕’이라는 한국시의 중력
나희덕의 20년간 연구·비평·산문의 총체인 『문명의 바깥으로』는 그 시간에 값하게 풍부한 내용으로 가득 하나 난해하지 않고, 또한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저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는 저자 스스로 밝히듯, 저자가 사숙한 많은 스승에게서도 배워온 문학에 대한 진지한 태도 덕분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나희덕의 문학을 직립하게 하는 세 개의 중력으로 ‘역사적 인간을 적는 백낙청’ ‘생태적 인간을 적는 김종철’ ‘상상력의 인간을 적는 정현종’을 들며, 이들이 나희덕이라는 촉매를 통해 『문명의 바깥으로』에 조화롭게 용해되어 있다고 했다. 나희덕 스스로 “한국 현대시의 한 중력”(추천사)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번 시론집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이 덕분이다.
저자는 본인의 글이 “성냥팔이 소녀가 필사적으로 그어대던 성냥의 불꽃처럼 이 시대의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힐 수 있”(책머리에) 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시론집을 펴낸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일견 무용해 보이는 시가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무기일 수 있다는, 또한 상처 입은 세계를 치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치료약일 수 있다는 저자의 신념에 기반한다. 그 강인한 마음이 오롯하게 문장으로 모인 『문명의 바깥으로』. 이 목소리에 시를 사랑하는 독자뿐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시’라는 유효하고도 강력한 도구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은은하게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지난 몇 해 동안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이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설명해야 할지 혼란스럽고 답답한 나날을 보냈다. 마스크를 벗고 일상을 되찾아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삶의 감각과 방향성을 잃어버린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팬데믹 기간에 쓴 책 『저항할 권리』에서 “우리 앞에 놓인 첫 번째 과제는 순수하고 거의 방언에 가깝고, 다른 말로는 시적이며, 우리를 사고하게 만드는 언어를 되찾는 것”이라고 했다. 이 벌거벗은 인간과 부조리한 세계를 밝힐 수 있는 마지막 성냥은 약품과 백신이 아니라 시와 철학의 언어라는 것이다. 이 말처럼, 시적 언어란 세상에 대한 절박한 호소와 경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쓴 시와 시론이 성냥팔이 소녀가 필사적으로 그어대던 성냥의 불꽃처럼 이 시대의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힐 수 있다면, 하는 다급함이나 간절함이 있었다. 그 간절함이 실제로 읽는 이에게 얼마나 전달되고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흩어져 있던 시 읽기의 궤적을 한자리에 정리하고 보니 이 글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어렴풋하게 잡히는 듯하다. (…)
이렇게 멀거나 가까운 시의 성좌들을 바라보며 밤길을 더듬더듬 걸어왔다. 시를 쓸수록 시를 읽을수록 시에 대해 말하는 일이 조심스럽고 어려워진다. 다른 시인의 시에 대해 말한 것이 내 시의 발목을 잡는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말들을 남겼다니…… 이 패총(貝塚) 같은 글들을 떠나보내며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이 책이 또 하나의 문턱 또는 매듭이 되어 한두 걸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문명의 바깥으로, 시의 바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