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알면 알수록 더 향기로운 사람이 있다
알면 알수록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나는 언제나 사랑스런 당신이 참 좋다
준비 중인 《이어도공화국 7 -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김도수 시인의 책들이 조금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만드는 이어도공화국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기존의 고향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고향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지는 미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시와 산문이 어우러지는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 중이다.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책, 시이면서 산문인 책, 시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들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주로 나의 꿈과 나의 삶을 자유롭게 쓰는 글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이번 글을 <배진성 꿈삶글>이라고 스스로 명명하였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다양한 각도에서 자유롭게 읽고 자유롭게 상상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첫 번째 산문집《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를 먼저 읽는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 김도수 형님이 있다. 몸과 마음이 통째로 고향인 사람이 있다. 그 형님께서 자신의 책을 보내주셨다. 예전에 진뫼마을 형님댁에서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남도기행을 했던 독서회 사람들과 함께 돌려가며 읽어보라고 보내주셨다. 이것도 다 인연인 듯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첫 번째 산문집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를 먼저 읽는다. 이 책이 발행되기 전부터 나는 그의 찰지고 구수한 글들을 인터넷에서 많이 읽었다. 아마도 전라도닷컴 사장님 가슴도 나의 가슴처럼 따뜻하게 데워준 것 같았다. 전라도닷컴 사장님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김도수 형님 말씀에 의하면 참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다 인연과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것이다.
산문집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전라도닷컴)는 2004년 7월 19일 1쇄를 찍었고, 2007년 1월 1일 2쇄를 찍었다. 광주에 있는 작은 지방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 이렇게 인기를 얻은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의 고향을 향한 징글징글한 사랑의 기록이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하여 썼고 또한 이 책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서 여러 방송에도 출연하고 유명해졌기 때문에 내가 따로 쓰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쭙잖은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일 것이다.
한때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겁도 없는 꿈을 꾸고 있었다는 박남준 시인, 대학을 졸업하고 돈 한 푼 없던 박남준 시인에게, 교편을 잡고 있던 후배가 13만 원을 빌려주어, 그 돈으로 임실의 진뫼마을 빈집 한 채를 사서 일 년을 살았다는 박남준 시인, 그 인연으로 이 책의 추천글을 쓴 박남준 시인은 김도수 시인의 고향 사랑을 두고 <강가의 작은 마을을 지키는 징글징글한 사랑의 이야기가 여기 있네. 여기 불이 꺼진 마을에 다시 들어와 따뜻한 불을 밝힌 사람이 있네>라고 말한다. 김도수 시인은 1959년 생이고 박남준 시인은 1957년 생이다.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에 수록된 글과 사진들은 박남준 시인의 말처럼 징글징글한 사랑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나의 시선을 더욱 오래도록 붙잡아 두는 글과 사진들이 있다. 김도수 시인의 고향 임실의 진뫼마을과 나의 고향 곡성의 연어의 종착역은 참 많이도 닮아 있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중에서 나는 <추억의 등굣길>이 가장 좋다. 나에게 가장 많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나로 하여금 가장 많은 반성을 하도록 깨우쳐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추석 연휴 첫날,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아들에게 김도수 시인이 다녔던 초등학교 등굣길을 체험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딸 가애와 아들 민성이가 책보 둘러메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 등굣길을 체험하는 이 이야기는 나 자신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덕치초등학교로 가던 강변 등굣길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김도수 시인이 다녔던 길과 그의 딸과 아들이 손 꼭 잡고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모습이 내 눈에는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런 딸과 아들 뒤를 따라서 점심 도시락을 싸서 따라가는 김도수 시인과 그의 아내 박은자 형수님도 보인다. 그리고 농사일을 하다가 뒤늦게 운동회가 열리는 학교로 달려가는 김도수 시인의 어머니 월곡떡도 보인다. 그리고 운동장 앞쪽 모서리에 서 있는 쌍벚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는 김도수 시인과 그의 형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점심을 먹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김도수 시인과 그의 아내 박은자 형수님과 그의 딸 가애와 그의 아들 민성이가 함께 모여서 점심을 먹는 모습도 보인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리고 나는 < 75년 여름 진뫼마을 톱뉴스>에서는 나의 아버지를 보았고 <어머니 사랑비는 언제나 세울까>에서는 나의 어머니 메산이 댁을 보았고 <진달래 먹고 놀던 내 친구 현철이>에서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언젠가는 나의 아버지 이야기와 나의 어머니 이야기와 현철이처럼 살았던 나의 이야기는 새롭게 다시 쓰일 날이 있으리라. 그리고 <어서 고치집 좀 짓거라>에서는 누에 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나의 기억과 좀 달라서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내 기억에는 일 년에 한 번 누에치기를 하였다. 뽕나무가 일 년에 한 번 자리서 나는 일 년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봄과 가을 이렇게 두 번 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봄 누에와 가을누에가 있다고 나온다. 우리 집에서도 누에치기를 많이 하였는데 어머니께서 약 한 달가량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밭에 있는 뽕이 부족해서 산에 들어가 꾸지뽕을 따다가 먹인 기억이 선명하다.
처음에 내가 김도수 시인의 산문들을 인터넷에서 읽었을 때에는, 내가 이미 그 10여 년 전에 발표한 <우리들의 고향> 연작시들을 산문으로 풀어놓았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나의 시들보다 훨씬 더 좋은 산문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편 한 편의 산문들이 모두가 훌륭한 시이며 아름다운 소설이며 완벽한 희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김도수 시인이 풀어놓은 입말들이 참 구성지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김도수 시인의 삶은 그의 글들보다 더욱 진솔하고 정이 많아서 좋다. 김도수 시인이 여는 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그는 늘 말과 글과 행동이 같은 사람이다.
"말과 글과 행동이 일치되도록 사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말과 글과 행동이 따로따로 논다면 독자들을 기만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거짓 없이 진솔하게 쓰려했고, 또 내가 쓴 글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내가 쓰고 있는 <꿈삶글> 연작의 정신이며 계승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한 때 김도수 시인을 비롯하여 김인호 시인과 박남준 시인과 이원규 시인이 함께 사는 지리산 가까운 곳으로 가서 살려고 하였다. 내 고향 곡성으로 돌아가 살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고향에 있는 반월산을 사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가까운 여수에도 좋은 시인들이 많이 있어서 꼭 가까이 가서 함께 살고 싶었다. 고향집이 너무 좁아서 곁에 있는 집터도 더 사려고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있었다. 폐가로 남아있던 고향집도 다시 청소를 하고 수리를 하려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너무나 좀스럽고 편협하고 비뚤어진 마음이 그 길을 스스로 막아버리고 말았다. 지금 다시 찬찬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때는 너무나 속이 많이 상해서 나의 계획을 스스로 접어버리고 말았다.
고향에는 그 당시 두 명의 친구가 결혼도 않고 총각으로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참 많이 미안해서 내가 점심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연락을 하고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명의 친구들이 올 줄 알았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왔다. 친구들과 같이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선배 들와 후배들이라고 말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예상을 못해서 잠시 당황은 했지만 그래도 오히려 더 좋았다. 앞으로 얼굴 보고 지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친해질 수 있어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점식 식사를 함께 했고 즐거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고향집으로 돌아와 집을 대강 치우고 공향집에서 잠을 자려고 했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고향집에서 일찍 자려고 하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와서 생각도 많아지고 불편해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친구에게 전화를 하였다. 점심때 함께 밥을 먹었던 사람들이 나만 빼고 다 함께 술을 먹고 있다고 하였다. 오랜만에 찾아간 집이어서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간단한 부탁을 하였는데 거절을 당했다. 뭐, 그동안 연락도 하지 않다가 불쑥 찾아가서 부탁을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니, 끊으려고 하였다. 친구는 내가 먼저 전화를 끊은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친구는 아마도 전화기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 술상에 전화기를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친구의 전화기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 술집 풍경을 생중계하기 시작했다. 점심때, 나를 일부러 바가지를 씌워 골탕 먹이려고 많은 사람들을 불러왔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이었던 나의 어머니 이야기와 나의 아버지 이야기들까지 1시간이 넘도록 나와 나의 가족들은 그들의 술안주가 되고 있었다. 나는 차마 중간에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의 귀향의 꿈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나의 깊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옹졸했던 나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였고 너무나 큰 절망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친구들 곁으로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하면, 술을 먹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는 충분히 좋은 술안주가 되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마도 그날이 그랬을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는 그날 가장 적당한 술안주였을 것이기에 지금은 나도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김도수 시인이 태어났다는 작은 방, 월곡산방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그리고 김도수 시인이랑 김인호 시인과 함께 요강바위에 직접 들어가 보고 그 주위에서 목욕을 함께 한 추억이 있다. 또한 징검다리 건너 밭에서 먹감을 함께 딴 추억이 있다. 또한 제주도에서 독서회 회원들과 함께 남도 기행을 갔을 때 김도수 시인께서 직접 운전을 해주시고 진뫼마을 고향집에서 따뜻한 밥을 얻어먹은 추억이 있다. 김도수 시인과 박은자 형수님께서 제주도에 오셨을 때 함께 재미있게 지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또 여수에서 열렸던 전국문학인대회에서 다시 만났던 기억도 있다. 김도수 시인은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좋아지는 시인이다.
『섬진강 진뫼밭에 사랑비』 에서 나는 <어머니의 비자금 만들기>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용수네 어매, 존말로 헐 때 나와>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중에 내게 고백한 이야기지만 그날 저녁 어머니는 강물에 뛰어들어 죽어버리려 했단다. '아이고, 당신도 어린 자식들 데리고 영금 한번 보며 남은 인생 살아 보시오' 하는 심정이었단다." 김도수 시인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는 너무나 많이 닮으셨다. 그리고 김도수 시인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 또한 너무나 많이 닮으셨다. 그런데 나는 김도수 시인이 너무나 부러웠다. 김도수 시인은 그래도 논이 열 마지기나 되는 부자였고 이장일을 오래도록 할 만큼 건강한 아버지가 계셨다. 투망질을 잘하시는 것은 나의 아버지도 같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늘 구들장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던 환자이셨기 때문이다. 김도수 시인 집에는 머슴도 있는 부자였지만 우리 집은 시골에 살면서도 땅 한 평 없는 지지리도 가난했던,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했던 집이었기 때문에 나는 늘 논이 있는 친구들이 가장 부러웠다. 우리 집은 언제나 김도수 시인의 글에 나오는 외딴집 현철이 이거나, 남의 집 아래채에 살다가 3학년인가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그 여자친구 집에 가까웠었다. <하필 보리쌀 갈 때 너그 선생님이 와서...>에 나오는 정수형님네 뒷집에 살았다는 그 여자친구가 자꾸만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아는 시인들 중에
가슴이 가장 따뜻한 시인은
진뫼마을이 고향인 김도수 시인이고
내가 아는 시인들 중에
삶이 가장 아름다운 시인은
노고단처럼 살아가는 김인호 시인이다
설날을 맞이하여
설날 특집 나의 살던 고향을
유튜브로 보면서
김도수 시인께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우는 장면에서
나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함께 울었다
나는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김도수 시인과 김인호 시인의 삶을 생각하며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따르려고 노력한다
세상에는 아직도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인들이 많다
설 특집 다큐멘터리 - 나의 살던 고향은 ■ 스무 가구 남짓한 작은 마을의 전라북도 임실군 진뫼마을. 이 마을 태생의 사람들이 고향을 잊지 못해 자신이 나고 자란 집으로 돌아왔다. 이들에게 고향의 의미란 무엇이고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말하는 고향 진뫼마을의 이야기를 담았다.
김도수 명예이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섬진강 문학기행 2박 3일 코스
진뫼마을에서 하동포구까지 섬진강 강줄기를 따라가는
1. 일정표
■ 첫째 날(10/16, 토요일)
▷ 제주 출발(08:40분) → 광주공항 도착(09:25) →광주공항 출발(09:40) →진뫼마을 도착(11:20)
■ 둘째 날(10/17, 일요일)
▷ 진뫼마을 출발(09:00) → 천담, 구담마을(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 장구목(요강바위) → 남원 대강 → 곡성읍 → 구례구역 → 구례 운조루 → 하동 화개장터(쌍계사, 점심식사) → 악양 평사리(박경리 소설 ‘토지’ 무대) → 광양 청매실 농원 → 순천만 갈대숲(김승옥 소설 ‘무진기행’ 무대) →저녁 식사 및 숙소 이동
■ 셋째 날(10/18, 월요일)
▷ 벌교(소설 ‘태백산맥’ 무대) →낙안읍성 → 선암사(소설가 조정래 씨 태어난 절 :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촬영지 → 화순 → 광주호 소쇄원 → 식영정 → 광주 공항(18:100 → 제주도 귀가
2. 답사 세부내용
○ 진뫼마을(1박)
-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 저자와의 대화
고향, 당신에게는 무엇입니까?
○ 섬진강을 따라 걷는 오지 길(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
-천담, 구담마을(정자나무에서 바라본 가을 섬진강), 장구목(요강바위)
○ 화개장터(점심식사)
-쌍계사
○ 토지 문학관(박경리 소설 ‘토지’ 무대)
-하동 악양 평사리
○ 광양 청매실 농원(홍쌍리, 신 지식인 전남 1호)
○ 순천만 갈대숲(순천 2박)
○ 선암사, 벌교 ‘태백산맥’ 무대
○광주 소쇄원, 식영정(제주도 귀가)
※ 여행지 답사는 가능한 준수 하되 사정에 따라 조정될 수 있음
3. 참조사항(여행지 입장료)
-운조루 : 2000/인
_쌍계사 : 3500/인(주차료 별도)
-낙안읍성 :1500/인(주차료 별도)
-선암사 :1500/인(주차료 별도)
* 답사 여행지 자료 준비(인터넷)
1. 구례 운조루
2. 화개장터, 쌍계사
3. 악양 평사리(토지 문학관)
4. 청매실 농원(홍쌍리)
5 순천만 갈대숲
6. 벌교 태백산맥
7. 낙안읍성
8. 선암사
9. 소쇄원
10. 식영정
11. 섬진강(김용택)
12. 김도수
http://www.jeonlado.com/v2/ch01.html?&number=2870
http://www.jeonlado.com/v2/ch03.html?number=7129
13. 요강바위와 구담마을
http://www.jeonlado.com/v2/ch02.html?&number=1453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no=26849&rel_no=13
*광주 공항에서 진뫼마을 오는 길
1안) 광주공항→ 광주 시내 경유 → 남해고속도로(서광주, 동광주 IC) → 88 고속도로(담양, 대구 방향) → 순창 IC(광주에서 약 40~50분 소요) → 임실, 전주방향 진입→ 순창읍에서 약 15분 정도 달리면 ‘회문산 자연 휴양림’ 간판 나옴 → 휴양림 사거리에서 우회전(진뫼마을 표석 있음) → 5분 달리면 진뫼마을
2안) 광주공항 → 남해고속도로(서광주나 동광주 IC에서 진입) → 순천 방향 → 옥과 IC →순창 → 임실, 전주방향 진입→ 순창읍에서 약 15분 정도 달리면 ‘회문산 자연 휴양림’ 간판 나옴 → 휴양림 사거리에서 우회전(진뫼마을 표석 있음) → 5분 달리면 진뫼마을
※ 두 방향 모두 거리는 비슷함. 혹 국도를 타도 되는데 광주-담양-순창-이하 동일.
섬진강 문학기행(10/16 ~ 10/18)
동그라미 / 04.11.06 15:54
일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에 이번 여행에 적극 참여키로 했다. 2박 3일 동안 집을 떠나는 여행에 시원찮게 대답해 주는 남편을 뒤로하고, 제주에서 비행기를 탔다.
광주공항에 도착해 보니 김도수 선생님이 사모님과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진뫼 마을로 향했다. 진뫼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서부터는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라는 책에서 보았던 벼락바위, 정자나무, 까마귀바위, 징검다리, 허락바위 등을 상상하며 찾아봤다.
김 선생님의 별장에 도착해 보니 그야말로 농촌풍경이다. 사람이 살지 않음으로 해서 쌓인 먼지를 닦아 내고, 점심준비로 북적대다가 앞산을 바라보니 내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산비탈을 오르고 있는 감나무들. 가을산의 감빛은 내 눈을 유혹한다.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바쁘게 점심 준비하던 손을 놓고 따라나선다. 개울 건너 도착해 보니 손에 잡힐 듯하던 감은 나무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나 보란 듯이 내려보고 있다. 같이 간 일행들과 합작해서 감나무를 흔들어 대니 서 너 개의 감이 떨어진다. 얼른 주워 한 입 깨물어 보니 많이 떫다. 떫은 감은 입에서 단맛도 많이 났다. 떫으면 어쩌랴! 하고 먹었는데 이게 내 목을 통과하지 않으려 한다. 목이 꽉 메어서 숨을 못 쉴 정도였다. 그때 나무를 흔들던 일행이 홍시도 있다면서 땅에 떨어져 박살 난 감을 내민다. 목이 메어 있던 참이라 얼른 홍시를 받아먹고 메여 있던 목을 쓸어내렸다. 그 자리에서 뱉어 버리지 않고 그걸 미련스럽게 삼키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길 내내 체한 듯이 속이 더부룩했다. 제주에서는 가위를 사용해서 귤을 따는데 감을 따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온몸을 바쳐 딴 감은 열 개 정도는 됐다. 집에서 부지런히 식사준비 하는 이들을 위해서 누구의 감 밭 인지도 모르고 서리해 왔는데 김 선생님과 배 선생님은 그 감은 떫어서 못 먹는단다. 곶감은 만들어서 먹든가 아니면 가만히 두었다가 홍시가 돼서 먹으면 겁나게 맛 난단다.
점심 먹고,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장소였던 곳으로 갔다. 섬진강 굽이 길을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장관이었다.
다음은 장군목으로 옮긴다 여기는 특이한 게 요강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서울까지 갔었다가 임자를 만나지 못하고 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30톤이나 되는 이 바위를 서울까지 옮긴 것이 놀랄 만한 일이다. 여자의 성기를 닮았다고도 하고, 어머니의 자궁을 닮았다고도 하는데, 둥그렇게 우물같이 파여 있는 바위였다. 우리가 갔을 때는 가물어서 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그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아이가 없는 이들에게 신기하게도 아이가 생긴다는 전설이 담겨 있는 바위란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일행은 한 번씩 들어갔다 나왔다. 내 차례가 되어서 그 바위 안으로 들어가니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근데 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밖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나오지 못할 것 같다. 혼자 와서는 절대 들어가지 말아야 될 곳인 것 같다.
구미마을 구미리의 남원 양 씨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흙집에 창호지로 문을 바르고 살려면 구경하는 우리들은 눈요기이지만 생활하는 이들은 어떨까? 옛날집 그대로 보존하며 살고 있는 이들은 조상을 잘 섬기는 것 같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열매들이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은행나무들이 참 인상적이었다.
숙소인 김 선생님의 별장으로 돌아와 보니 해가 조금 남아있다. 감 밭으로 가서 감 따기 체험을 원했다. 비탈진 곳이어서 감을 따러 올라가는데 등산을 하는 기분이다. 감을 따는 건 엄두도 못 내고 김 선생님이 감나무를 베어 줬다. 중간중간에 가지치기를 하듯 감나무를 베어 주면 그 가지에 매달린 감을 따냈다. 근데 그 감을 따려면 그곳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그것도 힘들었다. 감을 따서 모아두려고 조금만 움직여도 감이 데굴데굴 하고 밑으로 굴러 내린다. 그 경사진 곳을 김 선생님이나 배 선생님은 잘 걸어 다니셨다. 감을 따면서 홍시감도 몇 개 만났다. 서로 돌아가며 두 개씩은 먹은 것 같다. 감 밭에 직접 가서 따 먹는 감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집으로 와서 저녁을 지어먹고, 김 선생님의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준비해 온 이들의 발표가 있고 문학에 대해 논했다.
이 별장에는 두 가지 불편한 게 있었다. 하나는 휴대폰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인지 휴대폰이 안테나가 잡히지 않는다. 겨우겨우 문자 메시지만 집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고 휴대폰을 아예 꺼 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는 화장실이다. 불편하면 리 사무소에 있는 화장실을 쓰라고 해서 그곳을 사용했다. 그곳도 재래식인 건 마찬가지였다.
한밤중에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리 사무소 있는데 까지 가기가 싫어서 별장에 있는 화장실로 가 봤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창고였다. 평평한 곳에 두 발을 얹을 수 있는 돌판 두 개 놓고 볼일을 본다. 그런 다음 쌀겨와 대변본 것을 버무린 다음 두엄 위로 올린다. 김 선생님이 올 때 한 말이 생각났다. 시원하게 골프연습도 하게 된다고 했다. 이것들은 농사 지을 때 거름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곳은 화장실 보다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대변 찌꺼기들이 가득 쌓여 있는데도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게 신기하다. 두 번째 화장실을 갈 때는 볼일을 보면서 화장실 안을 살펴보니 창고 같은 분위기다. 갈쿠리, 망태등 농사지을 때 사용하는 연장들이 걸려 있다.
다음날 아침을 지어먹고 10시쯤 집을 출발했다. 주말농장식으로 된 이 집을 떠나기 위해서 어제 준비해 온 반찬들이랑 밥솥들을 모두 정리했다. 고추장이며, 채소들까지 모두 챙기고 다닌다고 해서 떠날 준비를 마친다.
심청 축제하는 곳을 지나 곡성군 미니기차를 구경하러 갔다. 마침 기차가 출발할 시간에 도착한 우리는 기차를 타고 섬진강 줄기 따라 청소년 수련관까지 갔다. 그 사이 김 선생님은 렌터카를 타고 기차를 따라왔는데 시속 20KM를 달리는 기차를 따라오며 쉬엄쉬엄 차를 세워서 손을 흔들어 주는데 황홀한 기분이었다.
섬진강의 내력을 미니기차에서 설명해 줬다. 두꺼비 섬에 나루터 진 이란다. 두꺼비가 나루터에서 헤엄을 친다. 은혜 갚은 두꺼비이야기. 도깨비이야기. 소년 마천봉 이야기.
소년 마천봉이 고기를 많이 잡고 싶어서 어살을 놓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 이 궁리 저 궁리하며 돌아다니던 중 눈에 띄는 돌을 발견하고는 그 돌을 집에 가지고 왔다. 그날 밤 도깨비들이 찾아와서 '그 돌은 우리 대장님이니 제발 돌려주세요'라고 부탁한다. 그때 마천봉은 조건을 건다. 어살을 놓아서 고기를 잡고 싶은데 도와 달라고 하니 기꺼이 도깨비들이 도와줘서 고기들이 잘 잡혔다는 전설이다.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를 둘러보았는데 그날은 장이 서는 날이 아니어서 장 구경은 하지 못하고 점심때가 되어서 식당에 들러서 옛날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참게탕을 먹었다.
평사리의 최 참판 댁도 들렀다. 아흔아홉 간이나 되는 이 집은 그야말로 대궐 같은 집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최 참판 댁의 전답이었다는데, 땅도 넓었지만 집도 그 못지않게 넓고 멋있었다. 그날은 촬영이 없는 날이어서 주위를 둘러보고 오는 걸로 만족했다.
호남의 명산 조계산에 자리 잡은 한국적인 절의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한 천년의 고찰인 선암사로 향했다. 승선교를 지나 보고 삼인교를 지나 책에서만 본 해우소를 찾았다. 스님들이어서 감출 것이 없는가? 툭 트여 있는 뒷간을 보니 내가 민망했다. 볼일을 보는데 사람이 드나드는 걸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 해우소 앞의 소나무도 찾았다. 그리고 이곳은 태고종 본사라고 한다.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에 위치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에 도착했다.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 바퀴 돌아왔다.
빡빡한 일정에서도 순천만을 꼭 보여 주고 싶다면서 도착해 보니 너무 시간이 늦었다. 어두워서 차의 헤드라이트로 순천만의 갈대숲을 비춰 보았다. 넓은 순천만을 상상해 보며 갈대의 속삭임도 들어보았다.
이틀간 좋은 곳을 안내해 주던 김 선생님은 월요일에 출근을 해야 하니까 순천에서 작별을 고했다.
삼일째
아홉 시에 만나기로 한 렌터카 기사와의 약속이 있어서 부지런히 아침을 챙겨 먹었다. 정확하게 시간을 맞춘 기사와 인사를 하고 전날, 김 선생님께서 그토록 보여 주고 싶어 하던 순천만을 먼저 가 보자고 했다. 밤에는 바로 코앞만 보이던 갈대밭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이어져 있다. 가운데로는 배를 타고 볼 수 있도록 호수로 이어져 있었다. 배를 타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는 사정으로 아쉬움을 뒤로했다.
운주사로 향한다. 순천에서 운주사 까지 거리는 2시간. 2시간 동안 차에서 달리는 거리의 풍경을 보는 것도 새삼스럽다. 마당바위를 받치고서 있는 불상들은 이 절이 천불천탑으로 유명하다는 말을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만큼 각양각색의 불상들이 보인다. 불상들은 세월의 흐름을 보여 주는 것 같이 비바람에 깎이고 패인 곳들이 많다. 하룻밤 하루사이에 완성인지 미완성인지 모를 와불. 그 와불을 모시고 있는 듯한 형상의 머슴부처. 밑으로 내려오다 보면 북두칠성보양의 바위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일행 중 한 명을 찾지 못해서 애 먹었었다. 휴대폰도 안되고,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보니까 차에 돌아와 있었다. 일단은 안심이 되면서 다음 행선지로 옮긴다.
성산별곡의 터전인 식영정. 개인소유의 정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규모의 소쇄원. 이 두 정원의 중간에 위치한 가사문학관을 둘러보았다. 학교 다닐 때도 읽지 못해서 버벅거리던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사미인곡, 이 외에도 허난설헌의 규원가, 면앙정가, 관서별곡등 이름 모를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어깨너머로라도 조금 배운 게 있었다고 서각으로 돼 있는 그림과 글들도 있어서 다시 한번 더 되돌아보게 했다.
5.18 묘지를 들렸다. 어린아이들의 영정들과 10대. 20대들의 영정들을 보는 순간 목이 메었다. 그네들이 무엇 때문에 영정이 되어서 우리를 눈물 나게 만드는가 하고 아쉬워해 본다.
산방독서회에서 이번 문학기행을 계획하느라고 노심초사 열과 정성을 아끼지 않으신 회장님과 총무님, 배 선생님, 도서관 관계자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은 있어도 선뜻 나서지 못하던 나에게 좋은 사람들과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영광을 줘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