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과 함께 도서관에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포스터 두 장이 나란히 붙어 있다.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승만, 제주의 독립운동가 김진현, 두 분이 우리를 맞이한다. 마음이 무겁다. 그림자는 더욱 무겁다. 그림자가 벽을 짚고 겨우 일어선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이 나를 부른다. 솔직하게 말하면 제주의 독립운동가 김진현 선생님은 잘 모르는 분이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항일을 외치다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항일 격문과 태극기 100여 장을 제작했고 전교 학생 3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 구속학생 석방, 식민지 교육 철폐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안법'이 문제다.
2024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제주도 사람들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때 너무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한 말들 중에 유명한 말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일 것이다. 어쩌면 그는 말과 행동이 달랐던 사람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는 어쩌면 남한과 북한을 하나로 묶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남한과 북한을 흩어지게 한 장본인이 아닐까?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하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아닐까? 이승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75년(고종 12)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유학과 정치활동을 했다. 광복 후 38선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1948년 실시된 총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에서 제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취임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발췌개헌안’, ‘사사오입 개헌’ 안을 통과시켜 재선·3선에 성공했다. 4선 도전에서도 무투표로 당선됐으나 4·19 혁명이 발발하자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다. 그리하여 가장 무서운 것이 독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답게 사는 것일까? 이승만 박사의 삶과 윤동주 시인의 삶을 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정치와 종교와 열정과 욕망과 탐욕에 대하여도 생각하게 된다. 특히 남한의 정치와 북한의 정치에 대하여 생각한다. 일당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하여도 생각한다. 어쩌면 정권은 최소한 10년에 한 번씩은 바뀌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야 정치권력이 국민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존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정권이 국민을 무서워해야지 국민이 정권을 무서워하는 정치는 좋은 정치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목표는 우리들 모두의 인간들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늘 깨어있어야만 할 것이다. 쟁기로 밭을 갈듯이 정권을 적당한 시기마다 갈아엎어주어야만 한다.
1.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2. 윤동주 시인과 함께 하는 순례
3. 윤동주와 함께 하는 순례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 함께 길을 찾는다
이어도에서 나는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어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있었고 예수님도 있었다. 윤동주 시인도 있었고 바다에서 죽은 제주도 사람들도 있었다.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최대의 학살터였다. 75년 만인 2023년 5월에 비로소 작은 4.3 희생자 위령공원이 마련되었다. 내가 일전에 서복선생과 함께 다녀왔던 서복 전시관 곁에 위령공간을 마련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영혼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도 함께 가겠다고 길을 나선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 뿐만 아니라 모든 죽은 것들까지 사랑하는 나와 윤동주 시인이 함께 길을 나선다. 이번 기회에 정방폭포도 둘러보고 제주도의 여러 곳들을 둘러보기로 한다. 주로 죽음의 장소들을 위주로 둘러보기로 한다. 정방폭포와 소남머리, 무등이왓과 큰넓궤, 곤을동, 북촌리, 다랑쉬굴, 터진목, 표선해변, 섯알오름, 주정공장, 이덕구산전, 관덕정..., 여수와 광주와 대전의 골령골 학살터까지 둘러보려고 한다. 정방폭포에서 백두산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고향 북간도까지 긴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이어도공화국은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아름다운 나라다. 이어도공화국에는 자신들을 스스로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 하늘은 바다의 거울이고 바다는 하늘의 거울이다.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백미러이고 죽은 사람들은 산 사람들의 백미러다. 우리들은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깊은 거울이다. 시간 속에는 언제나 빛나는 백미러가 있다.
앞으로 잘 가기 위해서는
가끔 뒤를 보아야만 한다
백미러 속에 하늘이 있고
산이 있고 길이 있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이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은 비로소
앞으로 잘 갈 수 있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윤동주 시인은 모를 거라 생각했다. 일찍 죽은 윤동주 시인은 모를 거라 생각했다. 원자폭탄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삼팔선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제주사삼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여순항쟁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빨갱이라는 말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손가락총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육이오를 모를 거라 생각했다. 휴전선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사일구를 모를 거라 생각했다. 오일륙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오일팔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윤동주 시인은 모를 거라 생각했다. 컴퓨터를 모를 거라 생각했다. 휴대폰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인터넷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은 다 알고 있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다 알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은 죽어서도 시를 쓴다고 하였다. 다만 산 사람들이 읽을 수 없는 시를 쓴다고 하였다. 아, 사람들은 죽어서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역사를 다 알고 있구나.
안소영 장편소설 <시인/동주>는 1938년 3월 23일 경성역에 도착한 경원선 열차에서 송몽규와 윤동주가 내리고, 북간도 용정의 고향 선배인 라사행이 마중 나온 모습으로 시작된다. 스물두 살 동갑내기 사촌인 윤동주와 송몽규의 연희전문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신촌 연희전문학교 교정의 회갈색 석조 건물과 그 앞의 언더우드 동산과 돌계단, 백양나무 오솔길을 걷는 송몽규와 윤동주가 보인다. 최현배 교수님의 <우리말본> 강의하는 모습도 보인다. 송몽규와 윤동주와 강처중이 기숙사에서 정답게 대화하는 모습도 보인다.
연희전문학교를 생각하면 나희덕 시인 생각이 난다. 나희덕 시인은 연세대학을 나온 시인들 중에서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시인이다. 나희덕 시인은 윤동주 시인보다도 훨씬 좋은 시를 많이 쓴 시인이다. 인격 또한 윤동주 시인을 능가할 정도로 훌륭하다. 어쩌면 그의 스승이신 정현종 시인에게서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서울예술대학에서도 잠시 계셨다는데 나는 직접 배우지는 못했다. 인자하고 따뜻한 정현종 선생님 덕분에 우리나라에는 좋은 시인들이 더욱 많아졌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순례를 떠나기 전에 잠시 메모를 남긴다. 윤동주 시인과 나희덕 시인처럼 나도 좋은 시를 쓰기 위하여 먼저 메모를 남긴다. 이 메모들이 잘 발효되어 좋은 시를 낳을 수 있도록 시의 씨앗을 땅에 묻는다. 아름답고 의미 있는 시의 새로 부화할 수 있도록 시의 알을 낳는다.
이어도에서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까지
1. 이어주는 섬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2. 이어도를 아시나요
서귀포시 해(海) 1번지
이어도를 아시나요
서귀포시 태평양로 1
이어도 섬을 당신은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이어도를 아시나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섬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섬
하늘과 바다를 이어주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
태평양으로 날아가는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제주도 사람들이 오래도록 꿈꾸어 오던 섬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뿌리 깊은 섬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의 꿈을 아시나요
3. 노인성이 유숙하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서귀포혁신도시에서 중문관광단지까지
이어도 길을 걷다가 태평양으로 간다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을 만나러 간다
남극노인성이 유숙하는 이어도로 간다
바다에서 해(海)를 본다 물이 아프다
인간들의 욕망이 낳은 쓰레기들의 섬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 욕망들의 얼굴,
바다 해(海) 글자를 더 자세히 본다
어머니가 보인다 어머니가 아프다
아픈 어머니에게 방사능 오염수까지 먹인다
태평양의 수평선이 트로이목마를 끌고 온다
북극곰의 신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바다와 하늘이 함께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막내아들이
뜨거운 어머니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다
유숙하던 노인성도 곁에서 돕는다
서천꽃밭 꽃감관도 불사화를 가져온다
용궁으로 가는 올레에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노랫소리 들려온다 하늘에는 서천꽃밭이 있고 땅에는 마고성이 있고 바다에는 이어도가 있다
어머니를 살리려고 노인성과 꽃감관도 떠나지 못한다
4.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한 송이 있다
전설이 낳아 기른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가 있다
제주도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태평양의 배꼽을 찾았다 태반과 탯줄을 잃은 배꼽을 이어도라 불렀다 이어도는 제주도 사람들의 고향이었다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호'가 배꼽을 보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소코트라록(Socotra Rock)'이라 불렀다 하지만 오래도록 이어도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배꼽을 보고 싶었으나 배꼽을 볼 수 없었다 배꼽에 관한 소문만 무성했다
1984년에 비로소 태평양의 배꼽을 볼 수 있었다 KBS와 제주대학교 해양대학이 파랑도 탐사에 성공했다 한국해양소년단 제주연맹의 파랑도 탐사도 성공했다 파랑도는 그렇게 이어도와 만났다 꿈이 현실로 드러났다 1986년에 암초 수심이 4.6m로 측량되었다 이어도 최초의 구조물 ‘이어도 등부표’를 1987년에 설치했다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1995년 해저 지형을 파악하고 조류를 관측하는 등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2001년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 착공에 들어갔다 2003년 6월에 완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벌써 스무 살 성인이 되었다
해양, 기상, 환경 관측 체계를 갖추고 해양 및 기상, 파고, 수온 등 해상 상태와 어장 정보, 지구 환경 및 해상 교통안전, 연안 재해 방지와 기후 변화 예측에 필요한 자료를 실시간으로 수집, 무궁화 위성을 이용, 관측 정보를 제공하며, 국립해양조사원에서 데이터 검증을 거쳐 기상청을 비롯하여 관련 기관에 실시간으로 자료를 제공한다
해저 지반에 박은 60m의 기초를 제외하고도 수중 40m, 수상 36m, 총중량 3,400t의 구조물이다 400평 규모의 2층 Jacket형 구조물엔 관측실, 실험실, 회의실이 있고 기지의 최상부에 가로 21m, 세로 26m에 이르는 헬기 이·착륙장 외에, 등대시설, 선박 계류시설, 통신 및 관측시설 등과 8인이 15일간 임시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마라도에서 149Km 가장 먼 해상에 설치된 해양과학기지는 평화의 연꽃으로 피어났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끝없는 도전의 상징이 되었다 제주도 생성시기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60만 평의 이어도 소코트라 암초, 그 위에 세워진 76m 높이의 철탑 위에 400평의 섬을 만들었다 사랑의 연꽃을 피웠다 3,400톤의 쇳물로 평화의 심장을 만들었다 태평양의 배꼽에서는 이제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린다 잃어버린 탯줄과 태반을 드디어 다시 찾았다
5.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이어도는 태평양에 있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는
북위 32° 07′ 22.63″ 동경 125° 10′ 56.81″에 있다
이어도는 한․중․일 3국 중 한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의 유인도 마라도(馬羅島)에서 남서쪽으로 80해리(149km)
일본의 도리시마(鳥島)에서 149해리(276㎞)
중국의 서산다오(余山島)에서는 155해리(287㎞) 떨어져 있다
한국과 중국 사이의 바다의 거리는 236해리(436㎞)에 불과하다 배타적 경제수역(EEZ) 200해리(370.5㎞)의 두 배인 400해리(741㎞)가 되지 않을 경우 양국은 협상을 통해 해양경계를 획정해야만 한다 일반적인 획정 원칙인 ‘중간선 원칙’을 적용하면 당연히 한국의 관할 영역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자꾸만 자기들 바다라고 우긴다
이럴 때는 시인들이 먼저 나서야만 한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시인들이 손을 잡고
이어도에서 평화의 연꽃을 피워야만 한다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섬이 되어야 한다
이어도문학회와 이어도연구회가 손을 잡고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이 되어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 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 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 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씌어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과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 윤동주(尹東柱) 탄생 백주년을 넘기면서 많은 자료들과 영화 등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