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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과 함께 65

―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by 강산





윤동주 시인과 함께 65

―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술도가집 아들 정하섭이 무당 소화를 찾아왔다

빨갱이가 된 대학생이 제각의 흰꽃을 찾아왔다


부잣집 아들이 왜, 어찌하여 빨갱이가 되었을까

대학교수 조국은 어찌하여 강남좌파가 되었을까


오늘은 국제 강아지의 날이라고 한다

집을 지키던 개들은 이제 집주인이 되었다


개들과 사람들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서로를 향해 짖어대고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한다


광견병 걸린 개 한 마리가 날뛰고 다니면서

우리나라 역사 백 년 뒤로 뒷걸음치고 있다


그럼에도 어느 운석 밑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럼에도 어느 거울 속으로 걸어가는 당신이 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의 모든 것은 나다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너의 모든 것은 나다


나의 모든 것은 너다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나의 모든 것은 너다


너와 나 사이, 꽃이다




1. 강혜숙



멀리서 응원 보내주어서 참 고맙다

너와 어머니 얼굴 보니 참 좋구나

너로 인하여 이탈리아가 좋아졌다

피사의 사탑보다 밀라노 대성당보다

너의 따뜻함과 미소가 더 좋아졌다

어떤 인연 따라서 그곳까지 갔는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너 때문에

이탈리아 밀라노가 온통 환해졌다


내가 눈을 뜰 시간에 너는 눈을 감고

내가 아침 산책을 나가는 시간에

너는 꿈길로 들어가 그리운 고향일까

너의 미소 생각하니 산책이 꿈이구나


너의 아버지는 늘 우리 집 단골이셨고

술친구셨던 아버지 유택도 이웃이셨지


(각단들 지나 심산 띠야굴밭에 묻혔다가

어머니와 반월산 댓등밭으로 함께 이장)


우리 다음 생에도 좋은 이웃으로 만나자




조정래 작가와 함께 7

― 태백산맥 1-1. 일출 없는 새벽


7

정하섭은 문고리를 걸어잠갔다. 소화는 흠칫 놀라 저고리섶을 여미며 조금 물러앉았다. 순간에 이루어진 그녀의 반사적인 몸짓에서 정하섭은 여지껏 의식하지 못했던 여자의 냄새를 강하게 맡았다. 그리고 한줄기 빛처럼 그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그가 첫 수음을 했던 중학 삼학년 때, 죄의식과 부끄러움과 전신 마디마디가 시리도록 저릿거리며 퍼지는 어지러운 자극의 쾌감에 신음하며 보았던 두 여자. 하나는 책방집 딸 정님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소화였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닌 책을 사들고 나오곤 했던 것은 누구 때문이었던가. 그 정님이가 떠오른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소화의 얼굴이 그 위에 겹쳐진 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다. 남자답지 못하게 아버지가 굿을 즐겨서 소화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였다. 그 예쁜 아이가 무당의 딸이라는 걸 어린 마음으로도 무척 안쓰러워했던 것이다. 그녀가 대물림굿 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던 것도 그 마음의 변모였다. 그러나 기차에서 그녀를 만나게 된 다음부터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고, 정님이와의 관계가 시작되어 그녀는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그런데 연정을 느끼고 있는 여자의 환상 위에 소화의 모습은 느닷없이 겹쳐진 것이었다. 그 뒤로도 얼마 동안 그 부끄러운 짓을 할 때마다 정님이의 얼굴과 소화의 얼굴이 엇갈렸다. 무당의 딸이다. 무당의 딸이다. 그는 소화의 얼굴을 떨쳐내려고 안간힘하며 스스로에게 일깨웠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소화는 의식 속에서 다시 물러갔고, 그 기억은 오랜 시간의 누적 속에 잊혀져버렸다. 그런데 숙성한 여자의 냄새를 의식하는 순간 그 기억은 의식의 저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한 줄기 빛으로 뻗어올라와 확 불을 켠 것이다.

그는 거칠게 꿈틀거리는 감정을 억제하느라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자신은 목숨과 바꿔야 될는지 모를 위기상황에 처해 있음을 스스로에게 일깨우며 피를 역류시키고 있는 격정의 정수리에 냉수를 끼얹었다.

소화는 남자의 충동적 감정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괴로운 인내를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며 마음의 옷을 하나씩하나씩 벗어던지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격정이 끝내 봇물로 터지고 말 것 같은 예감에 지배당하고 있었고, 결국 그의 남성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신내림의 전율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의식 속에는 오래고 먼 기억이 한 장의 선명한 사진으로 떠올라왔다. 그가 소학교 사학년 때이던가 그랬다. 그의 할아버지 사십구제 굿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다른 집 사십구제와는 달리 미친 듯이 굿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만이 아니라 임종을 앞두고 차렸던 굿에서는 어찌나 무서운 기세로 춤을 추었던지, 굿을 끝내고 어머니는 며칠을 앓아누웠다. "엄니, 그렇게 미친 거맹키로 굿허고 요리 아파불먼 무신 소양이 있당가. 돈도 더 많이 받지도 못험스로." 그녀는 어머니 이마에 물수건을 얹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워디 그것이 내 맘대로 된다냐. 다 신령님이 시켜서 허는 일이제." 어머니는 탄식 섞어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왜 우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입을 모으는 것처럼 돌아가신 정참봉어른과 어머니는 전생의 연이 닿은 것인 모양이라고만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또 사십구제 굿판에서 미친 듯 혼백을 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졸려서 조용히 굿판을 빠져 마당으로 나왔다. 안개 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는 마당가의 채송화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채송화 꽃잎을 손톱 위에 잉끄리며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야아." 퉁명스러운 남자애 목소리에 그녀는 발딱 일어섰다. 하섭이라는 이름의 그집 아들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내밀고 있는 손바닥 위에는 황금빛으로 익은 바파가 두 개 놓여 있었다. 그녀는 어찌 할 줄을 몰라 그의 눈만 빠끔 쳐다보았다. "니 묵어라." 남자애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는 사양할 수조차 없는 위압을 느꼈다.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며 간신히 손을 뻗쳐 비파 한 개를 집어들었다. "두 개 다 묵어라." 남자애가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도리질을 했다. "둘 다 묵으랑께." 남자애는 좀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도 좀더 세게 도리질을 했다. 그러자 남자애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비파를 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곧 땅바닥에 내팽개칠 기세였다. "아녀, 나랑 항께 하나씩 묵잔 것이여." 그녀는 얼결에 남자애의 팔을 붙들며 울먹였다. 남자애의 일그러졌던 얼굴에 금방 웃음기가 퍼졌고, 그녀는 남자애의 팔을 후닥닥 놓았다. "껍질은 못 묵는 거다." 남자애는 그렇게 말하며 먹는 법을 가르쳐주듯 비파의 껍질을 벗겼다. 비파는 딱 한입에 찼고, 그 달고 연한 맛은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맛있는 열매를 장독대에 있는 나무에서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는 남자애가 더없이 부러웠다. "니같이 이뿐 애가 워째 무당딸이 됐는지 몰르것다." 남자애는 불쑥 말하고는 비파 겁질을 담장 너머 어둠 속으로 내던졌다. 그녀는 그 말에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녀는 마당을 가로질러 바라 소리가 친친 얽혀 감기고 있는 대청을 향해 뛰었다. 그녀는 그 후로 그의 집에서 벌이는 굿에는 한사코 가지를 않았다. 그녀가 열일곱의 나이로 대물림굿을 받게 되었을 때 남자애의 말은 달구어진 인두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지짐질해댔다.





장석주 / 시를 위한 단상


1.

시는 표면이 곧 심연인 세계다.


2.

나는 쓴다. 쓴다는 것은 자기가 지핀 불에 스스로 제 몸을 지지는 일이다. 쓴다는 것은 존재함에 숙명으로 내장된 타성(惰性)과 피동성(被動性)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발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쓴다는 것에의 자발적 구속, 혹은 하염없는 투신! 쓴다는 행위는 결국 문체에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쓴다는 것, 그것은 불가피한 피의 요청이다. 어처구니없는 우연이 필연으로 변하는 과정이다.


3.

시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욕망이며, 꿈이 아니라 꿈에 대한 꿈이다. 시는 겹의 욕망, 겹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그것을 결핍에 대한 보상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현실에 대한 환멸이 징하게 깊어져 마침내는 내부에 궤양이 생기고 천공(穿孔)이 생기는 사태까지 악화된 뒤 그 치유의 방책으로 그 유토피아—그것의 한국어 버전은 이어도다—를 찾아 헤매다녔다. 우연이란 바다에 떠 있는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이다. 기껏 없는 것에 홀려 그토록 찾아 헤매다녔다니, 살 떨린다!


4.

시는 무엇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수면에 무심히 비친 풍경이며,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 밑으로 흘러가 스미며 섞이는 마음 한 자락, 풍경에 묻어 풍경과 함께 오는 그 무엇이다. 시는 현실/세계의 구조화가 아니라 현실/세계를 횡단하는 예감이거나 선험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는 도구적 이성의 전략이 아니라 감각의 깊이를 현현하는 그것의 몸-됨이다. 시는 세계가 걸치고 있는 낡은 겉옷의 구멍으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존재의 속살이다.


5.

시에의 숭고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의 치명적 중독으로 시인들은 반생을 소모한다.


6.

과연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내면에 움푹 팬 욕망 때문일까?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의미를 향한 어리석은 투신일까? 아니다, 나를 시라는 벼랑으로 떠민 것은 우연이다. 우연은 땅에 박힌 사금파리처럼 어디서나 번쩍인다.


7.

한 번 변심해서 떠난 애인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삶, 변심한 애인!


8.

시, 변심한 애인을 향한 복수의 일념에서 비롯된 처절한 자해극! 결국 제 몸만 다친다.


9.

다음 단계는 놀이의 윤리학!


10.

그다음 단계는 쾌락의 향연!


11.

공리주의자들은 시를 의미의 집합체로 이해한다. 그들은 모든 문학 언어들이 전언과 의미로 환원된다고 믿는다. 그들은 언표된 것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면서 거기서 삶의 부조리라든가, 선악의 분별이라든가 하는 것을 어쨌든 찾아내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의미에 대한 과소비가 일어난다. 의미로 더럽혀진 손으로 시를 만지면 시가 배양해 온 배아세포들, 혹은 시의 DNA는 의미로 오염되어버린다. 시는 역사의 화석이 진액으로 뿜어내는 의미가 아니다. 시는 의미가 되기 이전의 표면, 심연을 머금은 표현이다.


12.

시를 쓰는 자들이 “비가 온다”고 표현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본디 비는 오고가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온다’는 것은 사람의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사람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항상 있어 온 현상이다. 비는 언제나 있다. 그것은 오고가지 않는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도 비라는 현상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주체로 고정시키고 사물들을 객체화하는 사람 중심의 오래된 인습이 비를 제 몸 가까이 끌어당겨 “비가 온다”라고 쓰게 한다. 국소적 공간 경험에 갇혀 있는 자들만이 “비가 온다”고 쓴다.


13.

좋은 시인은 “비가 온다”라고 쓰지 않는다. 제 몸의 감각적인 경험을 받들어 이렇게 쓴다.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주용일, 「봄비」)


14.

“나무에서 나오는 방법은 나무를 통하는 길뿐이다.” (프란시스 퐁쥬)


15.

시를 쓰기 전에 명상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명상이 인습적 관념의 속박에서 사람을 해방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16.

명상은 시의 반숙(半熟)이다. 그럼 완숙은 어떤 경지일까? 열반(涅槃). 하나의 생생한 현전.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순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 시는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짓이다. 시는 우주의 데이터베이스를 훔치는 짓이니까. 플라톤이 역정을 내며 이상국가에서 시인들을 모조리 추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공화국에서 시인들은 파렴치한 자들이라고 낙인찍힌다. 이것은 우화가 아니다. 현실이다. 1964년 소비에트 공화국의 법정은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는 시인 브로드스키를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하지 않은 기생충”이라고 규정지었다. 그 법정에서 있었던 심문 내용의 일부를 보자. 판사: 당신은 누구인가? 브로드스키: 나는 시인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판사: ‘~라고 생각한다’는 표현은 허용되지 않는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 브로드스키: 나는 시를 쓴다. 출판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판사: 당신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라. 브로드스키: 나는 시를 썼다. 그것이 내 일이다. 판사: 당신을 시인으로 공인한 것은 누구인가? 브로드스키: 없다. 그것은 나를 인간으로 공인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판사: 소비에트에서는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 당신은 왜 일을 하지 않았는가. 브로드스키: 나는 일을 했다. 시가 나의 일이다. 나는 시인이다. 결국 브로드스키는 공화국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브로드스키의 재판은 시의 DNA가 생물학적 합목적성과 무관하며 공익적 세계의 건설에 기여하는 바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시학�에서 “시인들에 대한 비난은 다음의 다섯 종류, 즉 불가능, 불합리, 도덕적으로 해로운 요소, 모순, 시 창작 기술의 올바른 기준에 반하는 것 등으로 구분된다”고 쓰고 있다. 시, 무용한 짓. 상상임신. 옐로카드를 받는 헐리우드 액션. 쇼펜하우어는 그것이 의지와 표상 사이에 있다고 선언했다. 베르그송은 그것이 생의 비약이다, 라고 했다. 그렇다고 시의 미학적 선택에 내재한 반도덕성, 무용함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17.

명상은 초언어(超言語)를 지향한다. 초언어는 ‘나’와 ‘너’의 분별이 없는 태허(太虛)의 상태다. 가령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다음/너, 가련한 육체여/살 것 같으니 술 생각나냐?”(김형영, 「일기」).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뒤 비어서 가뿐한 몸에서 태허를 감지한다.


18.

명상은 그 태허의 상태에서 사물들의 저편에 숨은 신을 만나는 일이다. 숨은 신은 죽은 고양이다. 어느 선사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죽은 고양이다. “국도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는/죽은 고양이의/저 망가진 외출복!”(이창기 「봄과 고양이」)


19.

명상과 시는 그 계통분류상 다른 가지에 속해 있다. 하지만 명상과 시는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명상에서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 시의 영감도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순간에 뇌 속에서 부화한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아니었음, 침묵도 아니었어,/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밤의 가지에서,/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또는 혼자 돌아오는 길에/얼굴 없이 있는 나를/그건 건드리더군.”(파블로 네루다, 「시」)


20.

깨달음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한다. 다 틀렸다. 가짜들이다. 거기에 현혹되면 안 된다. 깨달음은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지도 않다. 일본 불교의 한 맥인 본각사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이미 깨달았으니 다른 좌선(坐禪)도 필요 없다. 악을 행하는 것도 자유다. 조악무애(造惡無礙)의 뿌리가 본각사상이다. 도겐(道元, 1200~1253)도 그 영향권 아래에 있던 승려다. 도겐은 수행의 결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게 아니라 좌선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을 향한 지향이 있을 뿐이다.


21.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언어라는 도구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되 궁극에는 언어를 버려야 한다. 프랑스어로 명상의 깊이를 보여주는 프랑시스 퐁쥬는 새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새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썼다.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식물의 이”도 그중의 일부다. 그러나 새는 공중에서 미끄러지듯 활강하지만, 퐁쥬가 원할 때 그의 시 속으로 날아들지는 않는다.


22.

시는 언어를 딛고 언어를 넘어간다. 시는 없다. 그것의 흔적으로서의 언어가 있을 뿐이다. 언어의 흔적은 시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물증이다. 시를 지향하는 마음의 물증!


23.

시와 명상은 다 함께 초언어를 지향한다. 시는 방법적 도구로 언어를 쓴다. 언어는 물(物)을 지시하는 기호다. 언어는 물(物)이 아니다. 언어는 관념이다. 언어는 발화주체와 물(物) 사이에 있다. 언어는 발화주체와 세계, 존재와 부재 사이에 걸쳐진 다리다.


24.

시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의미론적 연관의 장(場)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를 만나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들에 메아리치고 있는 비언어적인 울림 속에서다.


25.

시는 언어가 아니다. 시는 언어와 언어 사이 그 여백에서 아직 형태소(形態素)를 얻지 못한 생성하는 언어, 발효하는 언어다.


26.

시는 의미가 아니다. 의미 이전이다. 이를테면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혹은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김기택, 「얼룩」)과 같은 구절들은 시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미의 잠재태(潛在態)임을 말해준다.


27.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읽은 모든 작가들이 바로 나이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내가 사랑한 모든 여인들이 바로 나다. 또 나는 내가 갔던 모든 도시이기도 하며 내 모든 조상이기도 하다.”


28.

거울과 부성(父性)은 시와 상극이다. 다시 보르헤스는 말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마치 그것을 사실인 양 일반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거울의 뒷면, 그 텅 빈 공허를 본다. “내가 보는 것은 늘 청동거울의 뒷면이다.”(조용미, 「청동거울의 뒷면」)


29.

의미로서의 시는 사물로서의 시보다 하급이다. B급이다. 하이쿠는 17자로 끝난다. 의미가 언어의 양에 비례한다면 하이쿠는 가장 무의미한 언어의 형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의 의미는 대개는 언어와 반비례한다. 하이쿠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시 형식 중에서 가장 슬림하다. 하이쿠는 해석의 언어가 아니다. 사물과 만나는 순간의 아주 희미한 떨림을 기록한다. 그것은 아직 시로 진화하기 이전의 원시적 흔적이다. 하이쿠에서 언어에 대한 근검절약은 의미에 대한 태만으로 이어진다. 가장 성공한 하이쿠는 무의미의 의미를 체현해낸다. 하이쿠는 언어가 아니라 사물의 은폐된 후경(後景)을 겨냥한다. 하이쿠는 오류와 우연들에 필연의 에너지를 수혈하는 선(禪)과 명상에 가깝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하나 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쉼보르스카, 「두 번이란 없다」)


30.

명상은 사물의 계통분류상 속(屬)이고 시는 그 하위에 속하는 종(種)이다. 명상은 유실수고, 시는 앵두나무다.


31.

시가 보여주는 것은 마음의 지도다. 그 지도 속에 생의 지도가 숨어 있다.


32.

이때 지도는 현실과 현존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그 무엇이다. 시는 현실의 현실, 이데아의 이데아이다. 시는 현실을 품고 부화시키는 하나의 가능 세계의 표현이다. 무의식의 보상(報償) 속에서 농익은 경험의 다양체들이 상징과 이미지라는 의사소통의 기호들로 함축되고, 사유와 상상들은 감각의 등고선으로 태어난다. 가장 좋은 시는 현존이 욕망하는 직관의 지도, 이미지의 지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의 지도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극락의 지도, 없는 곳에 대한 지도이다.


33.

시는 정서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모지락스런 배반이며 해체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정서는 어슴푸레한 것, 언어 이전의 것이다. 시가 언어의 명료성을 저의 실존태를 삼는 게 사실이라면 정서 그 자체는 시가 아니다. 정서에 언어가 입혀지는 순간 그것은 불가피하게 시인의 개성과 기질을 드러낸다. 시는 언어를 쓰되 언어를 넘어선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언어는 강을 건너는 나룻배다. 강을 건넌 자는 그것을 버린다. 시는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 리듬, 비전을 추구한다.


34.

시가 항상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의미를 끌어내려는 것,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과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압축파일을 지향하는 게 그 증거다. 시는 언어의 금욕주의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수다를 추문으로 만든다. 시는 언어를 진술의 방법적 도구로 쓰되 언어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영원한 모순명제를 산다. 시의 본래면목이 진술이 아니라 울음이며 노래이고,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계시로 어두운 하늘에서 우는 천둥이며 번개인 까닭이다.


35.

시는 언어도 아니요, 그것을 다루는 기교가 아니다. 그것들을 버리고 나아가는 데 시가 있다. 한 도공(陶工)은 이렇게 말했다. “기술을 습득하는 데 3년이 걸렸지만, 그것을 깨끗이 없애는 데는 약 10년이 소요되었다”라고. 명색이 이름 앞에 시인이라는 관사를 달고 30년이나 살았지만, 나는 3년 안에 능히 시 쓰는 기술을 익혔으나, 그것을 없애는 데는 30년이 소요되었다, 라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붉디붉은 호랑이�(2005)는 등단 30년 만에 내놓은 시집이다. 서문에도 밝혀 놓았지만 그만 시를 놓아도 좋겠다는 마음을 먹은 게 사실이다.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02)를 준비할 무렵부터 이런 생각이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시 쓰기의 보람이 있고 없음 때문이 아니라 내 시가 더는 가망이 없다는 자각 때문이다. �붉디붉은 호랑이�를 내면서 이 생각은 더욱 또렷해졌다. 서른 해라면 아둔한 사람도 깨치고 나아가는 바가 있을 터인데, 가망 없는 걸 너무 오래 붙들고 있다는 회한이 작지 않았다. 본디 미련퉁이이긴 하나 세월의 궁리로 버려야 할 것과 쥐고 있어야 할 것에 대한 분별이 없지는 않다.


36.

뛰어난 솜씨꾼의 솜씨 속에는 뛰어난 솜씨가 없다고 한다. 감히 그 경지를 흠모하며 애써 익힌 것을 버리고 지우려 했는데, 시집 나온 뒤 꼼꼼하게 읽어보니 언감생심이다. 도끼날을 휘두르되 도끼날은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내놓는 것마다 거친 도끼자국이 선연해 민망하다. 성속일여(聖俗一如)라는 깨우침은 말뿐일까, 시들은 미추와 선악의 경계와 분별이 선명한 의식으로 언어를 부리고 범상함에서 편안하지 못했다.


37.

시는 경험의 진술도 아니요, 오래된 기억도 아니다.


38.

시는 경험을 청취하되 경험을 넘어서 간다. 시는 오래된 기억이기보다는 반기억(反記憶), 혹은 기억의 대속(代贖)이다. 시는 역사에 기생하지만 제 존재가 나온 근원이며 숙주인 역사를 부정한다. 역사의 언어는 화석의 언어이고 시의 언어는 생물의 언어인 까닭이다. 시는 의미의 정언적 요청이 아니라 의미를 갖고 노는 놀이이다.


39.

시의 언어들은 역사에 투항할 때가 아니라 역사와 맞서며 긴장관계를 이룰 때 빛난다. 시를 빚는 욕망과 기억들은 역사가 내장한 도덕과 계시의 규범에 의해서가 아니라 쾌락과 즐거움에 따라 움직인다. 시는 환원불가능한 것을 화석화시키는 대신에 생물로 끌어안고 그것과 연애한다. 시인은 온갖 사물들과 연애를 하지만, 사물에 몰입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뒤집어 이면을 본다.


40.

시는 사물에의 최면(催眠)이고 빙의(憑依)다. 시는 세상을 넓고 깊게,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기다. 그리하여 본질에 다가가기다. 허식과 기만을 뚫고 나아가는 상상력과 이미지의 놀이다. 삶에 작동하는 규범적 윤리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며, 가망 없는 꿈들에 희망을 불어넣는 풀무질이다.


41.

시는 영토화된 것에서 탈주하기, 탈영토화하기다. 영토화된 것들은 이미 죽은 것들이다. 노자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굳고 강해진다”고 했다. 시는 굳고 강해진 것, 그 주검을 가로질러간다.


42.

시는 당대의 주류적 가치를 옹호하지 않고, 아직 현실에 당도하지 않은, 그래서 모호한 윤곽만을 드러내는 미래의 가치에 헌신한다. 모든 독재자들은 음풍농월은 즐기지만 진짜 시인들은 혐오하고 증오한다. 미래의 가치들은 독재자들이 옹호하는 오늘에 통용되는 가치의 진위(眞僞)와 미추(美醜)를, 기만과 사술(邪術)을 여지없이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시가 주류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딴지 걸고 부정하기 때문에 시가 의미의 건축자가 아니라 파괴자라는 오해도 종종 받는다. 시인은 낡은 의미의 파괴자이다. 독재자들은 시의 파괴가 새로운 것의 창조를 위한 첫걸음이며 그 전제라는 걸 납득하지 못한다.


43.

시는 영웅, 비범한 성공, 웅장한 것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하찮은 것의 숭고함과 실패한 것들의 창백한 진실, 그리고 비루한 것의 장엄함에 바치는 한숨 섞인 헌사이다. 시인은 하찮은 것에서 위대함을 비루한 것에서 장엄함을 본다. 모래에서 은하계를, 피어나는 꽃에서 우주를, 오늘에서 내일을, 피어오르는 구름에서 번개와 우레와 비를 보는 게 시인이다.


44.

공리주의자들이 시인을 지상의 잉여적 존재로 폄하하는 것은 시가 실익과 상관없는 미학적 현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변호, 무(無)와의 덧없는 성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자들이 지배권을 갖고 있는 현실에서 시인은 방외인으로 내침을 당한다. 예로부터 진짜 시인들은 후레자식, 광인, 떠돌이, 방랑자였다. 매우 당연한 일이다. 시인은 현실의 적자가 아니라 서얼이다. 시인들이 현실의 총애를 구하지 않고 만물에 편재해 있는 도(道), 궁극적으로 영원, 초월, 절대의 도덕만을 섬기기 때문이다.


45.

시인은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몸으로 산다.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득세하는 문명 세계에서 쓰는 것만으로 존재를 지탱하려는 자들은 무용한 열정에 들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들은 빗방울에서 움직이는 우주를 보며, 모래알에서 궤도에서 이탈한 별의 현존을 보며, 꽃봉오리를 흔들고 지나는 한 줄기 바람에서 탐미에의 몸짓을 본다. 시집이 안 팔리고 시가 헐값 취급을 당하는 이 세태의 천박함에 맞서 시인은 시로써 내면의 소리를 붙잡고, 세속이 품은 신성(神聖)을 직시하며, 언어로 우주를 건설하려고 한다. 시인은 무통문명(無痛文明)의 시대에 사람들이 떨쳐내는 고통을 제 몸에 품고 진주를 키우는 정신의 천연기념물이다. 시인들이 있기에 권태와 허무와 절망마저 뜻과 생기를 얻고, 우연의 응축들로 이루어진 모든 삶들이 빛난다.


46.

눌리고 찢긴 가슴을 펴주고 시대를 초월해서 심금을 울린다. 그게 좋은 시다.


47.

시는 심미 본능에서 발현하는 언어 예술이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가 시의 목적은 아니다. 시는 일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 뜻의 곡진함, 말법의 새로움, 생동하는 기운이 한데 어우러질 때 시는 제 빛을 낸다. 감히 시가 생계를 견인하는 일보다 갈급하며 숭고한 사업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심미적 감각을 세련되게 하며 세상을 보는 다른 눈과 다정한 인격을 키워주는데 제격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때때로 인간은 먹고사는 것과 결부된 합목적성을 넘어서서 숭고함의 본질 속에서 우리 삶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품는다. 시는 그 숭고한 욕망의 구체적 현존이다. 그래서 시를 아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 곧 우주를 아는 것이다.


48.

한편에서는 빈곤이라고 하고 한편에서는 과잉이라고도 한다. 유협의 은유를 빌려 말하자면 지금 우리 시단에는 기화요초와 함께 매와 꿩과 봉황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형국이다. 매는 높이 날 수 있으나 볼품이 없다. 꿩은 화려하나 높이 날지 못한다. 옛것을 잇는 작품은 새로운 기풍이 부족해 어딘지 진부하고, 낡은 기풍을 혁신한다는 작품은 옛것의 심오함을 품지 못한 채 신기성만 쫓으니 어딘지 뿌리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 오직 높이 날면서 아름다운 것은 봉황뿐이다. 유협은 동양 문예미학의 빼어난 고전인 �문심조룡�에서 풍(風), 골(骨), 채(采)가 두루 갖춘 작품만을 이상적인 경지에 오른 것으로 꼽았다. 봉황은 어느 시대에나 흔치 않다. 흔하면 그게 어디 봉황이냐! 허나 드문 것도 생산의 풍요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니, 생산에 활기를 더하도록 북돋는 것은 봉황의 출현에 보탬이 되는 일이다.


*장석주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난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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