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높아졌다 낮아졌다
4.19 높아졌다 낮아졌다
나는 참으로 바보 멍청이입니다
몸이 가려우면 가렵다고 말을 하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면 되는데
홀로 숨어서 여기저기 긁어댑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병을 키웁니다
손톱으로 긁으면 상처가 나고
그 상처에서 진물이 나고 고름이 생깁니다
한 곳의 가려움은 온몸으로 번지고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면
혹시 패혈증이 아닐까 걱정을 합니다
급기야 이웃 사람들도 걱정을 합니다
그렇게 나는 늘 바보 멍청이로 살았습니다
나는 나의 병을 스스로 키우며 살았습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나의 심장병을 만나고
내가 선천성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때도 나는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홀로 들풀처럼 쓰러지며 스스로 병을 키웠습니다 너무 가난했다는 이유로 나는 지금도 변명을 하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효도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면 돌이킬 수 없는 가장 큰 불효였고 가장 어리석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나는 참으로 바보 멍청이로 살았습니다 학교에서 아무리 육성회비 가져오라 하여도 나는 부모님께 육성회비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선생님께 매를 맞거나 남아서 청소를 해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나의 사랑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물속에 빠진 달을 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건져 올린 등불 하나 들고 달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2023. 9. 15. 20:40 / 하늘나라에 있는 기형도를 생각하며 / 이승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닌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동기생 남진우의 전화를 받고 서울적십자병원 영안실로 헐레벌떡 달려갔던 봄날, 그는 영정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백 배는 건강하게 보였던 그가 나이 서른이 되기 직전에 고인이 되었고, 내가 그에게 조문을 가서 절을 올리게 될 줄이야 꿈도 꿔본 적이 없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그는 너무나 씩씩했고, 유쾌했고, 말도 참 잘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을 꽤 더듬었던 저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영안실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하재봉 씨와 나눴던 대화가 잊히지 않습니다.
“이 형! 최근에 기형도 시인이 발표한 시들 읽어보셨어요?”
“읽어봤지요.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전부 자기 죽음을 예언한 시들 아닙니까.”
그가 시내 파고다극장에서 영화 <뽕 2>를 보다가 절명한 것은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경이었습니다. 계간지가 3월 1일 전후로 출간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발표한 시들, 즉 사망 직전에 발표한 시들의 제목이 ‘빈 집’, ‘가수는 입을 다무네’, ‘입 속의 검은 잎’ 등이었습니다. 하재봉 씨와 저는 바로 며칠 전에 읽은 그 시편들에 거무튀튀하게 번져 있는 죽음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를 물 마시듯 마셔댔습니다. 평소의 그는 병을 앓기는커녕 건강하기만 했으니 죽음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아무런 질병의 흔적도 약물 복용의 혐의도 남기지 않은 그가 도대체 왜? 하지만 희한한 일은 사망 며칠 전에 문예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 기형도의 시가 온통 죽음, 죽음,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왜 그 야심한 시간에 극장에 가서 새벽녘에 숨을 거두었던 것일까요. 아무튼 자정 넘어서까지 이어진 영화 상영이 끝나 관객들이 다 나가고 텅 빈 극장 안에 청소하러 들어간 청소부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뇌졸중으로 절명한 후였습니다.
영안실에서 시인과 절친했던 연세대문학회의 친구 원재길과 김태연에게 물어보아도 그가 죽기 전날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아 우리는 그가 왜 그 시간에 그곳에 갔는지, 그곳에서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겨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는 그 무렵 중앙일보사 문화부 기자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저한테 전화를 해왔습니다.
“이승하 시인이지요? 저 중앙일보 문화부에 있는 기형도라고 합니다.”
“기형도 씨라고요? 반갑습니다. 동아일보 당선작 <안개> 잘 읽었습니다. 시가 참 좋던데요.”
“고맙습니다. 제가 전화를 한 이유는 이 형한테서 원고를 하나 받고자 해서입니다. 지금이 이른바 신춘문예의 계절 아닙니까. ‘나의 신춘문예 체험’이라는 코너를 만들었는데 신춘문예를 준비하고 당선되던 시절의 이야기를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쓰지요. 몇 매 정도 쓰면 됩니까?”
원고를 팩스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그때는 아직 E-메일이란 것이 사용되기 전이었다) 그는 시간이 되면 중앙일보사로 한번 와주기를 원했고, 나도 1985년 동아일보 당선작 <안개>를 쓴 시인을 만나고 싶어 원고를 들고 오랜만에 중앙일보사에 놀러갔습니다. 우리는 그날 신문사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습니다. 저녁이었다면 술잔을 기울였겠지만 그를 처음 만난 날 술을 마신 기억이 없으니 만난 시간은 분명히 낮이었습니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 저를 한동안 몹시 원망했다고 말했습니다. 1983년 말, 중앙일보사에 <겨울 판화> 연작시 몇 편을 투고하고는 내심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자신은 최종심까지 올라가 차점자로 떨어지고 저의 <화가 뭉크와 함께>가 당선되어 부러움과 동시에 질투심이 나서 몹시 괴로워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그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은 저 때문에 쓴 시일까요?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하는 대목에 담겨 있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이 형의 시는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뭐 이런 시가 다 당선이 되었나 싶어 화도 나고 그랬어요. 말더듬이를 하나의 화법으로 삼을 생각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하, 제가 말을 심하게 더듬었거든요.”
그는 제가 내민 글에 ‘입대 전 투고…… 꼴찌 작품으로 습작 마감’이라는 제목을 붙여 실어주었습니다. 꼴찌 작품이란 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투고작 중 제일 밑에 깔려 있던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 그와의 만남은 그저 1년에 한두 번, 그것도 문인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시상식이나 송년 모임 같은 때였습니다. 저는 그 무렵 쌍용그룹 홍보실이라는 데 적을 두고서 만원 전철에 실려 출퇴근을 하는 샐러리맨이었고, 그는 신문사 정치부와 문화부, 편집부 등을 거치며 경력을 쌓아가고 있던 민완한 기자였습니다.
그는 그 시절에 기자로서는 경력을 확실히 쌓아가고 있었지만 시인으로서는 철저히 무명이었습니다. 시인의 살아생전에 기형도의 시에 대해 언급한 문학평론가는 딱 두 사람, 조남현과 최동호 씨였습니다. 조남현은 <신예들의 저력과 가능성>에서, 최동호는 <80년대적 감성의 자리잡기>에서 80년대에 등단한 여러 유망한 시인을 죽 나열하는 가운데 기형도도 있다는 식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언급했을 따름이었지요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89년 3월 7일에 작고할 때까지 그는 철저하게 무명의 시인이었지만 사후에 시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뒤바뀝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김현 씨가 해설을 써 간행된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문지시선 사상 최고의 발행 부수를 기록하게 되고 작고 10년 만에 간행된 전집은 발간 사흘 만에 재판을 찍었습니다. 그의 시집은 지금껏 최소 50만 권은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형도 사후에 그의 시를 연구한 글이 1백 편이 넘게 발표되었습니다.
저는 그를 만난 적이 몇 번 안 되지만 연세대 출신의 시인 원재길과 여러 해 동인 활동을 했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수시로 듣고 있었습니다. 그의 지독하게 가난했던 유년시절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저는 생시의 그를 사실은 시인으로서보다는 기사를 정직하게 쓰는 기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화 평이나 연예인 평은 침소봉대하게 마련인데 기형도 기자는 아주 정직하게 써 제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우리 시단의 ‘가수’였습니다. 연세대 국문학과에 계신 정현기 교수도 어느 가수 못지않은 노래 실력을 갖고 있는데 연대 나온 사람은 다 노래를 잘하나 봅니다. 그는 남진우의 결혼식장에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주제가인 <캐플릿 가의 축제>를 정말 멋지게 불렀습니다. 시단의 가수 3총사는 그와 박주택과 장석남인데……. 지금은 누가 노래를 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재봉 시인은 기형도 사후 1주기 모임을 주선했습니다. 하재봉은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남진우에게 부탁하여 예식 행사를 찍은 비디오필름을 빌려, 어느 순간 추모 행사장의 불을 끄고 암흑천지로 만든 후에 기형도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모인 여성 독자들이 일제히 울먹였다고 하더군요. 그 추모의 자리에 저는 가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제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애도, 애석함, 애처로움뿐입니다. 가난도 무명도 떨쳐버리고 신문기자로서, 또 시인으로서 탄탄대로를 걸어갔어야 할 그에게 죽음의 사신이 그렇게 일찍 방문했으니 우리 문학을 생각해도 통탄할 일이었지요.
시인이 간 지도 34년, 저는 시집도 몇 권 냈고 문학평론집도 몇 권 냈습니다. 모교의 교수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요. 저는 지금도 시인이고 학교에서 학생들 앞에서 시의 아름다움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기형도 시의 그 치열함과 처절함을 매 학기 학생들에게 이야기할 때마다 제 귓가에는 시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 하더라도 시를 위한 순교자적인 자세를 잃지 않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1980년대를 살면서 그는 그 시대에 대해 절망했는데 20세기 때도, 21세기인 지금도 이 땅은 여전히 비극적인 상황이지요.
하늘나라에서도 기형도 시인은 시를 열심히 쓰고 있겠지만 저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아픔도 설움도, 억울함도 부러움도 없을 그곳은 정녕 천국이 아닐까요. 기형도 시인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빕니다. 아래의 시는 같은 묘역에 있는 구상 선생님과 기형도 시인의 묘소에 참배하고 와서 쓴 것입니다.
시인들, 신발을 벗다
1. 구상 시인 묘비 앞에서
⍏
지아비 具 요한 常
아내 徐 마리아데레사 暎玉
1919년 9월 16일 ― 2004년 5월 11일
1919년 2월 4일 ― 1993년 11월 5일
적군묘비 앞에서 울먹였던 시인이
이곳에 뼈를 묻은 지 어언 20년
20년만 지나도
20주기에 찾아올 참배객들 대부분
신발 벗었다가 다시 신을 일 없을 것이다
이 광대한 공원 부지가 다 무덤
거의 대부분
사람 다녀간 흔적이 없다
무덤마다, 조화조차 빛에 바래
누리끼리하다
11월 7일에는 비가 왔었다
두 아들도 앞세우고 아내도 앞세우고
스승은 민망하다는 듯이
빨리 식당으로 가자고만 외치고 있었다
2. 기형도 시인 묘비 앞에서
⍏
幸州奇公그레고리오亨度之墓
1960. 2. 25 ― 1989. 3. 7
석간 문화일보 부고 기사를 보고
달려간 서울적십자병원 영안실
그대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산다는 것의 가소로움이여’ 하고 말하고 있는 듯
기억한다 남진우 결혼식장에서 부른 노래
‘캐플릿 가의 축제’
축제는 한 순간에 끝나고
그때 그 장례식장
시인들은 만취해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고
주먹다짐에 나서기도 했지만
새벽이 되니 신발이 몽땅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세월은 흘러 그대 간 지도 어언 34년
무덤 앞 돌 위에 꽃을 올려본들
시들지 않는 생화가 있으랴
봉분에다가 술을 뿌리고
주검 앞에서 죽음을 잊는다
죽음 앞에서 주검을 잊는다
선생님 내년에 또 오겠습니다
형도, 내년에 또 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