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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17. 2021

이달오름

- 강산 시인의 꿈삶글 19





이달오름 



이달오름은 쌍봉산이다

여신의 두 젖가슴이다

여신의 두 엉덩짝이다

낙타의 두 등짝이다

길을 가다가 쭈그려앉은

할머니의 두 무릎이다

반월산 아래 나란히 누워계신

부모님의 반월 무덤이다

아, 다시 보니

힘차게 달려오는

흰 소의 빛나는 쌍고동소리 뿔이다 


이달오름 아래로 쌍둥이가 손을 잡고 간다

이달오름과 새별오름 앞으로

세 쌍둥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웃으며 간다






꿈 


늦은 서설이 내리는 시골길

나의 화살을  날리니

잘 보이지 않던 나의

빛나는 별의 심장에 꽂히네 


길이 막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낚시줄이 너무 많아

헤엄을 칠수 없었다

온 몸에 박힌 낚시바늘

석달  열흘을 빼내어도

삼만육천오백여 개가

아직도 내 몸 속에 있다 


#

거시기가 하고 싶어

머시기를 뽑아버렸다

그래도 곁에 가고 싶어

두 발목을 잘라버렸다

자꾸만 말을 하고 싶어

혀도 뿌리까지 뽑았다

자꾸만 글을 쓰고 싶어

손목까지 자르는데

마지막으로 자를 손이 없다


#

이상한 꿈을 꾸었다

우리집 구석구석에 cctv를 달았다

이상한 약을 주며 일주일 동안

집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생각한 것들을

보고서로  써서 제출 하라고 하였다

날마다 피를 뽑고 

소변과 대변도 제출 하라고 하였다

가슴과 이마에 작은 반찬고를 붙이더니

일주일동안 절대로 떼지 말라고 하였다

나의 모든 신체활동과 정신활동이

어디론가 전송된다고 하였다

세상이 바뀌어서

이를 거부하면 즉시 폭발한다고 하였다

특히 나같은 외계인은 특별 감시 대상이므로

일 년에 한 번씩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보니 토성으로 가는 우주선이

승객 한 명을 찾다가 이제 막 떠나고 있다




어제(2021년 2월 15일 새벽 4시) 백기완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엄수하며 19일 영결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어제 밤에 나는 많은 꿈을 꾸었다.

나는 오늘 오전에 백기완 선생님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며 산책을 하였다. 선생님의 삶은 어쩌면 저 보리밭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에는 새별오름 곁에 있는 이달오름을 오르며 뒷모습에 대하여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은 새별오름을 좋아하고 또한 많이 오른다. 하지만 바로 곁에 있는 이달오름에는 잘 오르지 않는다. 오늘도 보니 새별오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있었다. 그에 비하여 이달봉에는 산불감시원 한 분만 산을 지키고 있었으며 이달이촛대봉에는 죽은 한 사람만이 정상에 누워 있었다.

이달오름은 쌍둥이 오름으로 이달봉과 이달이촛대봉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새별오름과 나란히 있어서 새별오름부터 오르고 새별오름에서 이달오름으로 가는 길이 있지만 오늘은 시간이 촉박하여 이달오름 두 봉우리만 올랐다.

오늘도 새별오름에는 제주들불축제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들불 COVID-19 OUT" 억새다발로 글자를 만들기 위하여 크레인까지 동원하여 모노레일에 실어서 올리고 있었다. 

나는 평소 새별오름 오를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라가는 왼쪽 급경사가 아니라 반대쪽인 완만한 오른쪽 길로 올라간다. 하지만 오늘은 새별오름에 오르지 않고 새별오름 안내판이 있는 왼쪽 길로 빠져나간다. 그곳에는 새별오름 공동묘지가 있고 가운데로 차도 다닐 수 있는 시멘트길이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뒷모습에 대하여 생각하기 좋은 길이다. 

오늘도 역시 왼쪽 급경사 쪽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올라가고 있다. 그 곁의 무덤 속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씩씩거리며 올라가는 발자국소리와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또한 새별오름을 올라가는 저 많은 사람들은 바로 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나는 어쩌면 이제 저 무덤들과 더욱 가까워져야만 할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면 곧 삼나무들과 소나무들이 많은 이달봉이 먼저 보인다. 이달봉 입구에서 돌아보면 새별오름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달봉 아래쪽에는 주로 삼나무들이 많고 윗쪽에는 소나무들이 많다. 삼나무와 소나무 경계에는 키작은 잡목들이 있어서 바다도 잘 보이고 돌아보면 새별오름 뒷모습과 백록담까지 잘 보인다. 하지만 오늘은 곧 비가 올것 같은 날씨여서 백록담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높지 않은 봉우리여서 쉽게 오를 수 있다.  또한 이달봉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이달이촛대봉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서 쉽게 오를 수 있다. 이달이촛대봉 정상에는 무덤도 하나 있다. 새별오름과 이달오름에는 명당자리가 많은 것 같다. 들불축제를 하는 새별오름 앞면에도 사실은 무덤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들불축제를 위해서 죽은 사람들이 많이 이사를 갔다. 몇 년째 이사를 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묘지는 아마 며칠 후에 새별오름에 불을 놓으면 뜨거운 불 속에서 아마도 비명을 지를 것이다.

이달봉과 이달이촛대봉을 오르고 내려오는 시간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은 한 시간이면 새별오름까지 세 봉우리를 모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달이촛대봉까지 오르고 내려오는데 이달봉 정상에서 만났던 산불감시원이 퇴근시간이라면서 나에게 인사를 하고 바다쪽으로 내려간다. 나는 다시 공동묘지를 거쳐 한라산쪽으로 간다. 들불축제 준비를 하던 사람들도 퇴근할 준비를 한다. 평화로에 다시 들어서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 밤에는 저 비가 눈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꽃샘추위에 이어도공화국 꽃들도 몸을 움추리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백기완 선생 영면…향년 89세

mbc 뉴스 입력 2021-02-15 11:40 | 수정 2021-02-15 16:31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오랜 투병 끝에 향년 89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백 소장은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하던 가운데 오늘 오전 영면했습니다.

[황해도에서 출생‥전쟁·분단 겪으며 통일 문제 고민]

193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백 소장은 1946년 부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국민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남북 분단으로 가족들이 헤어지는 비극을 겪으며 통일 문제와 사회 모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고, 1950년대엔 농민·빈민 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에 참여하던 중 1960년 4·19 혁명에 뛰어들었고, 이후 1964년 재야 운동가들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습니다.



[투옥·고문 속에서도 한평생 민주화운동에 헌신]

1974년에는 유신 반대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고, 1986년에는 '부천 권인숙 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했고, 1992년 대선에도 독자 후보로 출마한 뒤, 이후에는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통일운동에 헌신했습니다.

한복 차림의 백발의 투사는 노령이 되어서도 전국의 투쟁 현장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을 비롯해 한미 FTA 반대 운동, 용산 참사 투쟁,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 등에서 온몸으로 싸웠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한 촛불집회에는 23차례 중 단 한차례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달동네·새내기 등 순우리말 만들어 확산시키기도]

백 선생은 여러 순우리말을 발굴해낸 문필가이자 이야기꾼이기도 했습니다. 고인은 '달동네'와 '동아리'라는 말을 만들어 널리 퍼뜨렸고, 대학교의 MT는 '모꼬지', 신입생은 '새내기'로 고쳐 쓰는 등 순 우리말을 확산시켰습니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이기도 한 백 선생은 '항일민족론', '백기완의 통일이야기' 등 여러 저작도 남겼습니다.

2019년 3월 장편 서사 <버선발 이야기>를 병상에서 출간한 뒤, MBC와 가진 인터뷰에서 고인은 "사람은 누구나 사람답게 살고자 한다"며 "그냥 태어났으니까 살라고 하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사람답게 살고자 해…올바로 잘 사는 것이 사람의 삶"]

당시 고인은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며 "일을 통해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고, 올바로 잘 사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고 백기완 선생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오는 19일 오전 7시입니다.




백기완 선생 장례 '사회장'으로 엄수…19일 영결식

송고시간2021-02-15 14:17 문다영 기자


장례위 "고인에 대한 악의적 조롱 법적 대응 검토"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 별세          

(서울=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부터 농민·빈 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하며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다.
15일 오전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있다.


(서울=연합뉴스) 문다영 기자 = 15일 오전 타계한 백기완(향년 89세)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장례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등 5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주축이 된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으로 엄수된다.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같이 밝히면서 17일까지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을 비롯해 일반 시민에게도 빈소를 개방하고 공식 조문을 받는다고 덧붙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조문객 간 2m 거리를 유지하는 등 철저히 방역 수칙을 적용하고 음식은 제공하지 않는다.

장례위원회는 각 지역에서 장례식장이 있는 서울까지 여러 명이 이동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민주노총 16개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지역 분향소를 만들고 온라인 추모관을 개설하기로 했다.

입관식은 17일 오후 1시께로 예정돼 있으며 18일 오후 6시께 추모의 밤을 열 계획이다. 이튿날인 19일 오전 8시에 발인하며 이후 서울 종로구 통일문제연구소를 들러 대학로 거리에서 노제를 한 뒤 11시께 영결식을 하고 장지로 이동한다.

영결식 장소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며 장지는 경기 마석 모란공원이다. 장례가 끝날 때까지 장례위원회는 백 소장의 뜻을 기리려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시민 장례위원'을 모집한다.

               

'노나메기'는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백 소장이 평생을 바친 사상이기도 하다.

백 소장의 큰 딸인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는 "아버님이 평소에 지켜나가려 한 노나메기 큰 세상, 진짜 해방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장례위원회는 온라인상에서 고인을 모욕하는 일부 댓글에 대해선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조영선 장례위원회 법률위원장은 "선생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고 다름을 인정할 수 있다 해도 악의적인 조롱과 비난은 망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오늘 자문위원회를 구성해서 법적 검토를 거쳐 향후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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