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산 시인의 세상 읽기 &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9
- 강산 시인의 세상 읽기 &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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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이상한 꿈이로구나
미꾸라지도 아니고
뱀장어도 아니고
낙지도 아니고
뱀도 아니고
고양이가
왜?
목이 답답하여
눈을 떠 보니
고양이가 글쎄
입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꼬리는 아직
입 밖에 있고
목구멍으로 들어간 고양이가
배 속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꼬리를 잡아당겨도
고양이는 나오지 않는다
변기에 앉아서 생각한다
배 속에서
쥐 소리가 들린다
내가 고양이를 부른 것인가
고양이가 나를 찾은 것인가
답을 찾지 못하고 일어서는데
내 배 속에 숨어 있던
쥐 한 마리
툭, 튀어나와 달아난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고양이는 따라 나오지 않고
황소 한 마리 따라 나오고 있다
아직도 황소 꼬리는
내 배 속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꼬리 끝이 아직도
내 입 속으로 다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꿈속을 다 빠져나오지 못했구나
길어야 3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번쩍 정신이 돌아왔다는 어떤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왔다. 그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비로소 건강관리를 시작했다는 사람, 어느 날 갑자기 말기 암 환자라고 통보받은 사람, 그런 환자가 5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고 건강해진 모습으로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귀농하여 텃밭을 일구어 자연밥상을 차려주는 약사여래도 함께 나왔다. 참으로 귀한 모습이다. 전생에 어떤 큰 공덕을 쌓았기에 저런 약사여래를 만날 수 있었을까. 사랑의 여신들은 처치 곤란할 정도로 차고 넘치는 시대, 저렇게 아름다운 약사여래가 이 시대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는 믿어지지 않아 자꾸만 나의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되었다. 날마다 산에 가서 함께 운동을 하고 날마다 일기를 쓰는 모습이 영락없이 수행자를 닮았다. 수행자를 닮은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수행자의 마음자세이고 몸가짐이고 삶 자체가 수행이다.
비록 화면으로 만난 약사여래였지만 나는 뒤통수를 쿵, 한 방 얻어맞았다. 나는 과연 생전에 약사여래를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생전에 약사여래를 만날 수 있을 만큼 공덕을 쌓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나의 손에 약병이 들려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 나에게는 이미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아픈 세상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지 않은가! 그런 약병이 바로 내 손안에 들어있지 않은가! 약사여래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약사여래가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아, 그리하여 나는 오늘부터 당장 약사여래가 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약사여래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던가?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보다도 부처님보다도 약사여래가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는 끝까지 약사여래로 남아있을 보살님이 더욱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약사여래가 되기 위해서 나는 무엇부터 실천을 해야만 할까?
나는 그동안 숲 농법으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밭을 숲으로 만들고 있었다. 숲이란 무엇인가? 숲이란 말은 나무와 풀의 합성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숲 농법은 나무와 풀을 함께 기르는 농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산을 구입하지 못하여 밭을 숲으로 만들고 있었다. 바보처럼 비싼 밭을 값이 싼 숲으로 만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손가락질을 하여도 나는 숲을 가꾸고 싶어서 숲으로 만들고 있었다. 아름다운 산을 갖고 싶었으나 산을 마련할 수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밭을 숲으로 바꾸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숲이 완성되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숲 농법을 실천할 때가 되었다.
세상에는 나보다 먼저 숲 농법으로 숲에서 숲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오래도록 심마니 생활을 하다가 좋은 산을 마련하여 산양삼을 재배하고 있다. 전라북도 정읍의 종석산에서 산양삼 등의 약초를 재배하며 숲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제 그에게 숲 농법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배워야만 하겠다. 나는 몇 년 후에 산으로 가기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해야만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작년에는 아주 작은 산도 구입했고 또한 임업 관련 교육도 온라인으로 오래도록 받았다. 그리고 임업후계자도 되었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우선, 퇴직하기 전까지는 제주도에 있는 이어도 공화국 베이스캠프를 좀 더 쓸모 있게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제주도 특성을 잘 살려서 꼭 필요한 숲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석산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인연이 되기를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종석 산지기는 분명히 나보다 앞서간 사람이니 나는 그분을 선생님으로 모셔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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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 아파해 줄 수 없다. 자식들이나 부모님께서도 나를 대신해서 아파해줄 수는 없다. 물론,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좋은 지인들은 많이 위로해주고 도와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생각하면 나를 대신해서 아파줄 수는 없다. 몸이 아플 때도 그렇지만 죽음에 직면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의 죽음을 대신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살 수만 있다면 대신 죽어주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뿐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마음보다 몸이 더욱 특별하며 오직 하나뿐인 나의 몸이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닐까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 엄밀한 사실은 나 혼자만의 개인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나"가 그러할 것이다.
나는 수술을 받은 다음부터 더욱 차가운 사람이 되었다. 아니, 내 몸은 더욱 차가워졌다. 특히 잠을 잘 때 추위를 많이 탄다. 오늘 밤에도 자다가 너무 추워서 잠을 깼다. 잠 속에서도 내가 춥다는 생각이 들고 몸을 자꾸만 웅크리다가 결국 잠 속에서 뛰쳐나와 내복을 입고 잠바까지 껴 입고 다시 눕는다. 물론 양말도 신고 장갑까지 끼고 다시 의자에 눕는다. 물론, 집이면 전기장판을 켜고 이불을 덮고 따뜻하게 잘 수 있지만 내 처지가 아직은 그렇게 편히 잘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한다.
왜 이렇게 내 몸이 차가워졌을까?
나는 일어나서 여름에도 내복을 입어야만 견딜 수 있는 내 몸의 변화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한다.
1990년 여름에 수술을 받은 후에도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2017년 겨울에 2차 수술을 받은 이후부터 내 몸이 차가워졌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1차 수술과 2차 수술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1차 수술 때에는 판막은 건드리지 않고 대동맥 판막 앞에 있던 혹만 하나 제거했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심장 벽 전체가 두꺼워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심장 속에 혹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심장 벽에 붙어있는 혹만 하나 제거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동맥으로 피가 나가는 입구인 죄 심실 벽에 혹이 하나 있어서 대동맥판막이 다 열려도 충분한 양의 피가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혹만 제거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판단해서 벽은 건드리지 않고 혹만 제거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패혈증까지 앓은 후여서 나는 손상된 판막을 제거하고 대신 인공판막을 삽입하였다. 또한 의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내 심장 상태를 좀 더 정밀하게 볼 수 있었다. 내 심장 상태는 단순한 혹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작은 혹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심장 벽 전체가 두꺼워지는 병이었다. 특히, 좌심실의 벽이 두꺼워지는 병이었다. '비후성 심근증' 즉, 선천적으로 심장근육이 두꺼워지는 병이었다. 벽이 두꺼워지는 병이었다. 벽이 두꺼워지면 상대적으로 공간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공간이 좁아지면 피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지고 펌프질을 할 수 있는 피의 양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간을 넓어주기 위해서는 벽을 허물어야만 했다. 벽을 깎아내야만 했다. 특히 벽이 너무나 두꺼워지면서 반월 판막인 대동맥판막 앞 통로가 거의 막혀있을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따라서 대동맥판막 교체와 함께 판막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넓혀주는 공사를 대대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좌심실 벽 전체를 깎아낼 수 없어서 판막 바로 앞부분을 집중적으로 깎아낼 수밖에 없었다. 구체적인 수술 방법은 내가 알 수 없지만 대동맥 판막 쪽으로 의사들이 손가락을 짚어 넣어 두께를 가늠하면서 수술용 가위와 수술용 메스를 이용하여 조금씩 심장벽의 근육을 떼어냈다고 하였다. 그렇게 떼어낸 나의 좌심실 벽의 근육들은 고스란히 사진으로 찍혀 있었다. 상당히 큰 근육 조각들이 열 조각 이상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초음파 사진으로 내 심장을 들여다보면 대동맥판막 바로 앞부분에 웅덩이처럼 움푹 파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나의 심장 내부는 보통 사람들과 모양이 많이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그렇게 웅덩이처럼 깊이 파는 과정에서 중요한 신경까지 손실되고 말았다. 우리 사람들의 심장은 그냥 알아서 뛰는 것이 아니라 전기자극을 통해서 율동 운동을 하게 된다. 우심방 위쪽에 동방결절이란 부분이 있다. 바로 그 동방결절에서 전기적 신호가 규칙적으로 발생한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하여 전기적 신호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들의 몸은 여러 가지 조건들 때문에 전기적 신호가 빈번하게 발생할 수도 있고 느리게 발행할 수도 있다. 그 발생 횟수에 따라서 우리들의 심장을 빨리 뛰게 하거나 느리게 뛰게 되는 것이다. 동방결절에서 발생한 전기적 신호는 심장 양쪽으로 신호를 보내서 심방과 심실을 수축하거나 이완해서 펌프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선 같은 신경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각각 연결되어서 전기적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다. 그렇게 좌심방 좌심실은 거의 동시에 수축하고 우심방 우심실 또한 거의 동시에 이완되어서 우리 귀에는 쿵닥 쿵닥 두 박자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사실은 네 박자로 들려야 하는데 심방의 소리는 적게 들리고 상대적으로 심실의 소리는 크게 들려서 심실에서 들리는 소리만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용한 시간에 좀 더 자세히 들어보면 네 박자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쿵닥 쿵닥이 아니라 궁쿵궁쿵 궁쿵궁쿵 이렇게 들릴 것이다.
그런데 나의 심장은 좀 다르다. 전선 같은 신경 다발들 중에 왼쪽으로 가는 신경 다발이 잘리고 말았다. 즉 좌심방과 좌심실로 가는 신경이 절단되고 말았다. 따라서 동방결절에서 발생한 전기적 신호는 오른쪽으로만 가는 형편이다. 즉, 전기적 신호는 우심방과 우심실에만 전달되고 왼쪽에는 전달되지 못한다. 그것을 '좌각 차단'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의 좌심실과 좌심방은 전기적 신호에 의해서 수축과 이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심방과 우심실의 수축과 이완에 따라 반사적으로 율동 운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직접적인 자극에 의한 적극적인 운동이 아니라 수동적인 율동이다 보니 힘이 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내가 잠이 들면 심장은 충분한 휴식을 위해서 최대한 운동을 줄이는 듯하다. 심장도 함께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피는 그만 큰 흐르지 못하고 최소한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피만을 몸으로 보내는 것만 같다. 피의 흐름이 적어지니 자연히 몸은 식어서 추워지는 것만 같다. 어쩌면 몸이 차가워진 것과 함께 꿈이 많아진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을 하여본다.
청동에 도금을 하여 만든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대좌와 광배는 없어졌으나, 불상의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형화된 육계, 신체 비례에 비해 큰 불도에 두 눈을 지긋히 감은 상호(얼굴)를 하고 있으며, 대의는 변형된 편단 우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은 다소 형식화된 지그재그형 옷 주름, U자형 옷 주름 등을 통해 볼 때 8세기 전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8세기, 높이 29.6㎝, 보물 제32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는 약사신앙의 대상이 되는 보살. 부처
약사 유리광 여래(藥師瑠璃光如來)·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동방 정유리 세계(淨瑠璃世界)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부처의 원만행(圓滿行)을 닦는 이로 하여금 무상 보리(無上菩提)의 묘과(妙果)를 증득하게 하는 부처이다. 그는 과거세에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한 12가지 대원(大願)을 세웠다.
그 대원은 ① 내 몸과 남의 몸에 광명이 가득하게 하려는 원, ② 위덕이 높아서 중생을 모두 깨우치려는 원, ③ 중생으로 하여금 욕망에 만족하여 결핍하지 않게 하려는 원, ④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대승교(大乘敎)에 들어오게 하려는 원, ⑤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깨끗한 업(業)을 지어 삼취 정계(三聚淨戒)를 갖추게 하려는 원, ⑥ 일체의 불구자로 하여금 모든 기관을 완전하게 하려는 원이 있다.
또 ⑦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무상 보리를 증득하게 하려는 원, ⑧ 일체 여인으로 하여금 모두 남자가 되게 하려는 원, ⑨ 천마(天魔)·외도(外道)의 나쁜 소견을 없애고 부처님의 바른 지견(知見)으로 포섭하려는 원, ⑩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부터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는 원, ⑪ 일체중생의 기갈을 면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려는 원, ⑫ 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훌륭한 옷을 갖게 하려는 원 등이다.
이것이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願)이며, 그 공덕으로 부처가 되었고 또 한량없는 중생의 고통을 없애 준다는 것이다. 이 십 이대원 속에는 약사여래가 단순히 중생의 병고를 구제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의복이나 음식 등의 의식주 문제는 물론 사도나 외도에 빠진 자, 파계자, 범법자 등의 구제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십 이대원 이외에도 극락왕생을 원하는 자, 악귀를 물리쳐서 횡사를 면하고 싶은 자, 온갖 재앙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자들이 약사여래의 명호를 부르면서 발원하면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외적의 침입과 내란, 성수(星宿)의 괴변, 일월(日月)의 괴변, 때아닌 비바람, 가뭄, 질병의 유행 등 국가가 큰 재난에 처했을 때도 약사여래의 본원력을 통하여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한다. ≪약사여래 본원 공덕경≫에 근거하여 약사여래를 신봉하는 약사신앙은 우리나라의 고대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신앙 형태였다.
그의 이름을 외우고 그의 가호(加護)를 빌면 모든 재액이 소멸되고 질병이 낫게 된다는 실리적인 신앙은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강한 설득력과 호소력을 가졌다. 삼국의 전쟁 중 수많은 희생자와 병자를 냈던 상황 속에서 약사여래는 새로운 구원자로 등장했던 것이다. 나아가 선덕여왕이 병에 걸려 의약의 효험이 없었을 때 밀본 법사(密本法師)가 여왕의 침전 밖에서 ≪약사경≫을 염송하여 병을 낫게 했다는 것 또한 약사신앙 유포의 중요한 일면이다.
통일 후의 신라에서는 ≪약사경≫에 대한 연구가 경흥(憬興)과 태현(太賢) 등의 고승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고, 약사여래의 조성이 매우 많았다. 특히, 신라 사방불(四方佛)의 조성에 있어 동방에는 항상 약사여래를 모시는 것이 일정한 신앙 유형으로까지 발전된 사실은 약사신앙이 널리 대중화되었음을 여실히 밝혀 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이와 같은 개인의 평안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위기가 닥칠 때마다 약사 도량(藥師道場)이 자주 개설되었는데, 이 또한 약사의 명호를 외우면 국가의 재난이 소멸된다는 약사여래의 본원에 근거를 둔 것이다. 대표적인 약 사행 법은 7일 동안 팔재계(八齋戒)를 지키면서 주야 6시로 약사여래를 예배, 공양함과 아울러 ≪약사경≫을 49번 독송하고 49등(燈)을 밝히는 것이다.
또 약사여래상 7구를 조성해서 그 상 앞에 각기 49일 동안 7개의 등을 밝히고 5색 당번(幢幡)을 49척쯤 되게 만들어 걸고 여러 종류의 중생을 방생하면 여러 가지 질병의 위험을 면한다고 한다. 국왕이 그 나라에 유행하는 질병이나 외적의 침입 등 재난이 있을 때도 위와 같이 행하면 재난이 소멸되고 국토가 평안해진다고 한다.
또, 선남선녀가 약사여래상을 조석으로 모시어 꽃을 뿌리고 향을 사르면 장수하게 됨은 물론 부귀와 관위(官位)를 얻게 된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 사찰에는 이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 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모신 약사전(藥師殿)을 부속시키고 있어 약사신앙의 통속성을 대변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약사여래 본원 공덕경(藥師如來本願功德經)』
「약사여래(藥師如來)」(이종익, 『불교사상』 3, 19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