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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Oct 04. 2021

1. 우리들의 고향





1. 우리들의 고향




째깍째깍째깍, 나의 가슴속에서 시계 소리가 들린다. 쿵쿵쿵, 나의 심장 속에서 북소리가 들린다. 슥삭슥삭슥삭 반월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2017년 12월 22일 동지에 나의 심장은 멈추어 대대적인 수술을 받았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심근증’이었다. 1990년 6월 8일에도 내 가슴은 열리고, 나의 심장은 멈추어 ‘대동맥판막하협착증’이란 병명으로 수술을 받았으니, 나의 심장은 이렇게 두 번 죽고 세 번 살아났다.


나는 심장 전문가는 아니지만 50년 넘게 심장병과 함께 살다 보니 심장에 대한 각별한 지식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의학계에서는 나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심장질환에 대한 정의를 최근에 내린 듯하다. 내가 1차 수술을 받을 당시에는 ‘비후성심근증’ 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대동맥판막하협착증’ 이라고 하였다. “대동맥 판막 아래쪽에 선천적으로 혹이 있어서, 좌심실에서 대동맥으로 나가는 출구가 좁아져 있습니다. 그래서 온몸으로 나가는 피의 양이 적어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유발하고 있으므로 그 혹을 떼어내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거기까지 알아내는 데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내가 심장수술을 받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는 ‘비후성심근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그 원인과 증상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의 심장 돌연사의 대부분은 바로 이 ‘비후성심근증’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이 ‘비후성심근증’으로 돌연사하는 장면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특히, 사랑하면 죽는 병으로 알려지게 되어서 각별한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남녀가 함께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들의 몸이 피를 많이 필요로 하는데, 온몸으로 나가는 출구는 좁아져있고 심장은 더욱 힘차고 부지런히 뛰어야만 하는데, 병든 심장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급사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후성심근증’ 환자들은 언제라도 돌연사를 당할 수 있고 갑자기 복상사를 당할 수 있으므로 과로뿐만 아니라 과도한 사랑 또한 자제해야만 한다. 이 병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이라도 무리하지 않고 늘 조심해야만 한다. 그야말로 사랑을 하려면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병이라고 한다.  

   

* 비후성심근증 

정의 ― 좌심실 비후를 유발할만한 대동맥판막 협착증이나 고혈압과 같은 다른 증세 없이 좌심실 벽이 두꺼워지는 심장 질환이다.  ……, 

원인 ― 비후성심근증은 상염색체 우성으로 유전된다. 11개 근절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비후성심근증의 발생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증상 ― 좌심실의 수축 기능이 유지되면서 심부전의 증상이 발생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운동 시 호흡 곤란, 피로감, 앉아서 몸을 굽히지 않으면 숨쉬기가 힘든 기좌 호흡, 발작성 야간성 호흡 곤란 등이 특징적인 증상이다. 협심증과 유사한 특징적인 흉통이 동반될 수 있는데 이는 주로 좌심실의 미세혈관 이상에 의한 허혈 때문으로 생각된다. 실신이나 어지럼증, 두근거림 등의 증상이 부정맥에 의해 나타날 수 있으며, 심장 돌연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심부전 증상은 주로 좌심실의 이완 기능 장애에 의한 것이므로 좌심실 유출로의 폐색이 있는 환자와 없는 환자 사이에 증상의 차이는 별로 없다.    



앞에서 인용한 의학정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일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의 직접 당사자인 나로서는 글자 하나하나가 나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송곳이거나 칼로 다가온다.


이 심장병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이다.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한 병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니까 내가 아마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으면 나의 병은 태어나면서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골에서, 그것도 지질히도 못 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심장병의 경우에는 대부분 청진기만 대어 봐도 이상 유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이다.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하냐고!”라는 대사로 유명해진 <곡성>이란 영화의 무대인 바로 그 곡성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지금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정말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모르고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중학교까지 다녔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곡성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에 나오면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옛날의 곡성역이 그 영화에 나오고 기차마을로 조금씩 알려진 이후에 세워진 표지석이다. 나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삼기천이 흐른다. 비가 많이 오면 삼기천의 물이 집에까지 들이닥칠까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된 다음에 가보니 ‘의동 마을, 원등 1구’라는 이름과 함께 ‘연어의 종착역’ 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 몰라도 꼭 나를 위해서 지어준 이름인 듯, 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살았던 삼기천에서 아직껏 연어를 한 번도 직접 내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이름은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어와 속성이 비슷한 은어는 많이 보았고 많이 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연어와 은어와는 정 반대의 속성을 지닌 장어도 많이 잡아보았다. 연어와 은어는 강에서 태어나고, 연어는 먼바다에서 살고 은어는 가까운 바다에서 살다가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서 새끼를 낳고 죽는다. 하지만 우리들이 민물장어라고 말하는 뱀장어들은 강에서 태어나지 않고 모두가 바다에서 태어난 놈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어와 은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장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민물에서 자라는 민물장어들의 산란 장소를 아직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 필리핀 인근의 깊은 바다에서 짝짓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700~1,200만 개의 알을 낳고 죽는다고 알려져 있다. 알은 부화하여 렙토세팔루스라 불리는 버들잎 모양의 유생기를 거쳐 실 모양의 어린 실뱀장어로 탈바꿈하며, 2~5월 사이에 무리를 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민물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다.  

  

*뱀장어

민물장어는 뱀장어라고 한다. 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뱀장어는 뱀장어목 뱀장어과에 속하는 민물고기로, 장어류 가운데 유일하게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올라가 생활하는 회류성 어류이다. 그러나 다양한 서식환경과 염분농도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때로는 일생을 강이나 바다 어느 한쪽에서만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들이 식용으로 소비하는 뱀장어는 주로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실뱀장어를 그물로 잡아 양식을 통해 얻으며, 여름철 스태미나 음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몸에는 타원형의 미세한 비늘이 있지만 살갗에 묻혀서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래턱이 위턱보다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등지느러미와 뒷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끝이 뾰족하며, 배지느러미는 없다. 옆줄에 있는 감각공(감각을 느낄 수 있는 구멍)이 뚜렷이 보인다. 몸 색깔은 사는 장소나 시기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난다. 민물에서 바다로 이동할 때에는 짙은 검은색으로 변한다.

따뜻한 민물에서 살며, 육식성으로 게, 새우, 곤충, 실지렁이, 어린 물고기 등을 잡아먹는다. 낮에는 돌 틈이나 풀, 진흙 속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에 움직이는 야행성이다. 간혹 밤에 뭍으로 올라와 이동한다는 보고도 있다. 물의 온도가 낮아지면 굴이나 진흙 속에 들어가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다시 활동한다. 수컷은 3~4년, 암컷은 4~5년 정도 지나면 짝짓기가 가능해지고, 8~10월에 짝을 짓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다. 이때에는 생식기관이 발달하고 소화기관이 퇴화하면서, 굶은 상태로 산란장소를 찾아 이동한다. …,   

 



내가 나의 고향집이라고 말하는 그 집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식구들이 직접 지은 집이다. 마을 뒷산인 심산에서 소나무를 베어와 껍질을 벗기고 대패질로 다듬어서 서까래로 쓰고, 그전에 살던 집 뒤꼍에서 자라던 거대한 미루나무를 잘라 대들보와 상량 목으로 만들어 올렸다. 그 집은 마당이 손바닥만 한 아주 작은 집이고 우리 식구들의 첫 번째 우리 집이었다.


그 우리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삼기천 바로 맞은편 둑 너머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하천 국유지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기천을 경계로 하여 면소재지 쪽이 원등리이고 맞은편 마을이 월경리였다. 원등리는 삼기천과 바로 붙어 있었으며 1구에서 5구까지 마을 다섯 개가 모여 있었고, 월경리는 삼기천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호남고속도로 공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래 방천에 붙어있는 왕산을 깎아내리는 공사가 가장 큰 난공사였는데 그곳에서 가져온 나무뿌리로 뿌리 탁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포클레인이 없어서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에 가로로 장착된 긴 쟁기 삽날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이어서 더욱 공사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 불도저는 그 후로도 가끔 신작로 흙길을 판판하게 다듬어주는 공사도 하였다. 요즘에는 대부분 포클레인으로 흙을 푹푹 파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분 쟁기 형식으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였다. 그러니 그 큰 산을 밀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공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호남고속도로는 월경리 쪽에 붙어 있었다. 또한 월경리는 1구와 2구가 있었는데 2구는 더 깊은 산속에 뚝 떨어져 있어서 따로 ‘행경’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언제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삼기천 둑 공사를 하면서, 물길을 반듯하게 만들면서 둑 너머에 공터가 좀 생겼던 모양이었다. 정미소를 하시다가 잦은 고장과 큰 사고로 망한 아버지께서 그 공터에 불법으로 대강 슬레이트 지붕을 올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집은 외딴집이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월경리에 속해 있었지만 거리상이나 생활상의 영역은 원등리 1구에 더 가까운 생활권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고향집과는 징검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그 옛날 집터도 둑 높이까지 매립이 되어 그 위에 새로운 남의 집이 지어져 있다.    




나의 기억은 징검다리 건너 그 옛날 집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나는 또 그전에 살았던 ‘행경’이란 마을에서 정미소를 할 때 태어났다고 들었다. 원등리 2구에 있는 좀 큰 정미소에서 망하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아주 작은 정미소를 하였는데 바로 그때 내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너무 순진하여 다 썩은 정미소를 인수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완전 거지가 되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늘 그 방앗간을 소개해주신 김재원 아재를 원망하셨다. 중간에서 돈도 많이 떼어먹고 또 발동기가 고장 나면 고쳐준다면서 또다시 속이기를 반복했다며 평생 원망을 하시며 사셨다. 하지만 나는 행경에서의 생활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좀 자란 다음에 혹시 기억이 날까 싶어서 가끔 행경리에 가 보았으나 그때는 이미 방앗간도 없어져서 보이지 않았고 나의 잃어버린 기억도 찾을 수 없었다. (가끔 꿈처럼 보이는 모습이 있다. 벽도 반듯하지 못한 아주 작은 방에서 방바닥에 세숫대야를 놓고 빗물을 받는 모습인데 혹시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마당뿐만 아니라 집 전체가 깊은 외딴집에서는 많은 기억들이 흘러넘친다. 마당의 높이는 둑 너머 삼기천 바닥과 같았다. 그러니까 둑이 무너지면 외딴집은 바로 물에 잠기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우리 식구들은 그렇게 위험하고 외로운 집에서 꽤 오래도록 쓸쓸하게 살았다. 그 시절 어머니는 튼튼하고 커다란 미원 박스에 각종 생활용품을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시며 장사를 하셨다. 먼 마을까지 다니시는 바람에 밤늦게 돌아오시기 일쑤였고 다음날 돌아오시는 날도 많았다. 내가 아기였을 때에는 나를 등에 업고 머리에 봇짐을 이고 다니셨다고 하셨다. 멀리 장사를 나갈 때에는 잠자리가 불편하여 가장 힘이 들었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비교적 잘 울지 않아서 다행이었으나 동생은 잘 우는 바람에 주인집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먼 밖으로 나가 동생을 안고 많이 울기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장마철에는 둑이 자주 무너지기도 하였다. 월경리로 건너가는 다리 아래쪽이 자주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무서운 물길은 넘어와 흙탕물이 우리 집을 덮쳤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들은 원등리 1구 회관으로 피신하여 며칠씩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외딴집에는 대문도 없고 담장도 없어서 아무라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특히 월경리에 사신다는 ‘꽃 본 듯이’라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밤마다 우리 집 마루에서 남몰래 주무시는 바람에 많이 무서웠다. 그 할아버지는 정신이 좀 이상해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나에게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동네 청년들에게 끌려가 산에서 얻어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서 좋았는데 그때부터는 다시 동냥아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팔이 없거나 눈알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쇠갈쿠리 손을 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불쌍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저 무섭기만 하였었다.


그리고 집들이 함께 모여 있는 동네에는 이미 전기가 들어왔는데 외딴집이었던 우리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불법건축물이어서 전기 신청도 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때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날마다 징검다리를 건너 다니며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원등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월경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하였다. 나의 위치와 소속이 애매해서 나는 외톨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짐승들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특히 물가에서 사는 바람에 오리를 많이 길렀다. 오리뿐만 아니라 닭과 토끼와 염소 그리고 나중에는 돼지와 소와 말까지 길렀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오리가 한 마리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오리는 낮에 냇물에 나가서 먹이를 잡아먹고 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알도 낳고 잠도 자고 또다시 새벽에 물가로 나가 놀았다. 오리는 닭보다 훨씬 빨리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자꾸만 동네 사람들을 불러와 오리를 잡아서 함께 드시기 시작하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빨래 줄에 오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오리 피가 몸에 좋다고 오리를 산 채로 빨래 줄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목을 잘라서 오리 피를 그릇에 받아내고 계셨다. 그때 정말 화가 많이 났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많이 울었다. 


그리고 또한 어느 날 아침에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내가 사서 내가 기른 돼지를 잡아가버렸다. 전날 밤에 아버지께서 노름판에서 내 돼지를 잡히고 돈을 빌려 노름하다가 다 잃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 많은 이야기들은 평생 말해도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지게질을 하였다. 물론 꼴 베기와 나무하기는 그전부터 하였다. 내가 지게질을 시작하면서 짝사랑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남몰래 선생님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짝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선생님께서 여름방학 때 여수 오동도 앞바다에서 돌아가셨다. 오동도 앞바다 붉은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사랑의 행복이 아니라 이별의 아픔으로 끝장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달리기를 잘하지 못했다. 진돌이 놀이도, 나이 먹기 놀이도 잘하지 못했다. 조금만 달려도 왼쪽 가슴이 아팠다. 가슴이 아파서 잘 달릴 수 없었다. 처음에 나는 내 몸이 허약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몸을 튼튼하게 하려고 밤이면 학교 운동장에 가서 남몰래 달리기 연습을 하였다. 나는 누구에게든지 말을 잘하지 못했다. 나는 철저한 외톨이였다. 나는 내 몸이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참 바보 멍청이였다.


나는 체육 책에서 읽었다. 나처럼 왼쪽 가슴이 아프면 심장병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를 체육 책에서 읽었다. 나는 그때 나의 예금통장이 따로 있었다. 누나와 형들이 돈이 없기 때문에 중학교도 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꼭 내 힘으로 중학교를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오리를 기르고 토끼를 기르고 겨울이면 산에서 산토끼도 잡고 꿩도 잡아서 팔았다.


나는 나의 통장에서 돈을 찾아서 곡성 읍내 병원에 남몰래 혼자 찾아갔다. 늙은 의사 선생님께서 내 왼쪽 가슴에 청진기를 대어보시더니 바로 심장병이라고 말씀하셨다. 심장 뛰는 소리만 들어봐도 잡음이 많고 심장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틀림없이 선천성 심장병이라고 단언하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광주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온몸이 축 쳐지고 말았다.


나는 며칠 후에 또다시 남몰래 광주까지 가서 검사를 받았다. 선천성 심장 판막증이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치료 방법은 없다고 하셨다. 심장 판막증은 무조건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비가 엄청 비싸다고 하셨다.


나는 이렇게 내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 가난이 나의 입을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한 누나가 흑백텔레비전을 사 오셨다. 그 당시에는 수사반장과 수사본부, 그리고 전우와 타잔이 인기였다. 그런데 나의 눈에는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이 너무 자주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님께서 어린이 심장재단을 만들어 홍보하던 시절이었다.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을 외국으로 데려가서 심장수술을 시켜 건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오는 화면이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화면을 볼 때마다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 홀로 먼 들판으로 뛰어나가 홀로 펑펑 울었다. 그러면 나를 내려다보던 별들도 눈가에 눈물이 함께 맺혔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의술이 발전하지 못해서 심장수술 성공률도 높지 않았다. 그리고 의료보험도 되지 않아서 수술비용이 엄청 비싸다고 하였다. 집안에 심장병 환자 하나 있으면 집안이 망할 정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홀로 결심했다. 더 이상 망할 것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우리 집 형편으로는 도저히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이 아파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어서 수술을 시키지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어떨까? 어쩌면 심장이 아픈 나보다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이 더욱 아프고 안타까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철저히 비밀로 하는 것이 더 좋겠다. 나 혼자 남몰래 아프다가 홀로 사라지면 남은 가족들은 그래도 나를 잊고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바보 같은 결심을 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심장이 아픈 것보다 오히려 나의 심장병을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했다. 하지만 내 몸이 자라면서 내 몸은 더 많은 피를 요구했고 나의 병든 심장은 더욱 힘들어했다. 나는 계단이 점점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한꺼번에 오르지 못하고 계단 중간에서 쪼그려 앉아 쉬어야만 했다. 계단을 오르다가 쪼그려 앉아 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심장병 환자들이 많다. 심장병 환자들은 앉아서 몸을 굽히지 않으면 숨쉬기가 힘든 기좌 호흡이라는 것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내가 직접 돈을 벌어서 수술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께서 꼭 고등학교는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라며 원서까지 직접 써 주셨다. 학비뿐만 아니라 기숙사비도 모두 무료이고 옷이며 신발까지 모두 무료인 학교라고 하셨다. 그렇게 입학 한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는 나의 삶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그 당시 한국전력공사에서 운영하는 수도 전기 공고를 비롯하여 철도공사에서 운영하는 철도 공고 그리고 구미전자공고 등이 있었다.   

 



나의 서울 생활은 강남에서 시작되었다. 주위가 온통 배 밭이었던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은마아파트에서 걸어가면 중간에 일본인학교 딱 하나만 있었다. 학교 뒤에는 대모산이 있었고 앞에는 구룡 마을과 개울이 있었다. 배 밭 주위에는 작은 시골마을이 있었는데 비만 오면 우리 학교 강당으로 대피해 와서 며칠씩 지내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실습 위주의 공업학교 생활보다 오히려 기숙사 생활이 더 힘들었다. 완전히 군대식이었다.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도 무섭고 선배들이 무서웠다. 바로 위층에는 1년 선배들이 있었는데 난방용 스팀라인을 두드려 신호를 보내면 우리들을 언제라도 바로 뛰어올라가야만 했다. 선배는 그야말로 하늘이었다. 선배는 타오르는 태양이었고 후배는 꺼져가는 촛불이었다. 커다란 돌에 ‘면벽 삼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우리는 3년 동안 “나 하나는 수도의 전부다”라는 구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 특히 매일 밤마다 있었던 저녁 점호 시간이 가장 긴장되고 힘이 들었다.


모기가 물어도 움직일 수 없고 등이 가려워도 긁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먼지 하나라도 발각될까 봐 잔뜩 겁먹은 얼굴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저녁 점호를 무사히 받기 위해서 방 청소를 꼼꼼하게 하고 사물함 정리를 아무리 잘해도 중대장과 대대장들은 꼭 하나씩 지적을 하였다. 방문 바로 옆, 벽을 등지고 복도에 줄 서 있던 우리들은 엎드려뻗쳐를 해야만 했다. 특히 사물함의 이불뿐만 아니라 런닝과 팬티 그리고 양말까지 모두 사각으로 각이 맞지 않으면 우리들은 어김없이 지적을 당하고 기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은 아예 사각으로 만들어 꿰매서 점호 때마다 사물함에 놓고 실제로 입거나 신는 속옷과 양말은 가방에 숨겨놓곤 하였다. 


우리들은 또한 밤낮으로 자주 운동장으로 불려 나갔다. 자정에 운동장에 모여 운동장 흙바닥에서 굴러야만 했다. 우리 전교생은 새벽마다 운동장에 모여 대치동에서 오신 태권도 사범의 구령 소리에 맞추어 새벽하늘이 놀라 깨어나도록 힘차게 기합을 넣으며 태권도를 해야만 했다. 새벽 운동이 싫어서 캐비닛에 숨어 있다가 사감 선생님께 걸려 벌점과 함께 심하게 혼이 나는 일도 많았다. 


거기가 바로 서울 강남의 개포동이었는데 우리들은 개도 포기한 동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땅에 파일을 쿵쿵쿵 박기 시작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개포동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유명한 고등학교들이 이사 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개들도 수표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자 동네로 바뀌고 말았다.  

  

나는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의 꿈이 바뀌었다. 고향을 떠나니 고향이 더욱 그리웠다. 나라를 떠나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고 하더니 고향을 떠나니 지지리도 못 살고 도망치고 싶었던 고향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교과서 외에는 잘 읽을 수 없었던 많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밤 점호가 끝나면 우리는 모두 소등하고 강제로 잠을 자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몰래 방과 복도를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별이 빛나는 밤마다 나는 그렇게 옥상에서 달빛으로 책을 읽었다. 나는 그렇게 점점 달빛과 별빛에 젖어 시인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크게 떠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의 꿈은 재벌이 되는 것이었다. 너무나 가난해서 그런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시야가 좀 넓어지고 나 자신을 깊이 돌아보니 재벌보다는 시인이 더 어울릴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재벌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와 결탁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재벌이 되지 못할 것 같아서 아예 나의 꿈을 바꾸고 말았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꿈을 바꾸었다. 그리고 또한 나의 꿈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밤새 코피를 흘린 일이 있었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한 방에 여섯 명씩 함께 살았다. 그렇게 열 개의 방에 60명의 한 반이 살았고 한 과는 두 개의 반이었다. 그리고 다섯 개 과가 있었다. 그런 기숙사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초저녁부터 코피가 나오기 시작해서 밤새도록 멈추지 않았다. 베개와 이불이 다 젖도록 많은 코피를 흘렸다. 기숙사와 학교가 함께 있었는데 양호실은 도서관 옆에 있었다. 낮에는 양호실에 간호사가 있었지만 밤에는 양호실 담당 학생들만 있었다. 그 학생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그래서 3학년 형이 밤새 나를 간호해주셨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함께 지내고 나서 나는 그 형님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는데 그 형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 형님은 유행성출혈열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죽음을 계기로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꿔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몇몇 친구들을 모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긋니’라는 동인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시집을 읽고 인문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일장에도 나갔다. 우리들의 모토는 하나였다. “공돌이도 시를 쓸 수 있다.” 우리들은 그렇게 공돌이 시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의 시를 모아 동인지도 만들었다. 동인 중에 글씨를 잘 쓰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가 우리들의 시를 백지에 직접 쓰고 삽화를 그렸다. 그리고 나는 대학가 복사기 있는 집에 가서 책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공고에서 공돌이가 되어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문학 병은 그렇게 더욱 깊어졌다. 나는 나의 심장병을 잊을 정도로 깊숙이 문학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다. 심장병 대신 문학병 환자가 되었다. 그 당시 나의 별명은 ‘원로시인’이었다. 내가 좀 노티 나게 시를 쓴다고 하여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에게 나의 별명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자연과 함께 자연인으로 살고 싶으니까 차라리 ‘원시인’이라고 바꿔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글자 하나를 지우고 원시인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시(詩)는 절(寺)에서 하는 말씀(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절로 들어갔다. 해인사로 갔다. 해인사에서 참선과 절을 배웠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해인사 위에 있는 성철스님이 계신다는 백련암 가는 길이었다. 해인사를 막 빠져나와 산을 오르는데 처음 보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곳은 스님은 스님이되 스님 같지 않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자포자기를 한 스님들 같았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같았다. 내 눈에는 초라한 양로원 같이 보였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큰스님이 되지 못한 스님들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나도 그 스님들처럼 먼 훗날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이미 해인사를 뛰쳐나올 궁리를 하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나의 병든 몸으로는 수행이 어려울 것만 같아서, 참선을 할 때에도 그렇고 108배를 할 때에도 너무 많이 숨이 차서 이미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하산하여 부천에 있는 어느 학생회에 들어갔다. 그 당시에는 그런 복지회가 많이 있었다. 학교는 가고 싶은데 돈이 없는 아이들을 모아 앵벌이를 시키는 곳이었다. 나는 주로 서울역에서 수원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날짜가 지나버린 주간지를 파는 일을 하였다. 그때에는 서울역에서 입장권을 팔았다. 가족이나 친척들을 배웅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입장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입장권으로 기차에까지 올라탔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수원역까지 가는 동안 철 지난 주간지를 팔았다. 그때는 홍익회 직원들이 가장 무서웠다. 그 당시 기차에는 홍익회 직원들이 언제나 있었다. 기차 안에서 수레를 밀고 다니며 계란도 팔고 김밥도 팔고 음료수도 팔고 주간지도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불법적으로 몰래 장사를 하는 고학생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 주간의 정식 새 주간지를 팔았고 나는 철 지난 주간지를 팔았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장사꾼이 아니라 앵벌이 꾼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홍익회 직원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렇게 홍익회 직원에게 잡혀 실컷 혼나고 수원역에 내렸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유난히 슬프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남은 주간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학생회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나는 인력시장으로 나가 일당벌이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헌책방에서 <문예중앙>을 읽었다. 이능표 시인과 이창기 시인의 시가 실려 있었다. 신인상을 받은 작품이 실려 있었다. 시들이 참 좋았다. 나도 그 진짜 시인들처럼 진짜 시를 잘 쓰고 싶었다. 약력을 보니 두 시인 모두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출신이었다. 나도 그 학교를 나오면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직접 용기를 내어 그 학교로 찾아갔다. 문예창작과 교수실에 최인훈 교수님과 오규원 교수님이 계셨다. 나는 꼭 이 학교에 입학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학력고사 시험을 보고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꼭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소설은 쓰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나는 소설은 거짓말이라서 쓰고 싶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는 시를 쓰고 싶다는 대답을 하였다.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대답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1986년에 서울 남산에 있는 서울예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마도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바로 그 남산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하루 24시간을 온통 시만 생각하고 시만 썼던 시절이었다. 물론 최인훈 교수님과 최창학 교수님의 소설 수업시간에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윤대성 교수님의 희곡 수업 시간 또한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시를, 2년 동안 4년 치의 수업을 들었고 천 편도 넘는 시를 썼다.


1학년 때에는 이근배 교수님께 시를 배웠는데, 다른 반 수업인 최하림 교수님 수업을 도강하고 2학년 수업시간에 들어가 오규원 교수님 시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도강하는 줄 아시면서도 너그럽게 눈감아 주셨다. 그리고 2학년 때에는 당연히 오규원 교수님 시 수업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들었으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1학년 교실에 들어가 또다시 시 수업을 도강하였다. 그리고 하숙집에 돌아와서도 책을 읽거나 시 쓰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두꺼운 개인 시집을 복사하여 만들었고 많은 상을 받았지만 특히 오규원 교수님께서 직접 뽑아주신 예장 문학상에 당선되었을 때 가장 기뻤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도 있었다. 나는 2학년 2학기 수업을 듣지 못했다.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전력 공사로부터 최후통첩을 받고 잠시 고민하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한전 장학생으로 나왔는데 졸업 후에 한전에 입사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깊은 문학 병에 걸려 한전 입사를 포기하고 시인의 길을 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졸업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가을까지 한전에 입사하지 않으면 입사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조치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과 의논한 결과 수업을 듣지 않아도 리포트를 제출하면 졸업시켜줄 테니 한전에 입사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동안 도강한 것들 합치면 수업일수가 넘칠 정도이니 그렇게 하라고 배려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1987년 가을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한전에 입사하게 되었다. 한전 연수원에서도 나는 발전소 교육보다 학교에 제출할 리포트를 쓰고 시를 쓰느라 바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오직 시만 썼던 시간들이 어느 한 편으로는 아쉬웠다. 그렇다고 친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친한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여름방학 때 그 친구들 집에 함께 놀러 갔던 기억이 참 오래도록 남아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선명하다. 전라도 장수면의 면장 아들이었던 홍이표 집에 갔을 때도 좋았고 소록도를 지나 어느 섬에 살았던 한경은 친구 집에서의 하룻밤도 참으로 좋았다. 나는 그 섬에 들어가면서 생전 처음으로 배를 타 보았다. 자동차도 함께 싣고 섬으로 들어가는 도항선을 탔는데 그림으로만 보았던 배들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배가 거꾸로 가는 줄 알았다. 모든 배들은 언제나 앞이 뾰족한 줄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된 「길이 있는 풍경」을 이때 썼다. 홍이표네 집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 집 바로 곁에 있었던 고추밭에서 썼다. 그리고 그날 아침부터 덕유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올라가서 보았던 덕유산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동안 심장이 아파서 높은 산을 오르지 못했는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무슨 용기가 생겨서 덕유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아래쪽에서 양 떼 같은 구름들이 산 정상을 향해 기어서 올라오는 모습들에 나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서울 한전연수원 교육을 마치고 나는 첫 발령을 호남화력발전소로 받았다. 여수에 있는 발전소였다. 아니, 그 당시에는 여천이었고 여천공단에 있었다. 나는 커다란 트렁크 가방을 들고 전라선 종착역에 내렸다. 겨울 새벽이었다. 택시를 타고 발전소에 가자고 했는데 내리고 보니 여수화력발전소 정문이었다. 여수에 발전소가 두 개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나의 잘못인지 택시 기사의 잘못인지 기억에 없지만 하여튼 나는 첫날부터 헤매고 말았다. 나는 여수화력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침 퇴근버스를 타고 사택으로 갔다. 그 당시 발전소 사택은 여수화력과 호남화력 그리고 한전 여수지사와 지점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한전에서 발전소가 분리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한 식구였다.


나는 그렇게 여수에서의 생활을 서툴게 시작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여수에는 여수화력과 호남화력 이렇게 두 개의 발전소가 있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여수가 아니라 여천이었다. 그리고 사택은 쌍봉동 한 곳에서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발전소가 한전에서 따로 분리되기 전이어서 발전소뿐만 아니라 지점과 지사 사람들도 같은 사택을 함께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지사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월급은 용돈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월급 외로 들어오는 돈이 많아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있다.


다음날부터 호남화력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신입사원들은 처음에 교대근무에 투입되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오히려 교대근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경력이 어느 정도 쌓여야만 정상적인 일근 근무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교대근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근무를 한다는 것은 생체리듬에 맞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야간근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표를 내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왕에 입사를 했으니 딱 3년만 다니고 그만 두기로 작정을 했다. 한 3년 정도 다니면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심장병과 이별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장수술이 실패를 한다면 나의 운명은 그렇게 끝날 것이지만 만약 수술이 성공한다면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걸어갈 작정이었다.


호남화력에서 조금 근무를 하다가 또다시 삼천포화력 연수원에서 발전소 실무교육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지금은 태안화력 발전소에 발전연수원이 있지만 ― 얼마 전에 숨진 고(故) 김용균(25)씨가 일하던 바로 그 발전소 ― 그 당시에는 삼천포화력에 발전 연수원이 있었다. 발전연수원은 아마도 얼마 있으면 대전으로 한 번 더 이사를 할 모양이다. 나는 삼천포에서 한 3개월 정도 교육을 받은 것 같다. 그렇게 짧은 삼천포 생활을 마치고 다시 여수로 돌아가 본격적인 여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수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바람이었다. 한 시도 가만히 앉아서 쉬어보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쓰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손으로 쓰는 시가 아니라 발로 쓰는 시가 진짜 시라고 생각했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홀로 싸돌아다녔다. 바람처럼 싸돌아다니는 날파람 둥이였다.


나는 여천시 쌍봉동에서 살았다. 하지만 나는 여천시를 벗어나 주로 여수시 쪽을 돌아다녔다. 물론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여천 쪽도 많이 돌아다녔다. 한하운 시인처럼 문둥병(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산다는 신풍애양원을 비롯하여 사화복지 시설이었던 동백원도 자주 들락거렸다. 그리고 소호동 바닷가를 비롯하여 소라면 바닷가를 많이 걸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선소마을과 날마다 찾아가던 바닷가의 언덕 또한 나의 산책코스였다.


회사에 가지 않고 쉬는 날에는 주로 여수시로 나갔다. 그 먼 길을 걸어서 다녔다. 그 당시에는 길이 좀 단순했다. 여천시에서 여수시에 가려면 윗길과 아랫길이 있었다. 나는 주로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왔다. 버스 노선도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오는 노선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주로 걸어서 돌아다녔다.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걸어 다니곤 하였다. 숨이 차서 한꺼번에 걸을 수 없으니 자꾸만 쉬면서 다녀야만 하였다. 내가 주로 다니는 곳은 여수항과 서시장 그리고 여수역과 자산공원이었다. 그리고 여수 어항단지와 돌산대교 등도 부지런히 싸돌아다녔다.


회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밤낮없이 여수항 부근에 나타나서 자꾸만 무엇인가 메모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다니는 바람에 나는 간첩으로 오인받아 파출소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철저히 미쳐 있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길에서 시를 찾아 헤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홀로 쓴 시들을 모아 월간지와 계간지에 동시에 투고를 하였다. 월간지에서 먼저 발표하였다. 나는 그렇게 비로소 시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너무 몰랐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의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지 미처 알지 못했었다. 월간지 신인상 발표가 있은 뒤 계간지에서도 연락이 왔다. 계간지에도 신인상에 당선되었으나 이미 월간지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당선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우리나라 문단 상황에 대하여 지금만큼만 알았다면 나는 아마 월간지가 아니고 계간지 신인상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어떻게든 시인만 되면 다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시인만 되면 원고 청탁이 줄을 이을 줄로 알고 있었다. 시인은 그저 시만 쓰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문단활동이나 인간관계가 따로 있지 않아도 그저 시인만 되면 무조건 시만 쓰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나처럼 지방에서 홀로 시만 쓰는 시인에게는 그런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나는 시 쓰는 방법만 알았지 진짜 시인이 되는 길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곧 실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문학사상에서는 상패도 주지 않았다. 지금은 바뀌어서 상패도 주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 당시에는 상패도 없고 시상식도 따로 없었다. 그래도 문학사상 신인상은 문단에서 꽤 전통도 있고 권위가 있는 등용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 당시에 그런 것들에 대하여 너무 모른 상태에서 그저 실망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신인상 정도로는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내야겠다, 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동안 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발행하려고 준비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고 당돌한 생각이었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1년도 되지 않아서 시집을 내겠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었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문단을 너무 몰랐고 몰라서 오히려 용감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정리한 시집 원고를 가방에 넣고 문학사상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문단의 상황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문학사상 사무실에 가서 인사를 하고 차를 한 잔 마시고 나는 그냥 나왔다.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시집 이야기는 한 마디 꺼내보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때 시집 이야기를 꺼냈다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나 웃음이 나올 일인가. 신인상 당선되고 1년도 안된 놈이 불쑥 찾아와서 시집을 내달라고 떼를 쓴다고 생각해보면 참으로 당돌한 놈이 아닌가.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으며 어깨가 축 처지고 있었다.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타자를 쳐서 나름대로 시집을 만들었는데 시집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돌아오는 내 모습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컴퓨터가 없는 시절이어서 타자기로 원고 정리를 하였다.) 여수에서 서울까지 그 먼 길을 일부러 찾아갔으면서도 정작 다른 일로 왔다가 잠시 들렀다고 둘러대는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기운이 빠져서 털레털레 길을 걷고 있는데 길가 가판대의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신문에 신춘문예 응모 광고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을 1부 사서 여수로 돌아왔다. 어차피 버려질 원고였는데 차라리 신춘문예에 응모라도 해보자. 그래서 나는 시집 원고 표지만 바꾸어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에 발표한 몇 편의 시들은 당연히 빼고 보냈다. 아마도 신춘문예 사상 이런 응모자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심사평도 이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같은 해 동아일보에 응모했던 다른 분들께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렇듯 생뚱맞게 응모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좋은 시인이 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최종심에 올랐던 다른 분들의 심사평 한 줄 없었으니 내가 많이 야속했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심사평 ― 두 심사위원은 별다른 이견 없이 배진성 씨를 당선 시인으로 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는 두 권 정도의 시집이 될 만한 작품을 투고하였다. 오히려 어려움은 이 많은 작품 가운데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하느냐 하는 데 있었다. 결국 ‘길이 있는 풍경’과 ‘밤하늘은 반란이다’ 두 편을 골랐지만, 이 선정은 필연성이 있는 것이라고 자부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는 것은 배진성 씨의 작품이, 많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매우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시는 오늘의 범람하고 몽롱하고 막연한 서정시나 비분강개의 시의 언어에 비하여 괄목할 만한 탄탄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가 오늘의 현실 ―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서정이나 판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느낌과 판단에도 흐릿함이 있고 탄탄함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수가 많은 만큼 또 고른 수준의 것인 만큼 그의 시가 믿을 만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수준의 한계가 이미 다 드러나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수준이 가장 바람직한 폭과 깊이, 무엇보다도 오늘의 수다스러운 시 세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상과 표현의 압축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심사위원 / 김우창, 신경림   

 



나는 이렇게 우연히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그 덕분에 첫 시집을 빨리 낼 수 있게 되었다. 신춘문예 심사를 맡으셨던 김우창 교수님께서 내가 응모했던 원고를 민음사로 넘기셨던 것이다. 그 당시에 김우창 교수님께서 민음사와 많은 관련이 있었던 탓에 그렇게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민음사와의 인연이 닿게 되었다. 글이나 시집은 따로 타고난 운명이 있는 듯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우연히 좋은 인연이 많이 찾아왔지만 나는 그 좋은 인연들을 나의 것으로 완전히 붙잡지는 못했다.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시를 쓰려면 먼저 대학교수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수가 되어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좋은 제자들도 많이 길러내야만 비로소 시인으로 바로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 생각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학 교수가 가장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출판시장과 문단 풍토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대학교수가 꼭 좋은 시인은 아니지만 확실히 좋은 조건에서 시인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확률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고 사회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꼭 대학 교수가 아니어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고 또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발전하여 독자적인 방법으로 독자들을 끌어 모을 수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대학교수가 가장 확실하고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교수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대학교수가 되려면 대학원에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방송대학에 편입을 하였다. 우선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내 몸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의 심장병이 나를 가만 놔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의 소망은 30살까지 버티는 것이었는데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서른 살까지만 살 수 있어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몸은 도저히 서른 살까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몰래 쓰러지는 횟수가 늘어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시집은 한 권 내었으니 덜 억울할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남몰래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수술을 미룰 수 없을 만큼 몸이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전남대학교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병원에서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였다. 때마침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치료비도 많이 저렴해졌으며 또한 심장재단 덕분에 심장수술 성공률도 많이 좋아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심장 수술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고향 집에 들렀다. 고향 집에는 아버지께서 늘  아랫목에 누워계셨다. 젊은 시절 방앗간 천정에서 떨어진 이후로 후유증 때문에 언제나 아버지 등은 구들장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나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길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잘 아는 동네 어르신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분께 돈을 드리며 내가 떠난 다음에 아버지께 개를 한 마리 잡아 드리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출장을 가기 때문에 당분간 연락을 드리지 못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말씀드리고 광주로 떠났다. 그렇게 나는 홀로 광주로 가서 전남대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심장판막 교체 수술을 하기 전에, 좀 더 간단한 시술을 먼저 한 번 해보자고 했다. 나의 대동맥판막이 지금 잘 열리지 않기 때문에 먼저 풍선 확장 시술을 한 번 시도해보자고 하였다. 그 당시에 막 개발되어 시험 중인 시술법이었다. 우리 인간들의 대동맥은 심장에서 시작하여 양쪽 허벅지 안쪽으로 지나간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가장 굵은 대동맥이 바로 그 핏줄이라는 것이었다. 풍선 확장 시술은 카테터라고 하는 관을 환자의 혈관 안에 삽입하여 주로 좁아진 혈관을 넓혀주는 시술인데, 이 시술 방법을 응용하여 심장 판막 확장에까지 이용하는 시술법이다. 나의 경우는 왼쪽 사타구니 쪽에 구멍을 내어 대동맥을 따라 관을 집어넣어서 대동맥판막까지 접근하게 한다. 그 관 안에는 작은 풍선이 달려 있다. 대동맥판막은 세 개의 조각으로 되어 있어서 그 조각들이 열렸다가 닫혔다가를 반복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열릴 때에 세 조각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서 덜 열리기 때문에, 붙어 있는 날개 안쪽을 강제로 더 찢어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대동맥판막 쪽에 풍선을 위치하게 한 다음, 그 풍선을 순간적으로 확 불어주면 자연스럽게 세 조각의 날개가 잘 분리되어 충분히 열어줄 수 있다는 원리였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내 심장병의 첫 번째 오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오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날 밤 나에게 벌어진 일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풍선 확장 시술을 받기 전날 밤에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나의 심장병이 다른 가족들에게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시술받기 전날 밤에 주치의가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풍선 확장 시술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광주에 사는 누나에게만 조심히 전화를 하였다.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나의 심장병에 관한 사실들을 누나에게만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시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시술 도중에 잘못되면 병원 측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보호자 동의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다른 가족들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아 달라는 나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곧 누나가 병원으로 달려왔고 시골에 계시던 어머니께서도 병원으로 달려오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혹시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한 것으로 알고 달려오셨던 것이었다. 서울에 출장 가겠다고 떠난 자식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온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20년 넘게 홀로 앓아오던 나의 심장병을 가족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큰 충격을 가족들에게 안겨주고 시술 동의를 받고 다음날 무사히 풍선 확장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술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오진이었으니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며칠 후에 개복수술을 하여 대동맥판막을 인공판막으로 교체하기로 하고 수술 날짜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여수 직장 동료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와서 혈액검사를 하였다. 수술하는 날 직접 와서 피를 뽑아주겠다는 사람들이었다. 미리 뽑아놓은 피보다 그날 바로 뽑아서 수혈하면 더욱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그렇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찾아온 동료들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나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다가 나보다 먼저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문제가 생겼다. 나와 같은 병으로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그런데 그 환자가 그만 죽고 말았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회복실에서 그만 잘못되고 말았다. 마취가 풀리면서 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그만 인공호흡기가 빠져버리고 말았다. 곁에서 당직의사나 간호사가 착 달라붙어서 지켜보아야 하는데 그만 자리를 잠시 비우고 말았다는 것이다. 환자 곁에 아무도 없는 사이에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마구 흔들어대는 바람에 인공호흡기가 빠졌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그만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그 환자의 가족들은 바로 다음날부터 병원 마당에 텐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가고 말았다. 죽은 아들을 살려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하는 바람에 병원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래서 수술을 담당했던 흉부외과 의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다른 환자들의 수술은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마침 그 병원에 먼 친척 되는 의사가 있었다. 그 의사 덕분에 나는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도 곁에서 나와 같은 처지의 환자가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전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나의 목숨을 허술한 그곳에 맡길 수 없었다.


나중에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만약에 내가 그때 전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면 멀쩡한 대동맥판막을 떼어내고 인공판막으로 교체할 뻔했다. 그렇게 했더라면 병은 치료도 되지 않고 멀쩡한 부분만 인공판막으로 바뀔 뻔하였다. 생각만 하여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정밀검사를 다시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대동맥판막은 멀쩡한 상태였다. 대동맥판막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동맥판막 앞쪽에 혹이 하나 있어서 대동맥으로 나가는 피의 양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나와 같이 혹이 있어서 출구가 좁아진 환자는 많지 않았고 피가 잘 흐르지 못하는 환자들 대부분이 판막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의 경우도 그렇게 생각하고 오진했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와 같은 특별한 케이스가 많이 발견되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비후성심근증’이라고 따로 정의를 내리고 치료법과 수술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전대병원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나는 진료의뢰서를 가지고 서울대학병원에 접수를 하였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의 몸은 심각할 정도로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동안 비밀이었던 나의 심장병이 가족들에게 들켜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나의 예상대로 가족들은 모두 걱정이 태산이었고 가족들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생각에 나의 몸과 마음은 급속도로 더욱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무작정 회사에 휴가를 내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응급실로 입원을 하였다. 그때는 이미 잘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나를 수술할 의사 선생님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주 젊은 의사 선생님 이셨다. 그 당시에는 그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훌륭한 선생님 이셨다. 그 당시에는 아주 젊었지만 실력이 매우 좋은 분이셨다.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실력 있는 의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데 나는 우연히 그렇게 좋은 의사를 만난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분에게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1990년 6월 8일에 1차 수술을 받았고 2017년 12월 22일에 2차 수술을 받았다. 2차 수술을 받을 때에도 우연히 한 번 찾아갔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수술 날짜를 결정하고 바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나의 몸은 그만큼 위험한 상태였으나 나는 모르고 있다가 참으로 운이 좋게도 그분을 다시 만나 이렇게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나도 모르게 돌연사를 당할 뻔했었다. 그분은 나의 수술을 마지막으로 하시고 서울대학병원에서 정년퇴직을 하셨다. 그야말로 그분은 그렇게 나의 하느님이 되셨다.




서울대학병원에 처음 입원해서 나는 감기에 걸렸다. 감기에 걸리면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수술 날짜가 뒤로 미루어졌다. 그 바람에 나는 더 많은 정밀검사를 할 수 있었다. 정밀검사 결과 심장판막증이 아니라 ‘대동맥판막하협착증’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수술방법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원래는 대동맥판막을 인공판막으로 교체할 예정이었으나 대동맥판막은 교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신에 대동맥판막 아래쪽에 있는 혹을 제거하는 것으로 완전히 수술방법이 바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심장 수술이었다. 아마 그때 담당 선생님께서 젊기도 하고 패기도 있고 실력도 있는 의사였기 때문에 그런 수술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좋은 의사를 만나서 판막을 교체하지 않고 심장 속에 있었던 혹 하나 떼어내는 수술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수술을 하고 나니 내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쾌함이었고 가벼움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병 환자로 태어났으니 정상적인 사람들의 몸 상태를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좋았다. 심장병은 수술은 어렵지만 수술이 끝나고 나면 바로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좋은 성과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바로 내가 그랬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야말로 신세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행복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수술을 받고 약 한 달 동안 입원을 하였다. 그리고 퇴원해서는 여수로 내려가지 못하고 인천에서 지냈다. 장거리 여행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에도 자주 가야 했고 또한 나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어서 큰형 집에서 두 달 정도 누워서 지냈다. 2차 수술 때에는 의술이 발달해서 그런지 아니면 가슴을 봉합하는 재료가 좋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개복한 부위를 봉합하는 획기적인 방법이 새로 도입되어서 그런지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한결 쉬워졌음을 실감하였다.


1차 수술 후에는 꼬박 석 달 동안 누워만 있으라고 했는데 이번 2차 수술 후에는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를 번쩍번쩍 들어서 침대를 옮겨주기도 하고 바로 걸어 다녀도 좋다고 하셔서 나는 깜짝 놀라고 어리둥절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수술하고 일주일도 못되어 퇴원을 하라고 하고 심지어는 비행기도 바로 탈 수 있다고 하여 제주도로 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의술이 그만큼 발전한 것인지 그동안 세상이 그렇게 변한 것인지 나로서는 아직까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당시 큰 형은 인하대 후문에 있는 새마을금고 2층에 살고 있었다. 형과 형수는 둘 다 직장에 나가고 나 혼자 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아직 철이 덜 든 조카는 누워있는 나를 자꾸만 밟으려고 하여 마음 놓고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6월 8일에 수술을 하였으니 그렇게 한 여름 3개월을 불안하게 보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그렇게 심장병 수술에 성공하여 25년 만에 심장병과 이별을 하였다. 그런데 참 인생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산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심장병이 떠나고 나니 이번에는 간에 문제가 생겼다. 병원에서 전염이 된 것인지 아니면 형 집에서 전염이 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형과 내가 비슷한 시기에 간염으로 고생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내가 병원에서 옮겨왔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에게 더욱 미안하다. 나는 그 후에 간경화로 진행되었고 인터페론 주사를 맞는 등의 치료를 받아 완치가 되었는데 형은 치료가 되지 않아 결국 간 이식 수술을 받게 되었으니 나는 또다시 본의 아니게 몹쓸 짓을 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 관리를 위하여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으로 발령을 받아서 인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율도에 있는 인천화력발전소에서 근무를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었다. 인간에 대한 치명적인 절망을 맛보게 된 것이었다. 대부도와 황금산과 포도밭과 붉은여우와 사랑과 사기에 대하여는 다음에 다른 글에서 쓸 작정이다. 이 글에서는 다만 한 인간의 바닥을 보았고 나는 그 바닥에게 철저히 짓밟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사실만을 간단히 말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나는 나의 인생을 완전히 포기했고 대학교수가 되려고 입학했던 대학원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에 대한 복수를 위하여 끔찍한 살인을 꿈꾸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나에게는 시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 시는 사랑이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나는 영원히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절망 속에서 허구렁 속을 헤매고 있을 때 나를 구원해준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인간의 운명이란 그렇게 한 통의 전화로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교 1년 후배였다. 내가 불교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 나를 많이 도와준 서클 후배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절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며 연등을 만들기도 했고 시낭송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선배인 나에게 명동에서 자주 돈가스를 사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와 나는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 전화번호를 알아보려고 학교로 전화를 했다고 하였다. 학교에는 마침 함민복 시인이 놀러왔다가 그 전화를 받았다고 하였다. 함민복 시인은 고등학교는 나의 선배지만 대학은 나의 1년 후배였다. 그러니까 함민복 시인과 그는 동기동창인 것이었다. 마침 함민복 시인이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기에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렵게 나에게 전화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그 당시 안산에서 그의 동생과 함께 인형가게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벼랑 끝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서로 인천과 안산을 오고 갔으며 멀리 강릉 바다에까지 드라이브를 가기도 하였다. 이러면서 나의 운명이 다시 한 번 심하게 운전대를 꺾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때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운명은 지금과는 참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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