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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Oct 06. 2021

6. 산방굴사






6. 산방굴사




늦은 밤 산방굴사에 올라간다. 달은 보이지 않고 별들과 지상의 불빛과 바다의 불빛들이 반짝인다. 옆모습만을 자주 보던 산방산을 오늘은 앞쪽에서 오른다. 사설 주차장과 공용 주차장이 나란히 있고 그런 주차장 뒤쪽으로 하염없이 돌계단이 펼쳐져 있다. 나는 언제나 계단이 무서웠다. 어린 시절부터 계단이 가장 무서웠다. 나는 늘  계단을 잘 오르지 못했다. 선천성 심장병을 안고 태어났던 나는 계단을 오르는 일이 너무나 어려웠다. 삶의 계단을 오르면 숨이 차서 언제나 한꺼번에 오르지 못했다. 계단 중간쯤에서 자주 멈추어야만 했다. 계단 난간을 붙들고 쪼그려 앉아 쉬어야만 하는 기좌호흡 환자였다.   

  

처음에 나는 내 몸이 그냥 허약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숨이 차서 달리기를 할 수 없었고 친구들과 함께 달리며 놀 수 없었다. 나는 나의 허약한 체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늦은 밤중에 홀로 나가 초등학교 운동장을 뛰어보기도 하였다. 달빛에 젖으며 아무리 뛰어도 나의 몸은 좋아지지 않았다. 달리면 달릴수록 더욱 숨이 차고 현기증이 몰려와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도 모르게 홀로 곡성 읍내 병원에 갔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선천성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겨우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늙은 의사 선생님께서는 심장 판막증을 치료하려면 반드시 수술을 받아야만 한다고 하였다. 너무나 가난했던 우리집 형편으로는 도저히 수술은 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나의 입을 철저히 틀어막고 찍소리 하나도 발설하지 않기로 독하게 결심하였다.     


그 당시 육영수 여사님께서 심장재단을 만들어 홍보하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한 누나가 보내준 흑백텔레비전에서는 심장병 어린이들이 자주 나왔다. 우리나라의 의사들은 심장수술을 잘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외국에서 수술을 받고 돌아온 어린이들이 티브이 화면에 자주 나오던 시절이었다. 나는 집에서 가족들과 그런 화면을 함께 보다가 도저히 끝까지 보지 못하였다. 먼 들판으로 몰래 빠져나가 홀로 펑펑 우는 날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어둠이 깊은 하늘의 별들이 나와 함께 따라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오르는 날들이 많았다. 


나는 그렇게 홀로 남몰래 참 많이도 울었고 참 많이도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홀로 쓰러졌다. 나는 그 당시 서른 살 까지만 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바보 같은 나는 우여곡절 끝에 스물다섯 살에 겨우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수술을 받으면서 비로소 나만의 오랜 비밀은 가족들에게 들통이 났다. 내가 스스로 나의 수술비를 마련하는 동안 우리나라의 심장 수술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였고 의료보험도 잘 정착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기적처럼 1990년 6월 8일에 심장수술을 받고 드디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수술 이후의 삶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나는 건강한 사람들의 세상을 사는 일에 서툴렀고 사랑과 사기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한 인간에 대한 믿음이 무참히 짓밟히면, 나의 세상은 언제라도 갑자기 끝이 날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어렵게 몸은 회복이 되었지만 마음이 더욱 아프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의 삶은 갑작스러운 부활과 함께 급속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사실을 또 다시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걸려온 그 전화 한 통이 나의 운명을 바꾸었다. 어느 겨울날 문득, 딱딱하게 얼어가고 있던 나를 찾아온 전화 한 통이 또 다시 나를 시나브로 살려주었다. 

    

산방굴사 올라가는 계단 양쪽에 산방사와 보문사가 있다. 태고종와 원효종이 있다. 대웅전과 적멸보궁이 있다. 해수관음상과 약사여래가 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용머리해안과 형제섬과 송악산이 잘 보이는 쉼터가 있다. 나는 전망이 아주 좋은 쉼터에서 잠시 쉬면서 안내판을 다시 내려다 본다. 쉼터는 언제나 나에게 숨터가 되었다.

     

제주도 화산을 만든 용암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조면암질 용암과 현무암질 용암으로 구분힐 수 있다. 조면암질 용암은 꿀처럼 끈적끈적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멀리 흘러가지 못하고 위로 밀려 올라가 볼록하게 솟은 모양의 산을 만든다. 그에 비하여 현무암질 용암은 호박죽처럼 걸쭉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화산 폭발 당시에 넓게 퍼지면서 흘러간다. 산방산은 끈적끈적한 조면암질 용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용머리 화산체 뒤에서 산방산은 태어났다. 산방산은 제주도의 다른 산과 다르게 웅장하고 멋진 종 모양의 산이다. 이렇게 볼록하게 생긴 산을 종상화산 또는 용암돔(Lava Dome) 이라고 부른다.   


용암처럼 붉은 나의 피는 조면암질 용암 보다는 현무암질 용암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이제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쯤 묽은 피로 살아야만 한다. 그렇게 묽은 피로 살기 위해서 평생 와파린을 먹어야만 한다. 항응고제를 평생 먹지 않으면 나는 어쩌면 혈전 때문에 뇌졸중으로 죽을 것이다. 2017년 12월 22일,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에 나의 심장은 다시 한 번 멈추어야만 했다. 심실 벽이 너무 두꺼워져서 좌심실 방의 빈 공간이 거의 다 없어져버렸기 때문이다. 비후성 심근증은 사랑하면 죽는 병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나는 다시 한 번 더 살아보고 싶어서 두꺼워진 심실 벽을 깎아내야만 했다. 심장 안에 빈 공간이 없으면 펌프질을 할 수 없다. 사랑에도 빈 방이 없으면 숨을 쉴 수 없다. 나는 두꺼워진 심실 벽을 다시 한 번 깎아내고 고장난 문들도 함께 갈아 끼워야만 했다. 그래도 천만 다행으로 두 개의 문을 갈아 끼울 예정이었으나 그러면 너무나 위험부담이 커지므로 하나만 갈아 끼우고 하나는 그냥 수리를 좀 하여 사용하기로 하였다. 대동맥판막은 기계판막으로 갈아 끼우고 승모판막은 성형을 하여 좀 더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나는 겨우겨우 기계인간으로 다시 한 번 태어나게 되었다.


심장의 인공판막은 조직판막과 기계판막이 있다. 조직판막은 인간의 원래 판막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수술 후에 항응고제를 먹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조직판막은 견고하지 못하여 10년 이상 사용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조직판막으로 수술을 하면 그 무섭고 위험한 수술을 다시 받아서 새로운 판막으로 교체해야만 한다. 목숨이 왔다갔다 할 위험한 수술을 반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속판막으로 교체하는 수술을 받는 경우가 많다. 기계판막의 최대 단점은 원래 인간의 판막 모양과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는 점이다. 대동맥판막의 경우 원래 인간의 판막과 조직으로 만들어진 판막은 삼각형 모양의 세 장의 잎이 대동맥 입구를 완전히 열어주거나 완전히 닫아줄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금속판막은 두 장의 판이 중간에 가로질러져 있어서 열릴 때에 완전히 열릴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그리하여 대동맥 입구에서 원활한 혈류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구조적으로 완전히 개방을 할 수 없으므로 피의 흐름을 방해할 수 밖에 없다. 그로 인하여 일종의 피의 와류현상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피떡이라고 하는 혈전이 생길 확률이 많아진다. 이런 과정에서 생길 수 밖에 없는 혈전 생성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피가 최대한 묽어야만 한다. 이럴 경우에는 평생 항응고제를 먹어야만 한다. 보통 와파린이라는 항응고제를 먹는 경우가 많다. 우리 인간들의 피 농도는 우리들이 먹는 음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철저한 식이요법과 함께 피의 농도에 따라 약의 용량을 잘 조절해야만 한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피를 뽑아서 피의 농도를 확인하고 그 농도에 따라 약의 용량을 수시로 잘 조절해야만 한다. 피가 너무 진하면 혈전이 생겨서 뇌졸중으로 죽고 또한 피가 너무 과도하게 묽어지면 출혈이 멈추지 않아서 죽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절 주변에서  돌탑 쌓기를 좋아한다. 산방굴사에 가까워질수록 작은 돌탑들이 많이 보인다. 산방굴사는 산방산 중간쯤에 있다. 자연동굴 속에 돌로 만들어진 부처님을 모셔놓은 사찰이다. 사실은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좀 얕은 편이다. 겨우 빗물만 피할 수 있을 정도의 바위그늘집 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정도의 굴이다. 어쩌면 바닷물의 염분과 바람이 만든 방일 것이다. 산방산은 바다와 인접해 있어서 벌집풍화혈이 많다. 산방굴사도 일종의 풍화혈일 것이다. 바닷물의 염분이 파도를 타고 솟아올라 바위 속으로 침투하여 쪼아낸 돌방일 것이다. 느리지만 앞으로도 쉬지 않고 산방산은 그렇게 변함없이 다듬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산방산에서는 늘 낙석을 조심해야만 할 것이다. 산방굴사 바로 앞에는 600년 넘게 살다가 떠난 소나무의 그루터기가 있다. 2013년 12월 24일에 고유제를 지냈다. 마을의 수호신처럼 여겨졌던 이 나무는 소나무 재선충으로 고사했고, 베어낼 수밖에 없게 되자 나무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날 고유제를 지냈다. 그 아름다운 소나무가 떠난 자리에 산방덕 형상을 만들어 설치한다고 하였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저 검은 그루터기가 다 사그러져 없어지면 우리들의 기억도 시나브로 없어질 것만 같다.


산방굴사 안에는 늘 촛불이 켜져 있다. 낮에는 관광객들이 몰려와 시끄러운 관광지이지만 밤에는 기도하는 법당으로 변한다. 기도를 잘 들어준다는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다. 다른 절의 신도들도 단체로 와서 함께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무언가 절실한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찾아와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주로 자정 전후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가끔 이 시간에 올라와 조용히 기도를 올린다. 주로 초하룻날 많은 사람들이 올라온다. 아마도 어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 국화와 양란이 아직도 싱싱하다. 나는 아마도 전생에 많은 죄를 지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비후성 심근증 환자로 태어났겠는가? 사랑하면 죽는다는 병을 안고 태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큰 죄를 지은 업보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생에서는 덕을 좀 더 많이 쌓아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다음 생에서는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는 좀 더 건강한 그 무엇으로 환생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시 이호에서 태어났다는 68년 7월생 김영남씨 쾌유를 비는 촛불도 어쩌면 나 자신을 위해서 켜고 있는지도 모른다. 똑똑똑 산방굴사 천정에서 물이 떨어진다. 산방덕의 눈물이 떨어진다. 천사의 노크소리가 들린다. 똑똑똑 하늘이 서서히 열리고 밤바다가 펼쳐진다. 아예 돌방 안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천선과나무가 밤하늘을 가볍게 흔든다. 


좀 더 들여다 보면 부처님 방 안이 검게 그을려 있다. 자세히 보니 왼쪽이 더 검다. 천정에 구멍이 뚫려서 빗물이 떨어진다. 소원을 빌며 켜놓은 촛불들이 왼쪽에는 빗물에 젖어서 꺼져 있다. 촛불이 꺼지면서 왼쪽 마음들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사람들은 약수라고 떠서 먹는다. 어떤 사람들은 산방덕의 눈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억울하게 죽은 산방덕의 눈물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내 귀에는 천사의 노크소리로 들린다. 하늘을 열어주는 천사들의 날개짓 소리도 들린다. 그 소리가 나를 깨운다. 나도 이제 천사들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산방굴사에 모셔진 부처님은 아직도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허리를 통째로 수술한 자국이 선명하다. 물론, 한꺼번에 지고 올라올 수 없어서 세 부분으로 제작하여  따로따로 옮겨왔을 것이다. 연대부분과 부처님의 아랫도리와 윗부분으로 나누어서 옮겨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자꾸만 수술자국으로 보인다.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던 나는 그런 부처님이 더욱 믿음직스럽다. 직접 몸으로 깊이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알뜰살뜰 보살펴 줄 것이다.   


탐라순력도 산방배작을 보면 산방굴사가 고래 입처럼 크게 그려져 있다. 굴 껍데기처럼 얕게 패여있는 굴이 동굴처럼 깊게 그려져 있다. 제주도 산방굴사는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보다 휠씬 깊지 않고 자연상태 그대로 있다. 외눈박이의 눈처럼 움푹 들어가  있다. 아니다, 다시 보니 산방산 가운데 환한 배꼽이 하나 있다. 그 배꼽 안에서 나는 김영남씨를 생각하고 나의 수술 전날 밤을 생각한다. 김영남씨도 어쩌면 나처럼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더욱 슬프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혼자서 끙끙 앓았을 것이다. 그런 잘못된 배려심이 오히려 가족들과 이웃들을 더욱 슬프게 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꼭 다시 살아나서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다시 한 번 부활하여 앞으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사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빌고 또 빌어본다. 수술 전날밤 남몰래 영안실에 내려가 빈 자리를 살펴보던 마음으로, 그 빈 자리가 나의 자리가 아닐까 염려하던 그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 길게 펼쳐진 밤길을 밤새 걸어본다. 목탁 소리도 없이 죽비 소리도 없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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