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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 입춘 굿

- 강산 시인의 세상 읽기 &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 13

by 강산




탐라국 입춘 굿




칼바람 추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쪽파들이

팔을 쭉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눈송이인지 수선화 꽃잎인지 매화 꽃잎인지

새하얀 것들이

입춘 하늘을 온통 흔들어대고 있다

탐라국(耽羅國) 신들이 까마귀 궉새들 앞세우고

한라산 구상나무 숲으로 내려온다

동자복 미륵과 서자복 미륵이

용두암에서 헛기침을 크게 한다


신구간(新舊間)에 하늘 다녀온 탐라국 신들이

관덕정(觀德亭) 앞으로 내려온다

일만 팔천 신들이 시내까지 내려와 둘러보고 있다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신들과 사람들이 깃발 앞세우고 관덕정으로 몰려오고 있다


자청비가 앞에서 낭쉐를 끌고 온다

새로운 씨앗 뿌리려고 새 씨앗 가지고 자청비가 온다

바람신(風神) 영등할망도 함께 온다

어지러운 세상 한 번 뒤엎으려고 서둘러서 온다

바다도 뒤집고 하늘도 뒤집어 세상 한 번 바꾸려고 온다

천지왕 허락 받아 작심하고 불어온다

바다에도 뿌리고 땅에도 뿌리고 하늘에도 뿌리고

온 세상에 알토란같은 씨를 뿌리려고 풍요신이 온다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이 함께 온다

해도 둘 달도 둘 혼돈의 세상

거대한 활로 하나씩 쏘아 없애고 송피가루 뿌려

천지 질서를 바로 잡았던 두 신이

큰 활 둘러메고 보무도 당당하게 씩씩하게 온다

자청비를 따라 문도령도 오고 정이 없는 정수남이도 온다

풍물패와 난장패와 걸궁패와 함께

세경신 세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탐라국을 손수 만든 설문대할망이 온다

옥황상제의 호기심 많은 셋째 딸이 온다

자식들 모두 불러 모아 오백장군들과 함께 온다

깃발에 쓰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선명하다

흔들릴 때마다 부자천하지대본(富者天下之大本)으로 펄럭인다

흔들릴 때마다 권력자천하지대본(權力者天下之大本)처럼 펄럭인다

북치고 꽹과리치고 나팔까지 불어대며 춤추며 몰려온다

신은 사람 같고 사람은 신 같이 파도치며 몰려온다

등불처럼 몰려온다 등대불처럼 몰려온다

환하게 불 밝히며 불빛처럼 몰려온다


신명나는 굿판에서 낭쉐 한 마리

백비 속으로 걸어서 들어간다

남원읍 의귀리 송령이골 지나 백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어둠 속에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연꽃을 피우기 위해 뼈를 뽑아 뼈를 깎아

뼈의 송곳으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뼈의 칼로 비문을 새기 듯

깊은 어둠 속에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관덕정(觀德亭) 앞 십자가에 매달려 지금껏 지켜보던 이덕구

신들을 따라 제주목관아지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을 따라 탐라국 왕궁으로 입궐하지 않는다

주머니에 꽂혀있던 빛나는 숟가락 던져 버리고

『한라산』시집 한 권 펼쳐 들고 강정으로 달려간다


온통 하늘을 뒤흔들던 꽃잎들

백록담의 백록이 뛰어 오르고 오름마다 꽃들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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