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과 주관성의 거리
보편성과 특수성의 거리
시대성과 영원성의 거리
현실성과 상상력의 거리
육체성과 정신성의 거리
역사성과 문학성의 거리
전통성과 현대성의 거리
현재성과 미래성의 거리
간결성과 구체성의 거리
상징성과 은유성의 거리
사실성과 신화성의 거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거리
여자들과 남자들의 거리
신경림 선생님 강의 동영상을 보았다. 신경림 선생님은 대학 때까지 가난을 모르고 자랐다고 하셨다. 시집 《농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어려서부터 가난했던 것으로 잘 못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었다고 스스로 말씀 하셨다. 신경림 선생님께서 아주 어려서부터 너무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면 어쩌면 《농무》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기생충>이란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 중에는, 가난도 직접 겪어보지 못한 봉준호 감독이 가난을 팔아먹은 영화라고 쓴 소리를 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런 견해는 예술을 모르는 사람의 편견일 확률이 많다. 예술의 속성은 원래 그런 것이다. 몸으로 직접 경험하지 않았어도 세밀한 관찰과 적당한 거리 유지로 충분히 육화시킬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나는 신경림 선생님의 끊임없는 시대정신의 반영과 시에 대한 고민과 열정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지금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어느 현역 시인보다도 치열하게 시를 쓰고 계시는 모습이 귀감이 되고 있다. 1935년에 태어나셨으니 나보다 31년을 더 사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시를 쓰고 있지 않으신가. 내가 분발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겼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①
한때 전사였던 느릿한 시인 김사인의 <장마>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김사인 시인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서울대 국문과와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수상. 시집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출간. 현재 동덕여대 인문학부 문예창작전공 교수.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
젖은 발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러 갈까
긴 긴 장마
속됨을 버린 게으름에 대한 예찬
장마는 긴 비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내리는 비가 장마다. 길게 내려서 물의 우주적 순환을 한다. 하늘로 올라갔던 물이 다시 땅으로 내려오고, 물은 낮은 곳에 거하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노자는 낮은 곳에 거하는 물의 덕을 찬양한다. “가장 훌륭한 덕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고, 주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노자, 《도덕경》 제8장) 물은 저를 막아서는 장애물을 만나면 감아 돌거나 휘돌아 낮은 곳으로 밤낮없이 나간다. 공자는 강가에 서서 “지나가는 것은 다 이와 같구나. 밤낮으로 흐르되 그 흐름이 약해지지 않는구나” 했다. 물은 동양의 사상가들이 편애한 뿌리-은유다. 물은 생명의 양육과 관련이 깊다. 지구 밖의 행성에서 고도 생명체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할 때 물의 흔적을 찾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물이 없다면 생명체도 없는 것이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다. 물은 만물을 낳고 젖을 먹여 기르는 어미다.
김사인의 시〈장마〉는 물의 철학적 뜻을 궁구하지 않는다. 장마 탓으로 외부 활동에 제약을 받는 동안의 심심함을 노래한다. 수족 부리는 일을 그만두고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게 더 길어지면 진력이 난다. 심심함에 거하는 일은 스스로에 대한 적극적인 태만이다. 이 태만의 본질은 생산과 뜻을 향한 게으름이요, 파업이다. 결국 명리의 회피요, 마치 선정(禪定)에 들 듯 자기방기의 퇴폐에 드는 것이다. 무릇 선정은 생산과 세상에 뜻을 세우는 일에 대한 방기가 아닌가.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게으름 피우는 일에도 진력이 나면 숲 속 절로 나들이 가기를 꿈꾼다. 절 나들이는 청유(淸遊)라고 할 만하다. 청유는 정한(靜閑)의 은밀함, 혹은 은일(隱逸)의 세계를 꿈꾸는 자아와 자연 사이에 이루어지는 생물적 교섭이다. 명산에 속됨이 없고 절집은 번잡함을 피하기에 적합하니, 청렴하면서도 고요한 공작산 수타사는 은신과 조망하기에는 낙원이다. 그곳이라고 장마가 예외겠는가. 산속 절도 쉼 없이 내리는 빗줄기의 주렴에 갇혀 있다. 산의 골짜기마다 물은 차고 넘쳐 도처에 없던 폭포가 새로 생겨난다. 종일 계곡마다 물소리가 만화방창이다. 가뭄에 허덕이던 나무들은 물을 흠뻑 빨아들여 그 푸름으로 숲은 울울창창하다. 절 안마당의 물미나리나 패랭이도 제철 만나 한창이다. 빗속에서 푸르게 흔들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일은 눈을 싱그럽게 하는 즐거운 일이겠다. 그 옆에 있는 물푸레나무와 함박꽃도 조망의 즐거움을 거든다. 들창 너머로 빗줄기에 가려진 먼 산의 푸른 산 빛 보는 게 지겨우면 요사채 아랫목에서 젖은 발을 말린다.
〈장마〉는 긴 비에 갇혀 오도가도 못 하는 중생의 꿈을 그린다. 아무도 모르는 산사에 숨어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그도 지치면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저물도록’ 민화투나” 친다. 이게 청유의 본질이요, 은일의 희열이 아닐 텐가. 이 게으름에 대한 예찬을 너무 나무라지 말기를 바란다. 이 게으름의 경지에서 노니는 게 바로 피정(避靜)이고, 세속에서 묻힌 홍진을 씻어 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올 장마에는 나도 온갖 약속들 다 깨버리고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러 갈까”.
김사인(1956~ )은 충북 보은 사람이다. 깨끗한 이마와 서늘한 눈매, 눈웃음이 선량한 그이는 겉보기로 한없이 온화한데, 그 온화함은 무른 내면의 징표가 아니다. 개결하고 단정한 선비의 풍모를 가진 그이의 내면은 옳고 그름의 분별에 민감하고, 내면 사람은 제 처신에 엄격하고 인의가 삼엄하다. 그이는 삼엄하지만 늘 삼엄한 사람이 아니다. 그늘이거나 가는 비, 뒷모습, 풀들의 외로운 떨림과 같은 가녀린 것들을 향한 연민과 비애는 깊어 늘 다정하니, 그 다정함을 흠모하고 따르는 후학들이 많다. 그이가 서슬이 시퍼렇던 독재 시대에 달마다 <노동해방문학>을 내며 반체제의 최전선에서 싸운 전사(戰士)였다는 사실에서 내면 사람의 삼엄함이 슬쩍 드러난다. 이 다정한 이가 시대의 호명에 따라 반체제의 전위에 서서 싸웠다. 학살의 피를 묻힌 손으로 권력을 잡은 얍삽한 독재자들이 그이를 지명 수배자로 지목하고, 잠행하는 그이를 붙잡으려고 공안당국은 혈안이 되곤 했다. 그 시절에는 잘 먹고 잘 사는 게 죄였다. 그이는 그 시절에 잘 못 먹고 잘 못 살았다. 이제 “세상은 변하고 /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네”(〈YOL〉). 그이가 지금은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서 조용히 후학을 키워 내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이는 아주 느릿느릿 말한다. 충청도 억양의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은 아주 멀어서 앞말과 뒷말은 그 의미의 끈을 가까스로 이어간다. 숨결을 가진 생명인 듯 어린 말들이 자라나기를 기다리며 그것을 천천히 부려 쓰는 사람이다. 어린 말들은 입 속에서 영혼을 키운 뒤 스스로 뜻을 세우고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마치 위빠사나 수행자의 걸음만큼이나 느린 그이의 말은 유장하고 또 유장하다. 그이의 글과 글 사이의 간격은 말보다 조금 더 멀다. 봄 모란 움 돋을 때 시작한 문장이 가을 단풍 들고 서리 내릴 즈음에야 마침표가 찍힌다. 그이가 진행하던 불교방송의 한 프로그램에 1년간 나간 적이 있다. 대개는 심야 시간대의 생방(生放)이었다. 거의 한 시간여를 책 한 권을 갖고 얘기를 나누는데, 아무 원고도 없었다. 원고 없이도 비교적 호흡이 잘 맞았고, 두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를 일부러 기다린다는 사람도 꽤 있었다. 방송에서 물러난 뒤 그이와 나는 만날 일이 뜸해졌다. 그이의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의 간격은 19년이다. 그이의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2006)은 백석 《사슴》 이후의 절창이다.
인물사진 : 이창주
풍경사진 : 이규열
글쓴이 장석주님은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랐다. 지금은 경기도 안성에 살고 있다. 산과 물을 좋아하고, 또한 책과 음악을 좋아한다. 요즘은 노자와 장자 읽기에 빠져 있다. 새벽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단전호흡을 한다. 글 쓰고 책 읽는 일로 생계를 세우고 있는데, 지금까지 지은 책이 50여 권에 이른다.
* 《topclass》 2007년 0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