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movie sktech
젊은 재능을 모아 모아
<더블>은 도스트도예프스키의 소설 <분신>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미스터리 로맨스의 성격을 띄우는 영화이지만 어떤 사이트에서는 장르를 코미디로 구분해놓았을 정도로 묘한 타이밍에 씁쓸한 웃음을 주는 신선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블랙 코미디와 미스터리 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강력히 권해드리고 싶어요. 씨네 21의 한 평론 끝자락에 이런 글이 있더군요.
그렇기에 이 영화는 평론가들에게 소포모어 징크스에 갇힌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생애 최고의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바로 접니다!
<더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사이먼(제시 아이젠버그)은 가족은 물론 회사 동료들에게까지도 무시당하기 일 수인 존재감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같은 회사의 한나(미아 와시코브스카)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는데 성격 탓에 말을 붙이기는커녕 그녀 앞에만 서면 벙어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 그와 완벽히 똑같이 생긴 제임스가 입사합니다. 존재감 없는 사이먼 덕분에 사람들은 제임스가 그와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이먼과 정반대로 활발하고 적극적인 제임스에게 호의적으로 대합니다. 제임스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그는 사이먼과 사람들을 이용해 회사 내의 유능한 사원으로 인정받습니다. 심지어 한나마저 제임스에게 반하게 되자 사이먼은 삶에서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들을 빼앗기게 됩니다.
<더블>은 굉장히 상징적인 영화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회사나 집 안의 물건들은 (텔레비전, 컴퓨터 등등) 극 배경이 현재가 아닌 것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한 시대의 모습을 재현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영화는 회사, 집, 카페 등 한정된 공간 안에서 모든 이야기를 진행하고 철저하게 감독의 통제 아래 있는 영화 속 세계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사이먼이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이나 극 중에서 사용되는 음악도 영화의 배경을 추측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각 이질감을 주어 사실상 어떤 시대와도 연결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영화 안의 인물들은 어떤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재현한다기보다는 각자가 맡은 역할과 임무를 지니고 목적이 있는 행동을 합니다. 이 영화가 그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영화가 다 끝난 후에야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더블>의 매력이자 아쉬운 점이기도 합니다.
스포일러 있어요!!!!
<더블>은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났다.라는 미스터리 한 설정으로 시작해 알고 보니 그는 타자가 아닌 내 인격 중의 하나였다.라는 반전으로 끝이 납니다. 이 결말을 접하고 나면 (특히 책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굉장히 당황하게 되는데 후반부에서 그 둘이 동일인물이었다 라고 말하기에 어색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소재를 사용한 영화 <파이트 클럽>에서 주인공 잭(에드워드 노튼)은 다중인격의 소유자이지만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또 다른 인격체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믿죠.
하지만 그 외의 주위 사람들은 그가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정신이 분열된 것과 관계없이 물리적으로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타인과 접촉을 하게 되면 그는 한 인간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타인들은 잭에게 타일러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타일러에게는 잭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 둘은 한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더블>에서는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끊임없이 주인공에게 각 인격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이먼에게는 제임스의 좋은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제임스에게는 사이먼의 부족한 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죠. 이건 곧 타인들도 그 둘을 물리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에 이르러 사실은 또 다른 자아였어!라고 말한다는 것이 (둘이 걷는데 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던가 같은 부위에 상처가 나는 등 힌트가 있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안일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기도 합니다만! 거기엔 약간의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에서 말했든 <더블>은 굉장히 상징적인 영화입니다. 우선 소설을 각색했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특정 시대나 배경을 끌어들이지 않고 순전히 한 명의 개인을 통해서만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인물들의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블의 공간은 굉장히 한정적인데 그 공간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어둡고 디자인된 듯한 누아르 스타일을 택하고 있습니다. 또 대사 대신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는 드라마틱한 사운드의 사용으로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더블>이 시공간의 배경에 구애받지 않고 만들어 내려했던 신비한 공간은 바로 주인공 사이먼의 꿈 속입니다. 이 영화의 반전과 결말은 단순히 제임스는 사이먼의 또 다른 인격체였다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상영 시간 내내 봤던 것이 실제 삶이 아닌 그의 내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나타나는 것이 초반부터 등장하는 경비 역할의 흑인 배우인데 그는 사이먼이 곤란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어떤 날은 경비로 어떤 날은 웨이터로 어떤 날은 의사로 등장합니다. 한 인물이 여러 역할을 맡으며 나타나는 것이 실제 영화 안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것이 꿈속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꿈을 꿀 때는 꿈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아무리 현실성이 떨어지는 일이라 해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막상 꿈을 깨고 나면 분명히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꿈에서는 왜 눈치채지 못했는지 신기할 따름이죠. <더블>에서 흑인 배우의 역할은 꿈 경험을 통해 이 영화가 사이먼의 내면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사이먼의 엄마가 죽고 그가 장례식장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두운 숲 속에 끝없이 안개가 덮인 걸 보고 지나치게 멋 부린 연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생각해 보니 꿈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실제로 그 장면이 지난 후 사이먼이 장례식 장에서 제임스를 만나고 싸우는 도중 죽었다 살아난다거나 한나가 갑작스럽게 임신을 하는 등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상황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더블>에서 두 인물을 통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아를 지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삶의 가지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언들이 넘쳐나죠. 어느 정도 규격화되어 있는 삶의 표본 같은 것들도 있고요. 당시의 사회가 무엇을 우선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표본의 모습은 조금씩 바뀌어갑니다. 조직의 성격에 따라 원하는 사람의 유형이 바뀌는 것처럼요.
사이먼은 소위 사회적 인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그럼 남은 건 그런 사람이 될 때까지 사회에서 끊임없이 부딪히고 깎여나가는 일뿐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진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찾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죠. 사이먼은 회사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떤 의식처럼 신발을 갈아신습니다. 구두를 신었던 그는 밖에서 사람들과 부딪힐 때마다 'Sorry'를 연발하고 조금이라도 성공하기 위해 상사의 꽁무니를 쫓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운동화로 갈아 신으면 멍하니 이상한 티브이 프로를 보거나 한나를 훔쳐보며 눈물 흘리는 진짜 '나'의 상태로 존재하게 됩니다. 신발을 갈아 신는 장면은 그의 현재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더 이상 제임스를 견딜 수 없었던 사이먼은 하수구를 걸어가며 결단을 내립니다. 맨발로 쭈그리고 있는 노숙자에게 자신의 '구두'를 신겨주고는 맨발로 걸어가죠. 그 후 사이먼이 제임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장면에서 그는 맨발 혹은 운동화를 신고 있습니다.
사이먼은 영화에서 자신을 피노키오에 비유했습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지금의 내가 진짜 나도 아닌 것 같다며 진짜 소년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종받는 피노키오 같다고 말합니다.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로 결심한 사이먼은 제임스(사회적인 나)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립니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뛰어내리는 지점이 한 번에 죽게 되는 지점이 아닌 그물에 튕겨 나간 후에 떨어져 불구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었다는 겁니다.
그는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나'답게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제임스를 침대에 억지로 묶어두고 차라리 불구가 되는 것을 택합니다. 불구가 되어 실려가는 사이먼을 한나와 자살반 경감은 대견하게 바라봅니다. 그것 역시 그의 내면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의 시선은 사이먼이 자신을 향해 느끼는 감정이겠죠.
그는 구급차에 실려가며 자기도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특별함이란 뛰어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꿈꾸는 듯한 미소를 짓는 사이먼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더블>은 이런 영화입니다. 세상 속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진 나와 내가 느끼는 나 사이의 괴리감을 느낄 때, 세상이 원하는 나의 모습과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를 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진짜 내가 맞는지 잘 모르겠을 때. <더블>은 '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한 사람의 심장 속을 보여줍니다. 그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이 어두컴컴하고 황량한 배경으로 외롭게 묘사되었다는 점이 공감이 가면서도 마음이 아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