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movie sketch
열등감이라는
괴물이 자라는 곳
어렵게 보는 영화 중에 두 시간을 할애한 보람이 있는 영화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저절로 결론이 주어지는 친절한 영화들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작은 극장에서만 상영하는 대사가 적고 진지한 영화들이 항상 팝콘 영화보다 훌륭한 영화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한 명의 인간을 만나는 것과 같아서 나와 링크되는 부분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할지언정 무의미한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예전에 비평가들의 별점이 높은 어떤 영화의 댓글란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를 한 번 더 보면 좋은 영화인지 알 수 있다고들 하지만 한 번 더 볼일이 없겠지...'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전반부에 꽤 긴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저와 같이 작은 화면에 언제든 다시 재생이 가능한 넷플렉스 같은 것으로 시청을 하신다면 한 번 더 볼 일이 없는 영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만 견디신다면 이 인내의 결과는 무척 강렬합니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석유 사업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다니엘 플레인 뷰라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그의 프로필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상황에 따라 그가 분출하는 감정들로만 인물을 경험할 수 있는데 그것이 영화를 미스터리하게 만들어 줍니다.
영화가 중반을 넘기 전까지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그간 학습된 나쁜 습관으로 이 인물은 좋은 인물인가 나쁜 인물인가를 판단해야 하는데 다니엘은 딱 잘라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계산이 빨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양의 탈도 쓰고 입에 발린 말도 거침없이 뱉어내지만 반면에 죽은 동료의 아이를 돌보기도 하고 일라이라는 가짜 종교인을 죽도로 혐오합니다. 영화의 중반부에 처음으로 다니엘이 속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부모와는 사이가 좋지 못했고' ,
'그전에 하던 일은 너무 힘들어 견딜 수가 없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으니 그냥 돈이나 많이 벌고 싶다.'
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아 이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다니엘이라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주로 가짜 예언자 일라이와의 만남에서 생겨납니다. 다니엘은 일라이에 관해 유독 적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것이 그가 세상을 대하는 주된 태도이기도 하지만 기어이 화를 밖으로 뿜어내는 상대는 일라이뿐입니다.
영화에서 다니엘이 광기를 드러내며 분노를 참지 못하는 장면은 두 번인데 모두 일라이가 찾아와 돈을 요구했을 때였습니다. 두 번 모두 그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었습니다. 일라이는 단순히 돈을 구걸했을 뿐이고 다니엘은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죠. 하지만 상대가 일라이일 때 다니엘은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내며 그를 이기려 합니다.
다니엘은 한 번도 일라이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능숙한 수완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구슬려 볼 만도 한데 일라이에게만큼은 대놓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아마도 원인은 일라이가 누구보다도 자신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속여 돈을 갈취하고 있는 일라이의 모습을 보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게 되니까요.
마침내 다니엘은 원하던 것을 이루었지만 그가 유일하게 사랑한 아들은 그를 떠나갑니다. 떠나는 아들을 향해 온갖 저주의 말을 내뿜는 그의 모습은 상처 받았다는 것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는 한없이 나약한 보통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다니엘에게 찾아온 일라이가 당신이 이겼다고 승리의 기쁨만 누리게 해 주었더라면 일라이도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일라이 역시 다니엘의 상상 이상으로 평범한 인간이었고 돈 앞에서는 위선마저도 내려놓으며 비굴해졌습니다. 다니엘은 그런 일라이를 보며 원망할 상대마저 잃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일라이를 향해 내뿜는 광기는 그가 겪었던 모든 것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일라이는 매개체일 뿐 다니엘이 진정으로 분노했던 것은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라이를 죽이고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집사가 다가오자 주인공은 말합니다.
"I'm finished."
한 사람의 인생과 영화는 이렇게 끝납니다. 영화의 흥미로운 부분이 주인공이 가장 고통받았던 때였다는 생각을 하니 슬퍼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