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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Jun 13. 2018

아가씨

#18. movie sketch -  made in 박찬욱


차이를 뛰어넘는
평등한 사랑



<아가씨>가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한국 영화에서 독보적인 위치임에도 흥행에서만큼은 항상 자신 없어하던 박찬욱 감독에게는 기쁜 일 일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영화의 흥행이 의외임과 동시에 자극적인 소재와 강한 노출수위의 덕을 보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죠. 박찬욱의 모든 영화가 늘 그렇듯 <아가씨>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영화입니다. 



<아가씨>



저는 오래된 박빠입니다. 중학생 때 청소년 관람불가인 <복수는 나의 것>을 보기 위해 어른인 척 정장을 입고 극장을 갔을 정도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박찬욱의 영화는 호불호 이전에 박찬욱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대체로 그의 영화는 잔인하고 선정적이기 때문이죠. 


이번 영화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단연 선정성입니다. 개봉 전부터 외신에서 베드신의 수위가 화제가 되었을 정도니까요. 대신에 잔인한 부분이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포괄적으로 생각하면 이 영화 역시 착취당하는 여성을 통해 잔인함을 보여주지만 예전 복수 삼부작과 같이 직접적으로 잔인한 장면을 묘사하는 곳은 단 한 군데뿐이고 나오는 위치도 영화의 끝부분이기에 눈치껏 오분 정도만 눈을 감으면 충분히 관람이 가능합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관람 스코어가 좀 더 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주 특수한 상황으로 보편적인 감성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박찬욱 영화에 거부감을 가지거나 아예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로 영화의 잔인함과 선정성을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박찬욱 영화는 잔인하고 선정적입니다. 영화의 설정들도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청각장애인과 무정부주의자 커플의 납치극 : <복수는 나의 것>, 

누나를 사랑한 남자와 딸을 사랑한 남자 : <올드 보이>, 

전과자 싱글맘 : <친절한 금자 씨>, 

신부와 흡혈귀 : <박쥐>, 

정신병동의 사이보그 :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사이코패스 삼촌과 조카 : <스토커> 


하나만 가져와도 강렬한 소재들을 두세 개씩 결합해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 안을 잘 들여다보면 이야기 자체는 언제나 공감의 폭이 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던가 사랑, 복수심 같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을 극대화해 표현할 뿐 보통 사람들이 겪어본 적 없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가씨>



또 박찬욱 영화에는 대체로 로맨스 서사가 존재합니다. 이번 영화 <아가씨>도 여성에 대한 이야기, 성장에 관한 이야기,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이야기 등등 여러 관점으로 읽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따뜻한 블루>가 그랬듯이 이 영화도 레즈비언의 사랑이 아닌 그냥 사랑이야기입니다. 영화 안에서 여자끼리의 사랑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나 사회적 편견 같은 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동성애를 내용의 중심으로 다룬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브로큰백 마운틴>이나 <캐롤>같은 경우는 두 주인공이 동성애자가 아니면 영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경우에는 김태리 역할의 하녀가 사회적 약자라는 설정만 유지된다면 남성으로 바꾸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동성애가 크게 작용하지 않는 스토리입니다. 박찬욱의 전매특허인 특수한 상황을 통해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다라는 것이 이 영화에서도 적용된 것이죠. 



<아가씨>



아마도 이 지점이 <아가씨>의 베드신에 분분한 의견을 만들어낸다고도 생각합니다. <아가씨>가 해외에서 공개되고 난 후 영화는 대체로 호평이었으나 베드신에 대해서는 꽤 냉혹한 평가들이 이어졌습니다. 어떤 외신은 사춘기 남학생의 로망을 보는 것 같다는 평까지 했으니까요. 박찬욱은 그 외신 평가에 대해 어떤 부분이 그렇게 보였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라고 인터뷰를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영화 내의 베드신이 다소 튄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공통된 의견인 것 같습니다. 


박찬욱 영화에 선정적인 장면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필요 이상으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폭력 자체를 길고 잔인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장르성을 획득하는 어떤 영화들처럼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그 자체의 에너지만을 위해 사용된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섬세하게 포장이 가능한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저 역시 <아가씨>의 베드신은 무언가 불편한 느낌이 있었는데 포스팅하기 전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난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박찬욱 영화는 종종 배우가 하고 있는 대사나 극 중 상황보다도 순간의 이미지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아가씨>는 영화 전반적으로 주제를 함축한 듯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인물들이 대칭되는 이미지입니다.



<아가씨>



숙희와 히데코가 서로 옷을 입혀주기 위해 뒤돌아 있는 장면은 완벽하게 같은 머리 모양, 옷, 체형으로 신분의 차별에서 벗어나 동등한 존재가 된 둘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베드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남성들에게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히데코가 숙희와 평등하게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대칭의 이미지로 전달하고자 합니다. 베드신의 중반부에서 손을 마주 잡고 하는 체위는 두 사람이 완벽하게 대칭되는 그림입니다. 영화의 끝부분에 가서는 더 노골적으로 방 안의 가구 배치까지 완벽하게 데칼코마니를 이룹니다. 감독은 이미지를 통해 평등한 관계를 그려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연출 방식을 내밀한 감정 묘사가 필요한 정사씬에도 적용시켰기에 인위적인 느낌을 주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 박찬욱 감독으로선 억울하다고 느낄 수밖에요.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완성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화제가 되는 베드신 때문에 영화의 좋은 점들이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도 듭니다. 이런 표현 방식이 민감한 동성애 베드신을 구현하는 데 있어 적합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가씨>



<아가씨>를 이야기할 때 반전에 무게를 두는 것은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즐길 부분은 반전이 아니라 반전 후 상황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데코를 숙희의 관점으로 보는 것과 그녀의 삶을 알고 보는 것. 

진짜 히데코를 알고 숙희를 보는 것과 모르고 숙희를 보는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인물들의 사정에 따라 같은 일이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아가씨>1부가 끝 나갈 즈음 박찬욱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의아함이 있었습니다. 이게 뭐지? 하지만 2부가 끝난 시점에서는 누군가가 박찬욱에게 했던 평가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박찬욱은 영화를 너무 잘 만든다'


<아가씨>가 박찬욱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필모에 걸맞게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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