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孟子, BC 372?~BC 289?)
21c 현대에도 사상에 있어서 끊임없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 맹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추(鄒)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로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그의 활동 시기를 BC 4세기 전반으로 추정한다.
그가 활동한 이 시기는 중국의 중원과 유럽의 그리스에서 현자들의 지혜의 꽃이 활짝 핀 시대였다.
맹자는 공자가 죽은 지 100년쯤 뒤에 태어나 그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교 사상가인데, 공자가 인(仁)이라 칭하고 '예(禮)'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에서 발견한, 인간의 덕성(德性)을 가지고 맹자는 그가 발견했던 인간의 실천적 계기를 종교적인 기초로 닦으며 인간이 갖추고 있는 하늘의 목적을 지닌 법칙성으로 여기며 이를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하고 인간의 성(性)은 선(善)이라며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게 된다.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에는 인(仁)·의(義)·예(禮)·지(智) 등 4 덕(四德)의 4단(事端:싹)이 구비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남을 사랑하여 측은히 여기는 마음’ 이란 뜻을 의미하는側隱之心(측은지심)이 그 첫 번째로 이는 인(仁)의 단서가 되며, 두 번째로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羞惡之心(수오지심)은 (義)의 단서가 되고, 세 번째로 ‘서로 양보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辭讓之心(사양지심)은 예(禮)의 단서가 되며 마지막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是非之心(시비지심)은 사덕과의 관계로 볼 때 지(知)의 단서가 된다는 말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태어나며 사회적 성격을 본성으로 가진다는 주장이다.
이 와중에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선악설의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끝이 나지 않는 이유는 선악의 논란의 기준이 이타심과 이기심이기 때문이다. 이 끊임없는 논란에서 벗어나고자 고자(告者)는 인간의 선악은 환경에 따른 인간의 선택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하게 된다.
맹자의 이러한 4 단설 외에도 유명한 '오륜(五倫)'설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관계를 간단히 정리한 것으로써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이 있다.
그의 업적과 사상은 방대하지만 마지막으로 현대에도 자주 들리는 이야기인《맹자(孟子)》 <진심(盡心)>에 나오는 三樂을 한 번 간단히 살펴보자면. 부모가 함께 살아 계시고 형제도 무사한 것, 하늘이나 남에게 부끄러워할 꺼림칙한 일이 없는 것,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이들을 교육하는 것을 꼽았다.
그는 어머니 장(仉)씨가 만들어낸 훌륭한 교육을 위한 세 번의 이사를 의미하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일화를 남기며, 이 일화에 맞는 충실한 학습을 하였으며 학교의 수업이 끝난 뒤에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로 가게 되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에게 공자가 편찬한 육경을 배웠다.
그는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높은 뜻을 세우고,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며, 40세 이후에 는 백성과 함께 즐기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으로 인정(仁政)과 왕도정치를 할 것을 왕에게 주장하였으나 플라톤의 철인정치(哲人政治)가 뜻은 좋으나 이루기 힘든 이상이었듯, 그 당시 제후가 원하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외교적 책모(策謀)였기에 그의 사상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주장으로 간주되어 제후에게 채택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법가나 종횡가가 득세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왕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왕을 바로잡기 위해 떠나 그의 고향에 은거한 채 제자 양성에 주력한 것으로 본다.
그는 왕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하는 기개 높은 선비로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의 기상은 날로 높아졌고 그의 이러한 행실은 현대에 와서도 깊게 뿌리내려 우리 마음속을 움직이며 소신을 지키고, 높이라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