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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셸 바스키아 Jean Michel Basquia

1960~1988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_ 1960~1988


바스키아는 천재화가로 불리는 데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의 탁월한 실력을 갖춘 화가였다.

그는 뉴욕 맨해튼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솜씨를 보였다고 한다. 7살 무렵, 그의 어머니가 선물한 '그레이 해부학'을 보고 그는 큰 영향을 받았으며, 17세에는 학교를 중퇴하고, 화가가 되리라 결심을 하고, 18세부터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밤이면 밤마다 클럽을 드나들며,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바스키아는 고등학교 시절에 낙서화가 알 디아즈(Aldiaz)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함께 건물과 지하철에 스프레이로 경구를 써 넣는 SAMO 프로젝트 작업을 하게 된다. 그는 "SAMO(Same Old Shit)"라는 가공의 풍자적 인물을 닥치는 대로 지하철이나 건물의 빈 벽 등에 그렸다. 그 뿐 아니라 벽, 문, 냉장고, 화장실 등등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 어느 가능한 빈 공간이라면 가리지 않으며 낙서하는 일을 즐겼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늘 많은 이슈를 몰고 다녔다.


바스키아는 팝아트 계열의 천재적 자유구상화로서, 지하철과 거리의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도시의 골치 아픈 고민거리기만 했던 그라피티 문화를 현대미술로 자리 잡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작품에 그가 우상시 했던 야구선수를 비롯하여 해부된 팔다리 등 분리된 신체, 미국 대중문화의 산물인 배트맨 등을 등장시켜 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반복해 등장시키며 새로운 기법을 창조해 내기도 했다. 바스키아의 작품은 어떻게 보면 단순한 낙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종주의, 해부학, 흑인 영웅, 만화, 죽음 등의 무겁지만 누군가가 끌어내야 했던 주제를 명확하게 그리고 자신감 있게 다뤘으며, 자전적인 내용도 자주 선보이며, 비극적인 삶 속에서도 느낄 수 있는 생존의 본능의 번뜩이면서도 충격적이며, 동시에 충동적인 작품을 남겼다.

그는 낙서 같은 여러 가지 기호와 글자를 비롯하여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장난스럽고 간단하지만, 다양한 인물형상을 이미지와 반복적 기법을 활용하여 그림으로써, 80년대 초반 그는 거리의 낙서광에서 천재화가로 스타덤에 오르며 빠른 속도로 뉴욕 미술가에 주류이자 거물로 성장했다.


도시거리를 가득 메운 생동감 넘치는 시각 언어들인 낙서 그림과 유럽에서 들어온 신표현주의가 더불어 화랑가에는 호경기가 시작되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장 미셸 바스키아는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작업실에 쌓였던 그림들은 엄청난 값어치로 둔갑하게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그의 작품을 손에 쥐기 위해 떼로 몰려온 컬렉터들은 미완성 작품까지 가져갈 수 있는 한 모든 작품을 모조리 가져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바스키아는 1980년에 첫 전시회를 해 호평을 받으면서 뉴욕/뉴 웨이브 전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계 각국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고, 흑인 천재 화가로 "검은 피카소"란 별칭을 얻으며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바스키아라는 인물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본 영화를 통해서였다. 그 영화의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다름이 아닌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와의 첫 만남이다. 바스키아는 어느 한 레스토랑에서 앤디 워홀에게 접근하여 자신이 그린 엽서를 사달라고 요청을 한다. 그러나 냉담한 표정의 앤디 워홀은 “좋기는 한데 그림이 좀 대충 손이 덜 간 것 같은데......."라는 대답을 하자, 바스키아는 이에 굴하지 않고, " 당신 그림도 그렇잖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한 시대의 큰 작가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자신감 있게 표출한 그는 이를 계기로 당시 팝아트의 거장인 앤디 워홀의 환심을 사게 된다. 그리고 앤디워홀의 인정을 받게 되면서부터 바스키아는 성공의 자리를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이 더욱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는 공동 전시를 개최하는 등 스승과 제자 이상의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마도 앤디 워홀이 바스키아에게서 진정한 삶의 향기와 자기 자신의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공동 전시회가 실패로 끝난 2년 후, 앤디 워홀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고 바스키아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바스키아 역시, 이듬해 약물 과다 복용으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된다.


바스키아! 그의 짧은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리앙 슈나벨 감독에 의해 1996년 영화로 제작되어 그의 삶을 되돌아보며 기억할 수 있는 작품이 드디어 탄생하게 된다.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정규 미술 학교를 다닌 적도 없는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미국에서 유행했던 "낙서화(Graffiti)"를 기초로, 단순한 낙서 형식의 그림이라는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어 본인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끌어 나갔으며, 그리하여 그만의 독창적이고, 진지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냄으로써, 현재까지도 꾸준히 추앙받는 독특한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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