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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부 Feb 27. 2024

왜 공간디자인 전공자가 패션회사 VMD를 하고 있는지

비전공자의 패션사랑

예전에 교수님이 하셨던 말이 기억이 난다.

“나는 비주얼 알러지가 있어. 그래서 아름답지 않은 걸 보면 얼굴에 두드러기가 나. “

오잉? 동기들이랑 그 얘기를 들으면서 미대 교수라는 걸 극단적으로 표현하시는 건가 했다.

나도 사실 비주얼 알러지가 살짝 있었는데 그냥 이쁜 곳에 가고 이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였는데, 커가면서 점점 심해졌다.


내가 예민하게 대하는 2가지 포인트가 있다.

하나는 공간, 하나는 옷이다.


공간에 대한 예민함을 제일 크게 느낀 건 초등학교 3학년이다.

플로리다에서 살다가 초3 때 한국으로 딱 입국을 하는 순간 느꼈다. 나 여기서 적응하기 정말 힘들 것 같다는 것을..

인천대교를 건너면서 여기 왜 이렇게 황량해? 하면서 서울로 왔던 기억이 난다. 제일 충격이었던 건 못생긴 회색 건물들이랑 그 위로 붙은 어울리지 않은 글씨체로 만들어진 간판들이었다. 저는 이때 한글이 미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한글을 왜 저렇게 보이게 밖에 못 만들었을까?

그렇게 평화롭고 따뜻한 시골에서 살다가 정돈되지 않은 도시로 오니까 멘붕이 온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처음 간 날이었다. 미국에 있었을 때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온 친구들이 한국은 학교가 어둡고 화장실이 더럽다는 얘기를 해줬었는데, 가보니까 정말 그렇더라.

그리고 학교가 무슨 5층 6층이나 되는 건지. 비율이 정말 이상한 계단을 등하교 때마다 오르내려야 하는 게 너무 싫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는 1층만 있었는데, 나무랑 잔디도 많고 건물도 많았는데, 화장실도 깨끗했는데, 학교 분위기가 참 따뜻했는데 여긴 왜 이렇게 삭막한 거야.

이때부터 이전에는 몰랐던 내 공간에 대학 집착을 알게 됐다. 나는 따뜻하고 이쁜 공간을 좋아했다. 누가 싫어해 솔직히?


인생에서 공간의 역할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보기 좋은 공간을 만드는 능력을 키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실내디자인과에 가서 아름다운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론이 너무 긴데, 대학교 졸업을 하고 나는 전시 회사에 들어가서 디자인 기획을 했다.


옷에 대한 예민함도 못지않게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크게 와닿기 시작한 건 여기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옷 입고 스타일링하는 게 좋아서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백화점 해외 VMD실에서 인턴을 했었다. 이때 정말 정말 재밌게 일을 했다.

그리고 파견계약직이었기 때문에 9개월이 지나고 나는 취준을 하기 시작했다. 졸업과 동시에 코로나가 터져서 많은 기업들이 공고를 올리지 않고 공채 0명 모집이어도 1명 뽑는 취업난이 시작됐다.

이때 패션에 있어야 할지 전공을 살려 디자인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그래도 정규직 공고가 조금 더 보였던 디자인으로 가봐야겠다고 했다.


거짓말 안 하고 이력서랑 포트폴리오를 99개 넣고 100번째 넣은 전시회사에 가게 되었다.

신입인데도 연봉이 꾀나 높았다. 심지어 들어가자마자 사업자전환을 하면서 내 연봉은 또 올랐고 미국 출장을 다녀오고 연봉이 또 올랐다. 일도 너무 보람 있고 재밌었다.


하지만 겨울에는 맨날 검정 패딩에 조거만 입고, 여름엔 맨날 화이트 셔츠에 레깅스만 입어서 일상이 재미가 없었다. 동료들도 패션에 대한 관심이 없고 이쁘게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옷을 입을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공간에도 패션에도 (또 말하기 웃기지만 너무 찰떡인 설명) 비주얼 알러지가 있어서 이건 좀 힘들다 싶었다.


나는 패션으로 다시 가고 싶었다. 그래도 공간디자인을 전공했기 때문에 툴사용도 자유롭고, VMD가 인테리어 파트까지 다루는 회사도 많기 때문에 어떻게든 들어갈 수는 있겠다 싶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직준비를 했고 연봉을 왕창 깎고 다시 신입으로 패션회사 VMD가 되었다.


지금 만족하냐고?


연봉은 진짜 미친 듯이 적고 인상률은 물가상승률만큼도 못된다. 근데 아직까지는 이 일이 너무 재밌어서 참고 있다. 물론 더 좋아하는 브랜드로 가기 위해, 그리고 더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해 열심히 이직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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