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를 지날 무렵, 친구들은 비속어를 많이 사용했었다.
그 또래가 맛볼 수 있는 은근한 반항심이랄까?
괜히 '씨X', "졸X"등의 비속어를 모든 문장에 붙이면서 자신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대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아이들은 내가 사는 주위에 내 언어를 뿌리며 나라는 존재를 알렸었다.
한 명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주위에는 모두가 그랬으니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더러는 나도 비속어를 사용했던 것 같은 기억은,
아마도 나 역시 내 주위에 뿌려진 것들이 당연하다고 나도 모르게 젖어들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상황을 마주하다보면 아주 적합한 표현이 머리속에서 빼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있다.
정말 이 표현을 쓰면 완벽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면 차순위, 차차순위의 아쉬운 표현을 놓게 된다.
굉장히 아쉽기도 하다. 찝찝하기도 하다. 자꾸 생각도 난다.
찾아보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으니 답답하다.
그러던 어느 날, 책 속에서 그 표현을 만나는 날! 그 희열감이란..
바로 펜을 들고 기록을 해놓는다.
이제 이 표현은 내 것이 된다.
언어란 그 상황에 맞게 쓰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대변하는 말이며 동시에 그 표현을 하게되는 상대방을 대변하는 말이다.
"오랫만이다! 이 새X, 잘지냈어? 여전하네 자식, 당구 한 게임 조X러 가자 씨X"
이러한 표현이 어울리는 내 주위가 있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 주위도 있다.
그런데 한 해, 한 해 살아가다보니 아무리 친근해도 비속어를 쓰면 괜히 기분이 안좋다.
그 언어가 나를 만드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나만 정중하자니 뭔가 소외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가면서 새로운 관계와 진해진다.
언어란 변화를 대변한다.
삶을 대변하고 과정을 대변한다.
내가 가는 인생 길위에 만나는 많은 표현들.
변화되는 내 감정들.
그리고 내 관계들.
언어란 내가 살고 있는 현재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또다른 확실한 나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언어 한계 상방을 가장 잘 뚫어 낼 수 있는,
그것을 가장 잘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다.
언어를 가장 확실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독서와 관계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