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에서 만난 지긋한 청춘
그해 봄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머무르던 아이슬란드는 겨울이 채 물러나지 않아 제법 쌀쌀했다. 그곳을 떠나 몇 시간 비행 끝에 발 디딘 프로방스에는 이미 봄꽃이 만개해 있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온 게 아니라, 겨울을 떠나 봄으로 찾아온 것만 같았다. 마치 봄은 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완연한 봄의 프로방스로.
프로방스라 일컬어지는 남프랑스에는 아기자기한 소도시와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면허만 있고 운전경력 없는 나 같은 뚜벅이 여행자에게 허락되는 곳은 기차나 버스로 쉬이 닿을 수 있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소도시들 뿐이다. 대중 교통으로는 닿을 수 없는 작은 마을들이 아쉽긴 했지만, '이번 여행으로 목차를 훑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다음 여행에 본론으로 들어가지 뭐' 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계획을 짰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지도에 한붓 그리기 하는 게 내가 말하는 계획의 전부였기에 '계획을 짰다'는 말이 조금 부끄럽긴 하다.
열흘 남짓 "아비뇽-아를-마르세유-엑상프로방스-니스"를 거치며 중간중간 작은 마을에 발을 들이밀 생각이었다. 중간중간 들를 작은 마을에 대해서는 숙소나 여행안내소에서 현지인들에게 물어 보았다. 때로는 먼저 그곳을 다녀간 여행자들로부터 귀동냥을 얻었다. 귀 얇고 시간 많은 여행자는 '어디가 좋다더라~ 어디는 생각보다 별로야..'라는 말에 혹해서 계획을 수시로 바꾼다. 그러니 애초부터 치밀한 여행 계획 따위는 시간낭비인 셈이다.
그런 여행에는 우연과 일탈의 기쁨이 있다. 물론 그 기쁨은 숙소나 교통편을 미리 예약하지 않아 '오늘 밤 어디에 머물지 모르는 불안'과 맞바꾼 것이긴 하지만. 내게는 어쨌든 나 하나 잘 곳은 세상 어딜 가든 있을 거라는, 종교보다 강한 믿음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모골이 송연하다.
프로방스를 찾은 것은 고흐의 붓이 스쳐간 풍경을 눈길로나마 더듬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기에 아를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장소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밤하늘이지만, 이곳에는 고흐가 캔버스에 물 들인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있다. 관광지화 되어 숙소도 음식도 비싸지만, 허름한 영혼이 쉬어갈 무수한 벤치와 따뜻한 햇살이 있다. 일반화하기엔 부족한 경험이지만, 이곳의 삶은 도시의 삶보다 느긋하며 사람들의 눈빛에는 온정이 어려있다. 내가 온정이 필요해 보일만큼 허름한 여행자라서 그런 눈빛을 더 많이 받았을 수도 있다.
혼자 여행을 하면 알게 모르게 사람에 상처받고 사람에 위로받게 된다. 대도시에서의 친절이 서비스의 다른 이름이라면, 작은 마을에서의 친절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스스럼없이 마음을 내어주는 정에 가깝다. 물론 작은 마을에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쾌한 경험을 한 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씻어주고 결국엔 활짝 열게 만드는 바람은 언제고 다시 불어온다.
아를은 고흐가 귀를 자르고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전 마지막 봄을 보냈던 곳이다. 고흐의 걸작이라 할만한 작품들은 대부분 이곳 아를에서 그려졌다. 그래서일까, 아를을 거닐다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소도시의 심심한 풍경조차도 고흐의 시선으로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도시 곳곳 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장소에 그 풍경이 담긴 캔버스가 놓여있다.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에는 고흐의 캔버스가 놓여있는 장소가 표시되어 있다. 한가한 여행자답게 도시 곳곳에 놓여있는 고흐의 그림과 숨바꼭질을 하다 보면 한나절이 금세 지나간다.
주말에 이곳을 찾아온 탓에 근교로 가는 차편이 없어서 토일월 3일을 이 작은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갔던 곳을 또 가고, 봤던 곳을 또 보고, 만났던 사람들을 또 만나며 돌고 또 돌아다녔다. 반나절이면 충분히 둘러보고 떠날 수 있을 만큼 작은 마을을 말이다. 덕분에 내게는 아를에 대한 기억이 파리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풍부하게 남아있다.
아를에서 찾은 유일한 백패커스의 3인실 도미토리에 짐을 풀었다. 하루 방값은 25유로로 남부 소도시 치고 꽤 비싸다고 느꼈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 걸음으로 닿을 수 있는 숙소들 중 최저가는 바로 여기였으니까.
한나절 아를을 돌아보고 난 뒤에는 생각이 바뀌어 방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를의 풍경은 그 자체로 고흐의 미술관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작은 마을을 닳도록 구경 다니고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1층에는 아담한 거실과 주방이 있었고, 2층과 3층에는 여행자들이 묵어가는 침실이 있었다. 간단히 끼니를 때우러 주방에 내려가니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식탁이 하나뿐이라 그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나도 한자리를 차지해 앉았다.
그중 할머니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유창한 영어로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는 할머니를 나는 아주 좋아한다. 그녀는 따뜻한 눈빛으로 아를이 좋았느냐고 물었고, 단박에 나는 그녀가 좋아졌다. 그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온 젊은 처자가 신기했는지 기특했는지(혹은 불쌍했는지)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독일 쾰른에서 온 노부부는 몇 년 전 은퇴를 하고 매년 봄마다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공평하게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했다. 그들은 나의 젊음을, 나는 그들의 여유를.
그들은 다음날 아를을 떠난다고 했다. 툴루즈를 거쳐 생장(St. Jean Pied de Port)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여정을 시작한다고. 당시 내 친구도 그 길을 걷고 있었는데 날마다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등산화가 닳아 밑창이 덜렁거리는 사진을 내게 보여주고는 했다. 한창 팔팔한 젊은이들도 힘들어하는 그 길이 칠십 넘은 노인들에게 벅차지 않을까 주제넘은 걱정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800km가 넘고 한 달은 족히 걸어야 한다던데, 괜찮겠어요?"
"괜찮아, 우린 시간이 아주 많거든. 천천히 가면 돼. 작년에도 괜찮았었어."
"그럼 이번이 두 번째인 거예요? 우와, 정말 멋져요!"
"아니, 아마 여섯 번째일 거야. 여보, 그렇지?"
각자에게 주어진 모래의 양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모래시계를 하나씩 갖고 살아간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주어졌는지 모르는 채로 우리에게 시간이란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로 나뉜다.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면 아마도 내게 남은 시간은 그들의 시간보다 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조급했고 그들은 느긋해 보였다. 젊음의 절정에 종말을 고하는 서른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 같아 나는 늘 불안했다. 서른이 되면 어느 시의 한 구절처럼 잔치는 끝날 것만 같았다. 이렇게 쫓기듯 살아가는 나의 시간은 아무리 길어봤자 느긋한 마음으로 에둘러가는 그들의 시간보다 짧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젊음은 누구에게나 짧은 건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지금의 이 시간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어 불안해했다. 무언가 좋은 결과를 얻고자 떠난 것은 아니지만, 여행 이후의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아를에서 시간이 아주 많아 괜찮다는 '지긋한 청춘'을 만난 후로, 나의 조급함은 약간 고삐를 늦추었다. 마음이 조급해질 때마다 아를에서 만난 노부부를 떠올렸다. 그때마다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차분하게 촘촘하게 살아내자고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아주 많으니 더 실패하고 멀리 돌아가도 괜찮다고.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월급을 받고 월세를 내는, 소위 안정된 삶에 안착했다. 어쩌면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말처럼 들릴 테지만,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를 준다고 해도 그처럼 여행할 수 있던 시간과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의 그 여행 덕분에 나는 아주 많은 시간을 갖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