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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
"로마의 휴일"

유럽여행 포토에세이 #54 _ Rome, Italy

by 김예담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이탈리아 로마,

네 번째 이야기: 로마의 휴일.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은 포근한 날씨였다. 청명한 하늘 아래 상아빛의 대리석은 강렬한 햇빛을 그대로 반사해 오늘의 날씨가 앞으로도 맑고 따뜻할 것임을 귀띔해 주었다. 짧은 시간 속 아쉬움 없이 여행하기 위해 최대한 걸었고, 최대한 많이 보았으며, 최대한 귀 기울여 들었다. 로마를 상징하는 그리고 로마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크고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지켜보며 이방인으로써 로마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이전에는 유명 관광지를 들르며 로마에 와봤음을 증명하기 위한 여행을 했다면, 마지막 날이 되어서는 오로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발이 이끄는 대로, 시선이 사로잡히는 대로, 직관적으로 마음이 가는 대로 여행을 했다. 그렇게 나만의 취향을 가득 담은 여행의 시작 그리고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로마를 즐기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여행 중에는 낯선 장소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묘한 이끌림을 주는 장소들을 마주하게 된다. 내 취향이 가득 담긴 곳, 그곳은 한적하고 조용하며 고즈넉하고 따뜻하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 같은 곳 그리고 사연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곳, 그런 곳들은 항상 나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들의 삶의 단편을 보며 그들이 가진 세계를 잠시나마 관망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여행이유이자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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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



로마를 대표하는 영화이자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로마의 휴일' 영화가 있다. 미국 기준으로 1953년 개봉했고, 우리나라가 전쟁을 겪고 있을 때 제작이 진행됐던 오래된 영화다. 내가 스무 살 초반일 무렵 한 때 고전 영화들에 깊게 심취했던 시기가 있었다. 오래된 영화들 속 과거 사람들의 생활상, 그들의 사고방식, 시대적 배경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휴일'은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의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거리의 모습만 현대적으로 조금 변했을 뿐 도시 전체 모습은 과거 그때와 달라진 게 크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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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공주와 일반인이 사랑에 빠진다는 스토리는 당시 로맨스 판타지에 가까운 장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에 들어서도 영국 왕실이나 일본 왕실 등 왕족이 일반인과 연애 혹은 혼인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전 세계 언론보도와 신문 일면을 차지하는 게 다반사다. 이처럼 많은 관심을 받는 위치이기에 혼인과 같은 중요한 문제 앞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사람을 보는 전통 기준이 있으며, 여기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심하면 국민의 반대까지 받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리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입헌군주국이지만, 그들 마음대로 함부로 사랑도 못한다는 게 안타깝게 다가왔다.


실제 역사에는 사랑을 지키고자 왕족을 포기한 사례가 숱하게 나온다. 현 영국 왕인 찰스 3세의 큰 할아버지 에드워드 8세의 경우, 왕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을 지키고자 왕의 자리를 포기했다. 일본 황실의 마코 공주도 결혼과 함께 왕족의 지위를 포기하고 일반인이 되었다. 가치관에 따라 그들의 행동이 이해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뭐가 어찌 됐든 그들은 결단을 했고, 그 행동에 따른 책임을 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세기의 사랑꾼으로 남게 되었다.


나는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좋았던 부분이 영화가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문법을 그대로 이어갈 뻔했으나, 마지막 우리의 기대와 달리 현실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영화 결말 부분 두 주인공의 사랑은 이어지지 않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물론 짧은 시간 속 갑작스럽게 이성의 감정을 느꼈던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신분의 벽과 앞으로 다가올 것 같은 힘듦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고, 그렇게 아쉬움과 잊지 못할 추억만을 남긴 채 서로를 떠나게 된다. 이런 아련한 결말이 나에게 큰 여운을 주었고 그들의 미래를 상상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커피와 함께 신문을 들추며 공주의 소식을 찾아보는 그레고리 펙과 그런 그의 소식을 아무도 모르게 몰래 수소문하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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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여행하며 늘 어딜 가든 장소를 크게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로마의 휴일' 두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아직까지 현실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영화 속 오드리 헵번이 스쿠터를 처음 타고 로마 시내를 질주했던 것처럼, 많은 로마 시민들은 지금도 똑같이 그녀가 지나갔던 거리를 스쿠터로 다니고 있다. 영화 속 나왔던 '진실의 입' 장면처럼, 지금도 많은 여행객 커플들은 입속에 손을 넣으며 장난치고 있었다. 또한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주인공처럼, 지금도 로마를 방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계단에 앉아 젤라토를 먹고 있다. 이렇게 로마는 영화 속 낭만의 흔적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도시였다.


과거 2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포함 전 세계를 한 번 크게 휩쓸고 지나간 뒤, 사람들은 전쟁의 아픔을 극복하고 복원의 시기를 거쳤다. 전쟁의 주요 무대였던 유럽은 '마셜 플랜'이라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다 무너진 건물과 인프라를 재구축하고, 또 다른 다가올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도 이런 이해관계 속 탄생한 영화다. 영화를 보면 로마의 주요 대표 관광지들이 장면의 주요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렇게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낭만적인 로마를 방문하게끔, 그렇게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게끔 유도했던 것이다.


'로마의 휴일'은 재미와 작품성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세기에 남을 훌륭한 명작이지만, 영화 제작에 있어 로마 관광산업 부흥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면 그 또한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로마 도시에 대한 큰 환상을 가지게 되었고, 언젠간 꼭 방문하겠다 다짐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배경이 되었던 장소들과 주인공들이 걸었던 거리 속 나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직접 걸으며, 영화 속 그들이 느꼈던 어떤 감정과 흔적을 함께 따라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 세계에는 나같이 '로마의 휴일' 영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로마를 방문한 사람들이 꽤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La Città Eterna, the eternal city, Rome


단연 '로마의 휴일' 영화를 너무 좋아하는 팬으로서 로마를 여행하는 중 늘 영화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녔다. 실제 장소와 영화 속에 나왔던 장면을 비교하며 주인공이 만졌던 벽, 앉아 있었던 계단, 지나간 거리 등을 나도 쓸데없이 괜히 만져보며 과거의 배우들과 어떤 연결감을 느껴보고 싶었다. 이렇게 기록을 통해 과거와 현실이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로마의 휴일'의 두 주인공이었던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은 이미 오래전 고인이 되었지만, 영원의 도시 '로마'처럼 그들도 영화 속 영원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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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 다하는 순간



고전영화에는 과거 기술적 불완전함에서 오는 특유의 감성과 감동이 있다. 당시 기술의 한계이지만 노이즈 낀 사운도와 영상, 세트장의 분위기와 부자연스러운 특수효과들 등 고전영화만이 가진 특징들이 많이 있으며 이런 불완전한 영상미가 오히려 매력이 되어 왠지 모를 아련함과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 준다. 현대에 와서 기술이 발전해 고전영화의 영상들을 따라 하는 효과를 줄 수 있지만, 그때의 아날로그 감성을 그대로 다시 재현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애정하는 몇몇의 고전영화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가 앞서 언급한 '로마의 휴일'이며, 이 외에도 '카사블랑카' '싱잉 인 더 레인' '앵무새 죽이기' 등등 있다. 영상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 그리고 촬영기법이 조금씩 발전함에 따라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예술가들이 많아졌고, 이에 당연한 말이지만 고전영화에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작품들이 많이 있다. 그때의 영화감독들은 '영상'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개척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초현실주의, 미래 공상과학, 혹은 고전문학을 배경으로 다룬 고전영화들은 날 것 그대로의 효과들과 특유의 기괴한 분위기가 느껴짐에 감탄하기 일쑤이며, 더 나아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현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 감독들의 의도가 짙게 담긴 작품들도 많이 있다.


무엇보다 내가 고전 영화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오래된 영화에서만 느껴지는 어떤 순수함, 명확한 주제 전달, 그리고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점이 좋았다. 회자되는 좋은 고전영화들은 마치 고전문학처럼 낭만과 비극적 상황 속에서 주인공을 통한 인간의 고뇌와 철학을 들여다본다. 어떠한 가정의 상황들이지만 마치 실제로 내 앞에서 벌어진 것처럼 몰입하게 만들고, 주인공의 결단과 행동을 보며 자신만의 비평을 통해 생각의 틀을 넓힐 수 있게끔 유도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과 '카사블랑카'가 좋았던 점은 바로 이처럼 낭만적 이야기와 비극적 결말 그리고 거기서 인간적으로 성숙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두 영화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면 나는 그저 한낱 달달한 로맨스 영화로 치부했겠지만,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절제하며 미련이 남는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함에 따라 또 다른 사랑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었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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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좋은 '이별'이 있을 수 있을까. 이별할 당시에는 익숙한 존재가 갑자기 사라짐에 따라 마음 깊은 곳 공허함과 원하는 관계가 좌절된 것에 대한 미련 그리고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 이별을 고통이라 생각하게 된다. 이별은 깊은 상처를 남기는 고통이 맞다. 그러나 다행인 건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자 망각의 동물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선한 존재는 자신보다 상대방의 행복을 더 바라며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사람이다. 바로 '로마의 휴일'과 '카사블랑카'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보통 '이 다한다'는 뜻은 사람들이 가진 관계가 끊어진다는 뜻이다.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 상대방과의 교류를 더 이상 이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며, 더 극단적으로 봤을 때 서로가 알기 전의 상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못한 관계가 되었다는 뜻이다. 서로가 지속해서 교류를 이어갈 시 서로에게 더 해가 될 경우 이별을 선택하게 되고, 혹은 타의에 의해 더 이상 상대방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연이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알 수 없는 우연한 계기로 사람들은 인연을 맺는다. 하지만 인생을 살며 느꼈던 바 친구 관계도 연인 관계도 모든 인연에는 기한이 있는 듯하다. 인생의 절대적 시점에서 봤을 때, 인연이 된 사람들은 삶의 끝으로 향하는 도중 그 길이 잠시 겹친 것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 존재했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오랜 기간 함께 동행하며 힘듦을 같이 극복하고 서로 의지하며 먼 거리를 함께하게 된다. 나의 이런 생각은 마치 운명론 혹은 결정론의 철학을 받아들인 것 같다.


어쩌면 과거에 미련이 남았던 인연들을 붙잡지 못했던 나의 무력함에 대한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이별을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변수 속에서 인연을 붙잡으려 꽉 쥐면 쥘수록 그 인연은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사실 상황적으로 인연을 놓는 것이 옳다 하더라도 인연의 끈을 놓았을 때 오는 후유증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억지로 인연을 애써 붙잡을수록 인연은 더욱 악연으로 변모해 갔고, 결국 돌아오는 건 더 큰 상처와 검게 물든 빛바랜 기억뿐이었다.


아쉬움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인연에는 기한이 있다'는 운명론을 스스로 납득했던 것 같다. 우리는 앞날을 절대 알 수 없기에 생각지 못한 갑작스러운 이별이 다가왔을 때, 당장에야 먹먹하고 아쉽겠지만 연이 다했음을 금세 깨닫고 잠시 추억을 나누며 동행했던 인연을 보내주는 것이다. 인연을 놓친 게 아닌 보내주는 게 됐을 때 상대방의 앞날을 응원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길에 내가 없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나 조차도 지나간 인연이 있다면 또 새로 올 인연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며 함께했던 과거의 순간을 마치 앨범 속 한 장의 예쁜 사진처럼 마음속에 고이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생에 살다 보면 늘 아픈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그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 새살이 또 돋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흔적은 평생 남을 수 있기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지길 바랄 수밖에 없다. 처음이 중요하듯 마무리도 중요하다. 사람의 인연은 절대 억지로 욕심으로 미련하게 붙잡지 말아야 한다. 그건 상대방에게도 나에게도 더욱 큰 흉터로 남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연이 맺어졌을 때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연이 다했을 때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행복노트 #51

그 순간에 함께 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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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스타그램: @domki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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