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오시비엥침,
"악의 평범성"

유럽여행 포토에세이 #83 _ Oswiecim, Poland

by 김예담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폴란드 오시비엥침,

악의 평범성.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몸이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은 극심한 두려움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인간의 존엄성은 이미 버려지고, 짓밟혀 부서졌으며, 한 인간의 목숨은 날아다니는 어떤 파리의 목숨 보다도 못한, 아니 없어져야 마땅한, 생명을 갈망하고 자유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이자 당장 내일 죽음의 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삶을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특정한 상황 속 그릇된 신념과 광기에 휩싸인 인간들은 생각할 능력을 잃어 짐승보다도 잔인한 어느 한 괴물 같은 존재로 거듭난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를 지성체라 여기며 우월감 혹은 고귀함을 주장할 가치가 전혀 없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본인이 지닌 당연한 생각에 대해 끊임없는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 순간, 우리의 편견과 혐오, 증오는 무섭게 내면에서 발아하고 잠식한다. 내면의 싹을 자를 수 있는 것은 개인의 결단이자 성숙함이다. 만에 하나 그 싹을 방치한다면, 개인의 외면을 넘어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까지 전염되어 사회 개개인에게까지 부정의 감정에 영향받는 일련의 과정들을 겪게 된다.


증오에 기반한 생각은 무서운 법이다. 그 끝에 고통을 마주하고 죽음을 맞이하며 모두가 과했음을 인정하는 순간을 마주할 때까지 무섭도록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분명 지성인도, 선한 사람도, 중도를 지키는 자도 존재했을 터이나, 마치 큰 물결에 휩쓸린 나뭇가지처럼 자신의 신념은 꿋꿋이 유지하더라도 큰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옥이 현실에 펼쳐진 역사와 사건이 많다. 세상은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 사실 인간이 늘 아름답지 못하다. 우리 민족의 역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행하고 당했음을. 그리고 이는 인류 전체에 공통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음을.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잠에서 쉬이 깨지 못하고 온몸이 짓눌리는 듯한 피로와 근육통을 느끼며 하루의 일정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사실 중요한 날이다. 유럽여행을 계획하게 된 목적 중 하나이기도 했으며, 폴란드 크라쿠프를 방문한 이유이기도 했다. 인류사에서 인간이 행한 가장 잔인한 사건을 꼽을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참사의 현장이자, 그곳의 이름을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숙연하게 만드는 곳이다. 개인적인 견해로 살면서 한 번쯤은 방문해야 할 곳 같았다. 인간이 얼마나 이성의 끈을 놓고 광기에 휩싸일 수 있는지, 세뇌될 수 있는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 증오와 악행, 군중과 사회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곳,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는 곳, '오시비엥침'을 방문하는 날이다.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 때문일까. 이곳에 도착한 후부터 공기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숨이 막히는 듯했다. 지금껏 간접적으로 느껴왔던 슬픔의 감정으로 몸이 자연스레 반응하는 것 같았다. 저 멀리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문구를 마주한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들을 통제했던 집단을 향해 저항의 표시로 'ARBEIT'의 'B'의 철자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무력한 상황 속 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철제 게이트를 지나는 순간, 그들이 겪었던 세계로, 과거의 시간으로 흡입되며, 살아있는 현장에 내가 마치 수용소 속 한 인물이 된 것처럼 몰입하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1939년 9월 1일 평화로웠던 폴란드 전역에 갑작스러운 경보가 울리기 시작한다. 독일 군인들이 폴란드 서부 국경을 넘어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전쟁 1년 전, 독일은 '뮌헨 협정'에 서명하며 영토 확장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국제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를 침공한 것이다.


영국 수상 처칠과 같이 독일의 이런 돌발행동을 미리 예측하고 경고한 사람들도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국가가 무너진 경험을 한 독일 국민들은 굴욕감과 패배감, 무력감에 잠식되어 있었으나, 히틀러라는 한 인물이 등장하며 독일 국민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정치세력과 지지층을 넓혀가고 있었으며, 정도를 넘어 민족 우월주의까지 선동하여 그의 사상을 독일 전역에 퍼뜨리고 있었다. 이에 독일 국민들은 그의 지휘하에 무섭도록 단결했으며 또 팽창했다.



독일의 재무장, 기술력, 그리고 그들의 전술은 대단했다. 초창기 폴란드를 빠르게 무너뜨렸으며, 1년 뒤에는 프랑스 침공에 성공하는 등 유럽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의 자신감과 오만함은 하늘을 찔렀으며, 그들 사상에 대한 확신과 동시에 제국주의적 확장에 더욱 열을 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대외적인 팽창이 나날이 성공하고 있을 무렵, 내부에서는 그들의 과업인 인종청소가 자행되고 있었다.


우수하다고 여겨진 '아리아'인의 유전자만 남기고 퍼뜨리기 위한 각종 기행들을 펼쳤으며, 특히 사회악이라 규정되었던 유대인을 향한 노골적인 탄압과 통제가 시작되었다. 지금껏 독일 경제가 어렵고 국민들이 고통받은 원인은 유대인들의 탐욕 때문이었다고 규정해 유대인들의 거주지와 재산을 몰수했으며, 그들을 수용소로 보내 강제노동을 시키고 비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등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일들이 수용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유럽 전역에 지어진 수용소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은 오시비엥침, 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였다. 약 10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시설에 전체 약 130만 명 정도 이송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공식적인 기록으로 이곳에서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대인은 물론 전쟁포로, 폴란드인, 정치범, 장애인 등 그들 사상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대거 숙청했고, 매장할 장소가 없자 그들의 시신을 태워 그냥 호수에 뿌려버리는 등 잔인한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방문하면 실제 수감된 사람들이 생활한 장소를 그대로 볼 수 있다. 답답한 철조망 내 지어진 수감시설, 좁은 공간 속 인구 과포화 상태에서 추위와 배고픔, 두려움에 떨며 살아갔을 사람들의 모습이 현장에서 그려지니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지금에야 평화로운 시대 제 발로 이곳에 들어온 나지만, 당시 이 안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죽도록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수용소 안에는 그들이 세상에 남겼던 물건들이 아직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그 물건들에 깊은 슬픔이 깃들어있는 듯했다.


극단적으로 형성된 사회, 군중의 광기, 억압과 불평등, 부도덕한 행위, 죽음의 공포.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문학작품과 미술, 영화들이 전쟁 후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를 죽여야 지킬 수 있고, 누군가 죽어야만 끝나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많은 사건들이 벌어진다. 사건의 소용돌이 속 사람들은 생존을 건 극단적인 감정들을 느끼고, 죽음 앞에서 인간과 생명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그들이 경험한 사건과 인간의 광기에 있어 어떤 이들은 스스로 몸소 증거가 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죄책감을 시인하기도, 또 후대들은 그들이 느꼈을 깊은 감정과 고통을 반추한다.



전쟁 중에도, 이런 참사 속에도 깨어있는 사람들은 있었다. 대표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실화 기반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예로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는 동안에도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 목숨을 내놓고 고군분투한 사람들도 있었다. 늘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에 따라 행동한 훌륭한 위인들이었다.


그러나 영웅이 있으면 항상 악당도 있는 법, 수용소에는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으로 불려진 '요제프 맹겔레' 같은 인물도 존재했다. 수용소 내 의사로 복무했던 그의 경우,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인체실험과 고문을 하는 등 잔인한 일들을 벌였다. 특히 그는 수용소 내 수감자들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선별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가장 통탄할 일은 그가 전후 재판을 받지 않고 남미로 도주하여 그의 명을 끝까지 산 것이다. 신분을 위장한 그는 죽을 때까지 불안에 떨며 살았지만, 그가 받은 고통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준 고통에 비해 절대 동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전쟁범죄자들이 패배 후 남미로 도망쳐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사실 또한 비극적인 역사의 일부분이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전 세계 어디에서나 참혹한 일들이 벌어진다. 아무리 평화가 중요하고 전쟁이 나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도 탐욕과 증오, 복수와 생존 앞에 인간의 이성은 끊기고 서로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싸우고 죽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다수의 결정임을 빙자한 한 개인의 결정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들도 비일비재하며, 감시와 통제가 벗어난 극단적 환경에서 본능으로부터 기인한 악행 또한 흔하게 일어난다. 인간은 늘 스스로 파멸하고 살아나는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수용소 내부의 무거운 공기,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속 창가를 통해 한줄기 따뜻한 햇살이 들어온다. 그 빛에 이끌려 본능적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니 푸른 초원이 나를 반겨준다. 비록 철조망이 둘러싸고 있지만. 그 안에서 얼마나 자유를 갈망했을까.






악의 평범성



2024년 칸 영화제부터 아카데미 시상식 등 각종 작품상을 휩쓸어간 영화가 하나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라는 이름의 영화는 아주 평온한 듯 잔인하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 표면적으로는 어떠한 폭력적인 장면도,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의 어떠한 비극적인 장면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어느 평범한 독일 가족의 평온한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다. 다만, 그 가족이 나누는 대화, 들려오는 소리 등 간접적인 맥락과 요소들을 통해 관객들은 저 담장 너머 끔찍한 일들일 벌어지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게 이 영화는 우리가 알아온 역사적 사실로 악하다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표현되어 혼동을 일으켰고, 역설적인 대비를 통한 많은 생각할 주제를 주었다.


이외에도 2012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 또한 인간의 윤리와 도덕성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을 안겨다 주었다. 과거 인도네시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공산주의자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큐멘터리는 그때 당시 학살을 자행했던 군인들을 취재하고, 마치 그들의 영웅담을 듣는 것처럼 위장해 영상으로 기록한다. 충격적인 것은 그들 모두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과거 어떻게 사람들을 처단했는지 재연하는 장면을 통해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을 일절 느끼지 않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아직까지 인도네시아 내 군부 영향력이 살아있기 때문이고, 실제로 자신들 스스로를 영웅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화 바탕의 작품들을 통해 평범한 일반사람들도 자신도 모르게 언제든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과 반대로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주변에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죽인 것에 있어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걸까.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익을 얻겠다는 이유로 타인을 살해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을까. 현시대에서 볼 때는 어처구니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과거에 실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었다. 아니, 사실 이유만 다를 뿐 현시대에도 지속되고 있는 일이다.



전범재판과 관련해 유명한 사례가 있다. "자신은 명령만 따랐고, 자신이 지은 죄는 없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며 유대인 학살에 대한 죄를 부인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전쟁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여 악명을 떨쳤으나, 패망 이후에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아르헨티나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자신의 신상을 떠벌리는 바람에 덜미가 잡혀 정체가 드러났고 전범재판까지 회부되었으며, 선고를 받아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군인으로서 명령만 따랐을 뿐이며, 전쟁범죄에 있어 자신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았음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는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아이히만의 이런 발언을 심도 있게 분석한 이가 있었으니 유대계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다. 그녀는 선고 후 아이히만의 정신상태와 심리상태를 분석했고, 철학적인 관점으로 그의 논리에 접근했으며, 그녀의 연구 결과 최종적으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실제 본연적으로 악했던 사람들이 아닌, 평소 사유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이 확립되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성찰하지 못하는 것이 그 특징이며, 말 그대로 악행이 무지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뜻한다.


아이히만은 장교 직위를 수행할 만큼 충분한 지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감능력, 행동의 객관화, 그리고 깊게 사유하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전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가 자신이 지은 죄를 면피하기 위해 변명한다 여겼지만, 아렌트에 의해 정말 그가 생각 없었던 사람일 수 있겠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한들 그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아니지만, 본디 악하지 않은 사람이 잘못된 명령 하나에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군복무를 하던 당시, 나는 종종 어려움을 마주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인에게 '왜'라는 질문은 사실 금기에 가까운 것이다. 본래 '왜'라는 질문을 늘 달고 살아왔던 나에게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기는 것만 같았다. 이해되지 않는 작업에 있어 마음에 불만이 쌓였고, '왜'라는 질문에는 '그냥 까라면 까'라는 대답이 대다수였다. 이에 이성을 버려야만, 아니 개인의 자아와 주체성을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조직임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성향에 따라 다 장단점이 있음을 안다. 실제 한시가 위급한 상황, 명령에만 복종해야 하는 상황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나 같은 군인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반대로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군인은 아이히만과 같은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에 정답은 없고, 어느 정도 중용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내가 그 수용소 내 아이히만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아니 글쎄, 옆집에 철수가 사람을 때렸대."

"진짜? 그러고 보니 철수 평소 인상이 안 좋긴 해."

"맞아. 저번에 보니까 큰 금팔찌도 했더라고. 금품갈취하는 폭력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다. 걔가 그쪽 지방 출신이잖아."


이 짧은 네 마디의 대화에서 누군가가 사회악이 되었다. 이 대화에는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회악으로 단정해버렸고, 대화를 나누는 화자는 온갖 편견에 휩싸여있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일상생활에서의 대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류의 대화가 꽤 많음을 깨달을 수 있다. 어떤 편견이나 부정적인 감정에서 시작된 단정이 퍼져 주변 여러 다수가 인식하게 되고, 사실과 달리 소문이 커지며, 어떤 이가 문제 제기하여 그 사람을 축출하는 것이 권선징악처럼 정당화될 때,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다수가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군중은 최악의 인간상으로 치달을 수 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이유는 사실 자신의 생각하는 능력, 사유의 주체성을 타인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 때로는 이것이 생각의 과부하를 줄여 도움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닐 확률이 높다. 어릴 때 교육받은 것과 같이 모두가 'Yes'일 때 혼자 'No'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뚜렷한 주관이 있어야 한다. 주관이 없을 경우 아이히만과 같이 선동되기 쉬우며, 옳고 그름을 떠나 타인에게 휘둘리게 된다. 또한, 주관을 가지게 되더라도 스스로 지속적인 깊은 의구심을 품어 히틀러와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지성체로써, 이성을 가진 존재로써, 본능과 물질 이상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존재로써, 스스로에 질문할 줄 아는 존재로써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분할 수 있는 주체적 가치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가치관에 정답은 없지만, 삶의 경험과 배움에서 온 자신의 논리와 신념은 있기 마련이다. 세상을 살며 마주하는 극단적인 상황은 늘 사람을 심판대에 올릴 것이며, 생각의 주체성을 가진 사람, 사유의 깊이가 깊은 사람이 옳은 선택을 할 확률이 높다. 개인의 선택이 중요해지는 순간 중심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게 평소 늘 자신이 가져왔던 신념가치관이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은 중요하다.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등한시되기도 했지만,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가장 크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많은 시대적 작가와 예술가들은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았다. 그들이 겪었던 아픔과 슬픔, 고뇌한 흔적과 결과를 작품으로 남겼다. 따라서 우리는 직접 겪지 않더라도 그들의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고민할 수 있으며, 마음의 그릇을 넓히고 감정의 다양한 깊이를 느낄 수 있게 도와준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예술을 사랑하며,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행복노트 #80

주체적인 생각과 그것을 끊임없이 의심함에 지성체로 완성된다.


폴란드 오시비엥침,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곳을 구성하는 모든 귀퉁이에는 통한이 서려있는 듯하다. 잘못된 신념으로 고통받은 이들을 위한 비애, 잘못된 신념을 이행한 이들을 향한 분노의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들의 역사는 절대 끝나지 않았다. 마치 자연의 법칙, 진리처럼 모든 시대를 초월해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사유하는 사람과 무지의 사람, 옳음과 그릇됨, 양심과 본능, 도덕성과 자만심, 친절과 혐오, 희생과 탐욕, 책임과 도피 등 여러 관념적 혼돈이 마치 에너지처럼 휘몰아쳐 현실을 부수고 조립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죽음 뒤에 모든 영혼들이 치유받고 뉘우치며 그 끝에 평안만 영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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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스타그램: @domki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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