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84 _ Warsaw, Poland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겨울의 나라. 폴란드를 떠올릴 때면 왠지 모르게 늘 차가운 하얀 눈밭 혹은 그 눈밭이 밟혀 회색으로 짙어진 색감이 떠오른다. 순전히 무의식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인식이겠지만, 나에게 폴란드는 그런 차가운 나라였다. 폴란드 역사의 현장이자 아픔을 간직했던 도시 크라쿠프에서 기존과는 달랐던 새로운 여행의 기억을 남긴 채 동유럽 여행 마지막 도시, 폴란드 여행의 마무리를 장식할 도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바르샤바로 향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크라쿠프에서 출발한 기차가 바르샤바로 달리는 도중 갑자기 멈춰 선 것이다. 유럽여행을 시작할 무렵 비행기를 놓친 경험이 있던 나는 늘 이동수단에 변동이 생길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이번에도 분명 기차를 탑승하기 전 기차역에서 '바르샤바'행 기차임을 확인하고 탑승했지만 중간쯤 어딘가를 지나자 기차는 갑작스레 멈췄고, 승무원으로부터 이 기차는 바르샤바로 가지 않는다는 안내를 들어야만 했다.
상황을 파악해 보니 기차의 결함이 발견돼 멈춰 선 것이었다. 멈춘 역에서 다른 기차로 갈아타면 바르샤바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히 바르샤바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심적으로 아찔하고 불안한 감정이 지속 들었었다. '계획이 조금 틀어지면 어때'하며 스스로를 계속 다독였어도 혹여나 일정을 망칠까 봐, 바르샤바 여행을 즐기지 못할까 봐 걱정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번의 환승 끝에 약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한 바르샤바에서 나의 마지막 동유럽 여행의 여정이 시작됐다.
이른 아침 바르샤바 중앙역에 도착해 나를 제일 먼저 반겨준 것은 차갑고 짙은 먹구름이었다. 회색 안개 사이 높고 현대적인 건물들 그리고 과거 구소련 시절에나 볼법한 건물들이 시내 중심에 우뚝 서있었고, 버스를 타고 숙소에 짐을 맡기러 가는 길 내내 음습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르샤바 여행 초입부터 기차가 바뀌는 변수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일까, 아니면 여행 권태기에 빠진 걸까, 왠지 모르게 바르샤바의 여행이 전혀 기대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여행 전부터 바르샤바는 관광도시도 아니고 특색도 없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고, 새로운 장면을 포착하고자 노력했다. 무색의 현장에 마주할 수 있는 어떤 다양성, 생기 잃은 도시의 전경에서 일어나는 애환의 감정 등 마음을 열고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옅게 숨어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살아갔던 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그곳에는 언제나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내 여행의 목적은 그 이야기를 찾아가는 것이다. 안락하고 편안함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가치 있는 무언가, 외면과 내면을 이어주는 그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바르샤바에서 느꼈던 첫인상은 설레는 감정보다는 지루함 혹은 권태였던 것 같다. 그렇기에 더욱 첫인상에 매몰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시선을 열었다. 장소의 단면만 보고 판단했음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가졌고, 그와 동시에 해당 장소가 가진 매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서서히 바르샤바만이 지닌 감성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곳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임을. 이곳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곳임을.
사실 바르샤바에서 가졌던 첫인상이 전부 부정적이지 않았다. 기차역 너머 저 멀리 보이는 높은 건물 외벽에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의 로고가 당당히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자부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과 폴란드의 외교관계는 매우 좋은 편이다. 우리나라 해외 수출의 큰 고객이며, 특히 방산업 분야에서 큰 규모의 수주로 인해 양국 간의 경제적, 정치적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최근 유럽 내 전운의 긴장감이 고조됨에 따라 현재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군비를 대거 증강하고,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단계적 변화를 추진하는 등 평화의 시대가 점점 저물어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 폴란드다.
과분할 된 유럽의 지정학적 특성으로 유럽은 역사적으로 '국가'의 개념보다는 '지역'의 개념이 훨씬 강했다. 어느 지역의 귀족이 어느 왕과 협력할 건지, 혼인으로 인해 어떤 가문과 합칠 건지에 따라 힘의 균형은 시시각각 변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역사는 더욱 복잡해졌다. 유럽 중앙부 넓은 평야지대의 영토를 가진 폴란드도 과거 숱한 통합과 분할의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양 옆에는 게르만족, 슬라브족을 대표하는 나라 독일과 러시아가 있었기에 의도치 않게 강대국 사이의 완충지가 되어 늘 이 두 국가의 위협과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폴란드는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범슬라브 민족에 속하며, 이는 러시아와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두 국가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앙숙 관계이며, 무수한 침략과 갈등을 겪어왔기에 폴란드 입장에서는 러시아를 무조건 경계하고 적대시할 만큼 관계가 좋지 않다. 그로 인해 최근 러시아가 유럽의 안보를 위협하며 서쪽으로 전진하고 있음에 폴란드는 불안감을 느끼며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들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끔 사전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폴란드의 지정학적 특성은 우리나라와 매우 닮아있다.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나 국방력은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절대 뒤처지지 않을 큰 몸집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나라를 둘러싼 주변의 더욱 큰 국가들로 인해 늘 우리 스스로를 더욱 키워야 했다. 주변에 강대국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상생과 협력을 통해 성장 발판을 마련할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위협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과거 그리스 역사가였던 투키디데스의 말처럼 기존의 강대국들은 신생국가가 위협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이들 사이의 충돌은 거의 불가피하다.
폴란드와 비슷한 위치에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기적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식민지 시절과 전쟁을 겪은 후진국에서 마지막 선진국으로 우뚝 설 때까지, 그렇게 저 멀리 바다 건너 폴란드에 무기를 수출하는 경지까지 온 것 또한 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냉철한 계산 속 이루어지는 국제관계를 봤을 때, 이렇게 믿고 협력할 수 있는 가까운 국가가 생긴 것은 행운이자 복이다. 오랜 기간 서로 돕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되기를 기원한다.
삶을 살다 보면 어떤 묘한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세상의 균형을 맞춰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 에너지는 사람도, 자연도 아닌 물리적 세계를 벗어난 추상적이고 모호한 힘이다. 인간사회를 빗대어 봤을 때 때로는 중용이라는 이름으로 또 때로는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과함'에 반발하는 모든 생각과 행위를 일컬을 수 있다. 기존의 흐름과 반대하는 것이 늘 옳지도 않고, 급진적 진보가 아닌 과거로 회귀하는 과정일 수도 있으나, 그저 어떠한 중심에 맞춰 마치 '헬릭스(Helix)'의 형태로 균형을 찾아 나아가는 느낌이다.
이는 순전히 내가 현재 살아가며 느낀 개인적인 철학이다. '헬릭스'의 형태로 사회가 지속적으로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세상 혹은 사회는 더욱 좋아지고 있는 것일까? 그 또한 잘 모르겠다. xyz 3차원의 그래프를 예로 들어 z축이 사람의 행복도일지 혹은 그저 과학과 기술 발전에 따른 편안함만 나타내는 것일지, 시간을 넘어 과거의 사회와 행복을 수치화 혹은 데이터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현재 관점에서 각종 자료들을 찾고 추측할 뿐이다.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세상의 추상적 연구를 다룰 때는 늘 현재의 시점에서 비롯되는 지식과 경험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불가피한 주관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분명히 과거에 비해 삶의 질이 더 윤택해진 것은 확실하다. 의료와 위생의 발전으로 유아사망률이 내려가고, 사람의 수명은 급격하게 길어졌으며, 인구 증가와 경제 성장을 통해 전 세계 빈곤율도 낮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일상 속 효율과 편안함이라는 선물을 주어 보다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선사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행복도를 0에서 100이라 가정했을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의 평균 행복도는 더욱 상승했을까? 혹은 행복의 규모가 100에서 120, 150처럼 증가했을까? 상승 곡선이 아닌 하나의 중심선을 두고 그 사이를 지속적으로 왔다 갔다 한 것은 아닐까?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사회는 늘 어떤 평형상태(equilibrium)를 유지하려는 것 같다. 사회의 형태와 모양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지만, 그 안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비율, 일어나는 마찰과 갈등, 사건의 모습은 과거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반복되어 온 것 같다. 권력과 전복, 통합과 파멸, 이타와 이기의 폭 사이를 계속해서 움직이며 하나의 상태로만 흘러가지 않게끔 균형을 맞춰왔다. 이는 마치 과거 독일 철학자 헤겔이 주장했던 '정반합'의 철학을 인간과 사회, 시간과 개념의 변수를 두어 '합'의 상태를 이룩하는 것이다. 그 합의 상태는 평형상태다.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인간 비율 보존의 법칙'은 왠지 존재하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은 갖가지 개인 특성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 성향을 일정 범주에 묶어 그룹화할 수 있다. 특정 성향과 기질을 범주화했을 때 그 비율은 인간이 처음 생긴 시초부터 지금까지 자연의 법칙 혹은 진리처럼 유지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시대와 상황에 따라 특정 성향이 더욱 힘을 펼쳤겠지만, 수면 아래 나타나지 않은 사람들의 모든 기질을 다 합해본다면 그 합의 상태는 평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평형상태 관련하여 요즘 관심 있는 주제는 '생각의 깊이'와 '성숙' 혹은 '통찰'이다.
어릴 때는 모든 어른들이 다 진리를 깨우친 성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를 지키며 이상적인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인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내 주변에 있었던 어른들이 감사히 좋은 분들이었으며, 그들의 높은 성숙도가 나를 보호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시간이 흘러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을 만나 그들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내가 어른이 되어 그들과 동일한 선상에 섰을 때 성숙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이어졌다. 또한, 그 비율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에 놀랐다.
성숙에 있어 통찰을 겸비한 사고와 사려 깊은 마음, 그리고 부정적인 상황과 감정을 지혜롭게 다뤄낼 수 있는 연륜이 필요하다. 매우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실 현자에 가까운 아주 이상적인 이야기다. 성숙의 또 다른 뜻은 스스로 절제한다는 뜻과 동일한 듯하다. 인간이 본능으로 겸비한 1차원적인 감정과 욕구를 통제한다는 뜻이며, 그 뜻은 인내와 끈기, 어떤 고차원의 가치에서 비롯된 지속적인 노력이 있지 않는 한 따르기 어렵다는 뜻이다. 한 단계, 한 단계 성숙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인간이 가진 본능을 거스르고 지속적으로 멀어진다는 뜻이며, 아마 이 상태의 끝단계가 오히려 완전한 자유를 얻은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깨달은 자)'의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분명 좋은 가치임을 알고 있어도 이 길이 상당히 힘들고 험난하기 때문이다. 뇌과학 혹은 유전자적 기질에서 비롯된 사람의 특성인지, 혹은 정말 '인간 비율 보존의 법칙'의 평형상태에서 기인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성숙해지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쯤 하면 됐지'하는 생각 혹은 '착하면 손해 본다'는 주관 때문일 수도 있다. 요소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본능으로부터 비롯한 행복을 조금 더 추구하거나 또 다른 비성숙한 사람들에 대한 대응의 이유로 성숙하기를 결국 포기하게 된다.
사실 '모두가 성숙한 사회'와 '모두가 비성숙한 사회' 둘 다 고통의 사회다. '모두가 성숙한 사회'를 살기 위해 스스로도 끊임없는 내적 성찰과 내면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이겨내 그 사회의 일원이 돼야 한다. 반대로 '모두가 비성숙한 사회'를 살기 위해서는 무질서한 이기적인 사회에서 외적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즉, 성숙이 항상 옳은 길이 아닌 것은 사실이나, 성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단지 끊임없이 변하는 긴장된 사회에서 비성숙에 대응한 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자연주의 오류' 및 '도덕주의 오류'와 일맥상통한다. 자연적인 상태, 인간의 본능을 따르는 상태가 늘 옳은 것은 아니며, 반대로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이상을 늘 추구하고 강요하는 것 또한 정답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는 성숙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불행한 소크라테스' 격언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 가치가 나에게 고통이 된다는 사실도 잘 인지하고 있다. '생각의 저주'처럼 더 많은 것을 보고 알게 될수록 그것에 대한 고민의 범위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욱 넓어지기 때문이다. 성숙과 통찰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를 추구하지 않는 세상 속에 있다면 늘 번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만약 내 평형상태 이론이 사실이라면, 싫으나 고우나 어쨌든 나는 나의 역할을 발견한 것 같다. 그것이 나의 의지든 아니든 자연의 법칙으로 내가 그렇게 행해지는 것이든 아니든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균형을 맞출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 방식은 직접적인 것일 수도 간접적인 형식일 수도 있다. 시대를 관통하는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 정치적 위인들이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견제하고, 대항했으며, 은밀히 때로는 과감히 중심을 잡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성과 통찰을 담은 메시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행복노트 #81
편하다는 것은 주변에 나와 비슷하게 성숙한, 어쩌면 더 성숙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축복이다.
어른들 사이 어린아이가 가장 배려받고 행복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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