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90 _ Tallinn, Estonia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호접지몽. 나비의 꿈. 과거 도가 사상가인 '장주'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밭을 자유로이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꿈속 조금 더 환상적인 상상을 보태자면, 오색빛깔 다양한 색상을 품은 꽃들이 푸른 초원을 덮고, 각 계절마다 피는 가장 아름다운 꽃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곳, 그곳에서 나비는 이곳이 현실인지, 천국인지 어떤 생각으로 날아다녔을까. 나비에게는 풀밭의 싱그러움, 꽃이 지닌 색상의 조화, 잔잔한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따스한 햇살과 평화로움을 인지하고 행복을 느꼈을까? 아니면 나비는 그저 생명체로 존재하기 위한 세포 내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 매뉴얼만 따라 꽃의 꿀만 보았을까?
꿈에서 깬 장주는 헷갈렸다.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방금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혹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인지. 꿈과 현실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오히려 꿈과 현실이 반전되는 생각까지 이어진 것이다. 꿈은 정말 우리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무의식 속 한 장면, 한 편의 상상에 불가한 걸까? 우리의 영혼이 잠시나마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우주, 또 다른 차원들을 잠시 여행하고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꿈속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똑같이 흘러갈까? 시간은 환상이 아닐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 사물도, 사람도 환상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또 다른 누군가의 꿈속은 아닐까?
사람은 기억으로 존재한다. 기억이 지속적으로 중첩되어 자신의 고유 정체성을 쌓아간다. 다양한 자극들이 기억 속 각인되고 발현돼 움직이거나 자제하는 등 의식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매일같이 당연히 청하는 잠, 그런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지금껏 살아온 기억이 갑자기 이어지지 않고 멈춰있다면, 마치 영상필름을 가위로 잘라내듯 뚝 끊어버린다면? 무(無)의 세계, 공허의 세계, 혹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아노미(Anomie),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암흑의 느낌에서 확 깨어나 갑자기 현실을 마주한 느낌. 던져진 느낌. 기억이 없다면,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때부터는 꿈과 현실의 세계는 구별하는 의미가 없어질 것 같다.
장기간의 유럽여행. 지금껏 살아 존재했던 나의 정체성은 한국에 잠시 맡겨두고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고,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는 잠시나마 무의식 세계에 묻어두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틀 안에 가두지 않는다면, 여행 중 늘 나의 새로운 모습, 새로운 면모, 새로운 생각과 감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스로 꿈속 나비가 된 것이다.
자유로운 나비가 되어 훨훨 날고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본능에 따라 꿀만 쫓아다니는 생명체는 아니었다. 의식을 지닌 생명체였다. 늘 주위의 변화를 인식하고, 아름다움을 찾았으며, 사색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외부를 돌아다니는 여행이었지만, 사실상 내면을 향한 여행이기도 했다. 너무나도 사소하고 당연해 일상 속에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모든 것이 낯선 타지에 오자 경의로움과 특별함이 되었다. 죽어있던 영혼이 살아난 것이다.
나는 '살아있음'을 '깨어있음'으로 정의한다. 우리가 숨을 쉬고, 심장이 뛰며, 평소 일상생활을 하더라도 나는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에 들기 전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 돌이켜볼 때 쇼츠영상처럼 순간들이 드문드문 기억나는 게 전부일 것이다. 분명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적어도 12시간이 넘는 하루를 보냈을 터이나, 그 시간들은 그저 물 흘러가듯 지나간 것이다. 머물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졌고, 집중했고, 자극이 됐고, 기억하고자 붙잡았던 순간만큼은 남아있다. 깨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깨어있었기에 주변을 '인식'했고, '생각'했고, 더욱 느꼈다. 이런 깨어있는 순간이 많아지는 만큼 경험과 생각은 축적돼 더 단단하고 짙어지며 내실 있는 '내'가 되어간다.
한국에서의, 미국에서의, 유럽에서의,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나 현재 서울에서의 나는 과연 살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현실과 허상이 계속해서 뒤바뀌며 장주와 나비처럼 계속 헷갈리는 것일까.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사회에 찌든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점점 표정을 잃어가고 있다. 아니, 죽어가고 있다.
탈린에서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정신적으로 피로했던 건지,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랐던 건지 모르겠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기 싫었다. 언뜻 보이지 않는 쇠창살이 온몸을 휘감아 당장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핑계라도 스스로 대고 싶었다. 지금 당장 일어나 숙소 밖으로 나서지 않으면 그날의 계획은 모두 틀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거의 처음 있는 일이다. 무기력한 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
나는 여행에서 생각했던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에서 효율성을 추구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사전에 비용과 동선, 상점 운영시간, 심지어 일몰일출 시간까지 조사해 최대한 나의 통제 하에 만족스러운 여행이 될 수 있게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운다 한들 현지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사고들은 절대적으로 예상범위 밖의 일이었다. 완벽한 준비가 되었다 확신한 나를 비웃듯 톡 건드려 휘청거리게, 비틀거리게 만든다. 어쩌면 이런 사고들이야말로 여행의 진수이자 진정한 묘미일지 모르겠지만, 그 상황이 막상 닥쳐오면 불안과 공포 그리고 좌절의 감정은 그리 썩 유쾌하지 않다.
때로는 계획이 여행을 잡아먹는 것 같기도 하다. 이곳에 아무 생각 없이 즐기러 왔다 생각했지만, 알고 보면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며, 피로 가득한 몸으로 숙소에 돌아온다. 이럴 때면 내가 충전을 위한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일상에서 어떻게든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지만, 여행만 가면 전투적 삶으로 바뀌게 된다. 여행 시간과 장소에 대한 희소성으로 인해 일분일초가 소중하고 시선이 닿는 그 모든 장면이 소중하다.
부지런한 여행도 좋지만 이런 전투적인 일정이 지속될 경우 금세 체력이 동이 나게 된다. 인간은 일과 휴식에 균형이 필요하다. 각성 상태와 회복에 대한 시간 안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번아웃 상태로 접어들기 마련이다.
탈린 숙소에서의 침대, 오후 2시가 넘어가는 시점이지만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 내면의 두 자아가 계속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한쪽은 계속 여행을 하자고 부추겼고, 또 다른 한쪽은 쉼을 부추겼다. 지속적으로 쉼의 자아가 이기고 있는 듯했다. 특히 기존 계획했단 탈린의 박물관들과 주요 관광지는 모두 숙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여행에 대한 욕구는 더욱 사라져만 갔다.
당장 다음날 오전이면 핀란드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분명 유럽여행이 끝난 뒤, 탈린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 들어올 것을 직감했다. '그냥 산책이라도 조금 할까? 설령 10분, 20분 뒤 다시 숙소로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면 되잖아'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머물렀다. 멈추고 싶을 때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을 경우 성장하는 것을 알고 있다. 여행을 원하는 자아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오늘의 일정을 전부 취소하되, 일단 문밖을 나서기로 했다. 나서면 어떤 식으로든 무기력이 극복될 것 같았다. 그렇게 탈린의 구도심을 향해 어려운 발걸음을 옮겼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이름의 유래는 신기하게도 '덴마크의 도시'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는 탈린 도시 기원이 덴마크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이다. 과거 13세기 덴마크의 국왕 발데마르 2세가 덴마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 중 현재의 탈린 구도심 위치에 성을 세우면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 발트해 연안 좋은 위치였던 탈린은 도시가 세워짐과 동시에 교역으로 금방 성장하며 발트해 주축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특히, 초창기 세워졌던 성터의 모습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탈린의 구도심을 산책하다 보면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한 국가의 수도명이 다른 국가로부터 유래한 것, 그리고 그것을 그냥 그대로 두고 사용하는 것에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쿨함(?)을 언뜻 느낄 수 있었다. 에스토니아도 발트 3국의 다른 국가들처럼 숱한 외세의 지배를 겪어온 복잡한 역사를 지닌 국가다. 심지어 탈린의 경우 우리나라와도 연이 있는 도시인데,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임기를 마친 탈린의 前 시장 미하일 콜바트는 고려인 혼혈이다. 공감되는 역사 배경, 고려인을 통한 직접적인 연결성, 이외에도 현재의 탈린은 우리나라와 닮은 부분이 많아 보였다.
탈린은 디지털 사회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스마트시티'로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도시다. 과거 인터넷 보급이 활발해지며 디지털 붐이 일어난 시기, 탈린은 진즉에 사회 공공분야와 사업들을 디지털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관공서 문서, 세금, 은행은 물론, 투표와 헬스케어 심지어 영주권까지 디지털 정보로 구축하였고, 아날로그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편함을 없애고 효율성을 높여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는 등 도시 전체를 전자화하여 편리성을 추구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단연코 높은 IT 기술과 보안이 밑바탕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기술력은 지속적으로 발전되고 있고, 전 세계 많은 국가, 도시들이 벤치마킹하는 등 미래지향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옛 과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탈린 구도심이었지만, 탈린이 다른 어떤 도시들보다도 미래에 머물고 있다는 점은 어딘가 묘한 시간 왜곡의 감정을 전달해 주었다. 어쩌면 살면서 평생 몰랐을 수도 있는 사실들, 그곳에 직접 방문했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새로운 지식들, 그리고 그 속에서 깨닫는 나만의 생각들. 세상은 침대 밖, 창문 밖, 안전지대를 넘어선 그곳, 그곳에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탈린 구도심을 조금 산책하고 나니 무기력감이 조금 사라지는 듯했다. 무기력할 때는 오히려 몸을 움직이는 것이 도움 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무기력할 때는 어떠한 강박으로부터 나에게 자유를 주어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집중하고 즐기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소소한 일거리나 강도 낮은 운동을 통해 모든 불안과 걱정,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소소한 성취 그리고 발견하는 소소한 행복은 자기 효능감을 얻는 동시에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영양분이 된다.
침대를 벗어난 덕분에 탈린을 수놓은 아름다운 장면들을 대거 포착할 수 있었다. 요즘 들어 많이 느끼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가 의식하거나 인식하고 있지 않는 일상의 장면들에는 수많은 아름다움이 깃들어있다는 것을, 셀 수 없는 감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모든 것이 행복으로 뒤덮여있다는 것을.
이른 아침의 해가 밝았다. 탈린을 떠나는 날이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발트 3국 여행은 이제 끝나고, 진정한 북유럽이라 할 수 있는 스칸디나비아의 일정이 시작된다. 핀란드 헬싱키로 넘어가기 위해 페리 선착장을 찾았다. 국가 간, 도시 간 이동에 있어 주로 기차와 고속버스를 활용해 왔지만, 옆나라 러시아 국경이 폐쇄되어 핀란드로 넘어가기 위해 부득이하게 페리를 이용해야 했다. 다채롭게 변화하는 풍경을 볼 수 있기에 지상의 이동수단을 선호했지만, 푸른 발트해 바다를 건너는 페리도 즐겁게 다가왔다. 혹여나 배를 놓칠까봐 한 시간 일찍 도착한 선착장, 항구와 떠있는 배들 사이로 여행의 시점과 현실의 시점이 겹쳐 보였다.
나는 무역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세계지도를 보며 전 세계를 탐험하는 꿈을 키워온 나는 당연히 직업도 그에 맞게 여행이 일상이 되는 일을 꿈꿨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직업군 중 경제적으로 또 업무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직장이 무역회사였고 실제로 업무차 자주 해외를 나가는 등 일정 부분 직업의 꿈은 이룬 듯하다.
나는 노동이 인생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을 하지 않고 게으름으로 뒤덮인 삶이 건강하지 못하며 더욱 불행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형태의 노동이든 생산적인 활동을 통해 사람은 효용감이나 유능감을 느끼며, 이는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물며 소소한 집안일이라 하더라도 일과를 끝마쳤을 때 마음속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았다는 뿌듯한 감정이 들기 마련이다. 가치관의 차이도 있겠지만, 인생을 보다 주도적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성취감과 성장감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노동은 조금 다르다. 주도적인 삶과 자아실현을 목표로 일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현실 대다수는 먹고 살아가기 위한 노동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시간을 아껴주고, 누군가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에서 우리는 임금을 받고, 그 임금을 대가로 우리의 시간과 노동을 맞교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부족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팔 수밖에 없다. 자본이 있더라도 그 자본에 대한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는 사람들도 필연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팔게 된다. 특히 지금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기, 노동 공급이 수요보다 많을 경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자아실현이 아닌, 자아억압, 더 넘어 자아상실까지 이어진다.
“노동은 다른 모든 상품처럼 하나의 상품이며, 따라서 그 가격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 노동의 생산 비용은 노동력을 유지하고 노동자 계급이 모두 죽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생활 수단에 근거한다. …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대가로 이 목적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벌지 못한다.” (p.72)
"현대 자본주의가 모든 노동자를 임금 노동자로 전락시키는 한, 노동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오직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가 요구하는 정도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p.157)
<공산당 선언>
아침 7시 40분, 직장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 서울의 지하철은 인파로 가득 매워져 천장의 숨 쉴 공간만 작게 비어있다. 흔들리는 지하철 손잡이를 부여잡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 의자에 앉아 얼굴에 열심히 파우더를 두드리며 화장을 고치고 있는 사람, 닫히는 문틈 사이로 꾸역꾸역 지하철 칸에 몸을 집어넣는 사람, 밀지 말라며 여김 없이 들리는 말다툼 소리, 평소 자주 벌어지는 일이기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들 등 무표정의 사람들 속 기괴한 풍경은 어느덧 인간의 존엄성과 합리적인 사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
1889년 파리 노동자 회의에서 등장한 여덟 시간 근무제는 현재까지 노동 시간에 대한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OECD 국가들 중 근로시간이 최상위권에 자리하며 많은 이들이 노동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한 점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수도권의 경우 출퇴근 시간이 몇 시간에 달하는 등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여유를 잃어버리고 분노를 쌓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 구축되어 있는 것 같다. '현실'이라는 이유 하에, '모두가 이렇게 산다'는 이유 하에 우리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도태되지 않으려 우리 스스로의 가치를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동자 계급 … 일자리를 찾는 한에서만 생존하며,
자신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식시키는 한에서만 노동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급이다.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우리나라의 경우, '책임'으로 점철된 사회다. 아니, 모든 사회가 '책임'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그 강도가 더욱 유연하지 못한 것 같다. 동양 특유 집단문화와 군대문화가 더해져 시스템이 고착화되는 경우가 많으며, 공동체와 결이 다르거나 시스템을 벗어나는 행동을 할 경우 정치와 퇴출의 희생양이 된다. 눈치를 보고 면피에만 초점을 둔 업무 태도는 혁신을 저하시킬 수밖에 없으며 매너리즘에 쉽게 빠지게 된다. 이외에도 서로 문책하여 협력을 방해하고 신뢰하지 않는 문화를 형성하는 등 서로에게 더 차가워진다. 이는 사회 전반적으로 사람 관계에 쉽게 피로를 느끼게 만들고, 사회는 더욱 각박해지는 결과를 야기한다.
기업에도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은 당연히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최고 이익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여기에는 어느 정도 구성원에 대한 존중과 윤리적 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전부터 경쟁과 성장, 속도에만 초점을 맞춰온 근 몇 십 년간의 기업문화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과를 만들어낸 사람들을, 그리고 윗선의 지시에 거역하지 않는 사람들을 주로 성장시켰다. 이러한 인간상의 특성상 유연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적 흐름에 경직된 조직을 만들어 언젠가 도태될 운명에 처한다.
교육이란 엄청난 수의 사람들에게는 기계로 양성되는 것을 뜻한다.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과거를 참고하고, 현실을 살아가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새롭게 자라나는 세대에게 '노동'의 의미는 점점 바뀌고 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사라지고, 회사가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즉에 깨달았으며, 회사에서 희생을 강요할 경우, 몸과 시간을 갈아 넣는 노동 문화는 더 이상 없다. 지금껏 살아남기 위해 윗세대 말만 믿고 학창 시절부터 경쟁에 경쟁을 겪으며 자신의 삶을 갈아 넣어보았지만 현실의 결과는 녹록지 못했다. 무력감의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받은 만큼만 일하자'의 세대, 아니 받은 만큼만 일해도 다행인 세대가 등장했다.
사회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다. 그리고 직업에 따른 노동 강도나 사회적 인식이 다르며, 시대적 흐름에 따라 자라나는 세대의 직업 선호도 또한 매번 달라진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이상을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로 두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예로부터 몸 쓰는 일을 선호하지 않는 문화상 차별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인 듯하다. 수요와 공급 법칙에 따라 직업에도 필요한 사람 수가 정해져 있는 듯하며 그 안에 들지 못하면 누구든 불만이나 반감, 열등감, 패배감, 그 끝에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쨌든 직업과 직장이란 하루 대부분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곳이지만, 노동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 시간과 노동은 낭비로 인식될 수밖에 없고 무력감, 무의미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결국 주도적 삶을 살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노예라는 말을 혐오한다는 것이
노예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산당 선언>, p.131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기계가 된 느낌이다. 나비처럼 훨훨 날고 싶어도 매일 지하의 세계를 돌아다닌다. 관료주의적 색깔이 짙은 사회의 경우, 노동자가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착취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것일까, 삶에 의미를 찾기 때문에 현실에서 동떨어지는 것일까. 과거 의미에서의 노예가 현대 '근로자'라는 의미로 이름만 변모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우리 스스로 노예라 느낄 수 없게끔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각박하고 여유 없는 세상일수록 사람들은 사유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사람들에 치일수록 인류애를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부가 일반적인 것이 되면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 결국은 소수의 특권층이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들을 몰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계층 사회의 장기적인 존속은 가난과 무지를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 p.264
“상층계급의 목표는 현재의 상태를 고수하는 것이고, 중간계급의 목표는 상층계급으로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하층계급이 목표를 가졌다면 … 그것은 모든 차별을 폐지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p.278
<1984>, 조지오웰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결점을 직시하고 고발했다. 비록 그가 제시한 공산주의 체제는 인간에게 이상에 가까워 실패하긴 했어도 사실 그가 실패했다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이 실패했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적절한 것 같다. 역설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정답인 것이다. 그가 제시한 방법론에도 오류가 많지만, 적어도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배경에는 인간에 대한 도덕성과 노동자들을 향한 측은지심에서 비롯한 부분은 높이 살만하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상을 좇지만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할 모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코 모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는 없다. …
생존의 필요성을 넘어 욕구를 확대시키는 상상력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p.57, 라인홀드 니버
분명 노동자가 아닌 사장님 마음은 또 다를 것이다. 그에게도 생존의 문제, 자아실현의 문제, 책임의 문제 등 다양한 이해관계 속 사업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업 구성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사업을 함께 키워나가며 자본을 증식시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크게 지출되는 인건비가 부담스러울 수 있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기대하기도 한다. 이는 숫자로 값을 매길 수 있는 물질적 가치와 숫자로 값을 매길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가치가 상충하기 때문에 적절한 타협점을 찾기 어렵다. 만에 하나 극단적인 경우, 사람이 아닌 침팬지가 업무효율성이 더 좋을 경우, 사람을 대거 해고하고 침팬지를 고용할 수도 있으며, 이는 사람의 노동적 가치, 존엄성에 대한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노동자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은 그들의 생계와 종족 번식을 위해
필요한 생활 수단으로만 거의 제한된다.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최근 등장하는 AI 기술은 노동의 가치를 더욱 저하시키고 있다. 사람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수행하던 업무는 AI에게 질문 한 번 하는 것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고, 데이터가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노동 시장에서 사람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과거 노동자들 스스로 기계를 파괴했던 러다이트 운동이 21세기 현시점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AI가 등장한 만큼 또 다른 새로운 직업군들도 등장하겠지만,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사회는 측량할 수 없는 정책적, 윤리적, 철학적 여러 수용량에 우리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까.
나는 그저 사람들이 같은 사람들의 가치를 서로 폄훼하거나 저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침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것과 같으며 언젠가 화살로 되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이 또한 이상적인 방향인 것을 알면서도 나는 늘 모두가 서로를 도덕적 박애와 존중 속에서 경쟁보다는 화합에 조금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노동은 소중하다. 시스템 속 서로를 평가하고, 질책하고, 멸시하기에는 우리 각자가 너무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삶을 감사와 행복으로 채우기에도 부족하다. 우리의 현실이 이상과 멀어도 이상을 추구하는 모순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은 더욱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인간은 불안해하는 존재다. …
불안은 이기심의 토양이다. …
교만은 자기중심적인 행위를 낳고 자기중심성은 불의를 낳는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
"현대의 전문인들의 경우에서처럼 특별한 능력이 권력과 결탁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평균 수입보다 높은 여분의 수입이 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대군주들(대자본가들)의 잉여 수입과 비교하면 형편없이 낮은 것이다. 이 경제적 대군주들은 산업사회에서 진정한 권력의 중심이다.", p.65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부유함에 대한 욕망, 경쟁 속 생존본능, 그리고 인간으로서 무한한 물질적 자유를 추구함에 있어 생산의 증가, 기술의 발전, 그리고 민주주의나 교육 등의 측량할 수 없는 여러 분야에 있어 많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량에 따라 좁혀지지 않는 빈부격차, 정보 과다에 따른 열등감과 무력감, 새로운 계층사회가 형성되는 등 다른 형태의 같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로써 사회의 제도, 사상과는 별개로 인간 속 내재된 본능과 욕망은 그 모습만 달라졌지 시대를 초월한 같은 문제를 지속 야기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저 통찰력을 지니고 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그때마다 어떻게 대처하고 지혜롭게 헤쳐나갈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 전체의 고민이 되어야 한다.
행복노트 #87
인간은 존엄하다.
핀란드 헬싱키로 향하는 배는 출발했다. 땅은 사라지고 전방위 일렁이는 파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느낌이다. 내 인생도 모든 방향과 가능성을 둔 망망대해에 떠있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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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스타그램: @domki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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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칼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책세상, 2018.
조지 오웰, <1984>, 민음사, 2007.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