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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Jun 21. 2023

낯선 이의 죽음

수요일 새벽 장례미사를 다녀오며

정말 오랜만에 미사를 다녀왔다. 세례 받은 뒤로 가지 않았으니 2년 조금 넘게 성당에 가지 않았던 듯. 새벽 5시 30분경 갑자기 눈이 떠졌는데 미사를 가고 싶었다. 요 근래 학교에서 신부님들도 뵙고 캠퍼스 곳곳의 가톨릭의 상징들을 봤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제 가톨릭과 개신교의 동질성에 관해 애정하는 카페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삶과 죽음이 주제였다. 무슨 인연인지 오늘 새벽 6시 미사가 장례미사였고 먼저 떠난 이를 위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


미사 중 신부님 말씀 중 분명히 와닿는 부분이 있었는데 "신앙인들에게는 죽음이 하느님 곁으로 가는 일이니 슬픔만은 아니다."라는 것.

내가 생과 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수술을 해봤기 때문에 유독 그런 것 같긴 하지만 최근 아이들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의 엄마가 써 내려간 투병일지를 보게 되었고, 팔로우하며 그 아이가 낫기를 진심으로 기도했었다. 제대로 된 이유식조차 마음껏 먹어보지도 못한 채, 하느님 곁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엄마의 품에 처음으로 안겨본 안긴 아이. 화면 너머의 사진으로만 본 아주 작은 아가였지만 그 아이가 낫기를 얼마나 애타게 바랐는지 모른다. 그 부모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


"신이 착하다는 건 인간의 관점 아니야?"

무고한 아이의 죽음을 두고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내게 H가 건넨 말. 신이 선하다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이라는 것. 가톨릭계열 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그는 삶과 죽음의 현장이 주된 생활 터전이다. 내가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접한 죽음보다 훨씬 숱한 죽음을 마주하는 그는 신의 선함은 우리가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나고 자란 과외학생 J는 고민을 해결할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된다고 했다.

"선생님, 신이 없다고 가정하면 신의 선함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이 돼요."

나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관점이다.


지극히 범속한 세계에 살면서 물질적 가치에 매몰되어 갈 때면 이렇게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이정표가 하나씩 생긴다. 19살,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생사의 갈림길에 마주 섰던 경험은 가끔씩 삶의 의미를 고하게 만든다. 매일 주어진 일을 해나가다가도 내 일의 궁극적 목적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임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최근 나의 사업체 이름으로 시설에서 자립하는 청소년들을 돕기 위한 기부를 시작했다. 무슨 조화인지 고아원에서 사회로 나가는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거래처 대표님께서 작년에 비슷한 일을 시작했며, 내 뜻에 함께하겠다고 말해주셨다. 내가 개인으로서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는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이런 마음을 함께할 수 있는 동료들이 생겨나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다시금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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