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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쓰는 이다솜 Aug 11. 2017

외로움, 극복 아닌 공존하기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모임에 나갔다. 그러나, 몇 시간을 시끄럽게 웃고 떠들었는데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마음이 적적할 때가 많았다. 허무하기도 했다. 이런 밤을 되풀이하면서 깨달았다. 그저 혼자인 것이 어색해서,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절친한 친구, 유대가 깊지 않아도 재미있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만을 가끔씩 만났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시끌벅적한 모임은 일 년에 몇 번이면 충분했다.


자연스레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처음에는 곤욕이었다. 친구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 SNS에 접속했고, 때때로 의미 없는 메시지도 주고받았다. 역시 한계가 있었다. 결국 고독이라는 크고 깊은 심연을 피할 수 없었다. 외로움은 마주 보고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었다. 오랫동안 홀로 시간을 보내면서, 또 친구들과 대화하며 알게 됐다. 외로움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친구가 많든 적든 연애 중이든 아니든 관계없었다. 나이가 많은 어른도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도 외로움 앞에서 평등했다.     


점차 혼자인 시간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 갔다.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고, 조용한 서점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골목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기웃거렸고, 카페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끄적거렸다. 보고 싶은 전시가 있으면 미술관에서 질릴 만큼 그림을 보다가 나왔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게 됐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처럼 혼자인 사람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누구와 왔는지, 무얼 하는지 걱정했던 것만큼 관심이 없었다.     


외로움은 불현듯 찾아왔지만, 빈도나 강도는 줄어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두렵지 않았다. 외로움은 더 이상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가끔씩 때가 되면 찾아오는 것, 지나치게 의식하기보다는 나의 내면이나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멀어져 있는 감정이 됐다. 외로움과 공존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된 뒤로,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도 전보다 더 즐거워졌다는 것이다. 외로움에 떨지 않게 되면서 단단해진 내면이 자신감을 키웠고, 잦지 않은 지인들과의 만남이 더욱 소중해지면서 최선을 다하게 됐기 때문이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외로움’이라고 치면 ‘극복’, ‘이기는 방법’ 등의 키워드가 연달아 나온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고, 이겨내려고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외로움을 영원히, 완전하게 떨쳐내는 방법 같은 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외로움과 인간 존재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외로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니, 외로움과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보자. 내면에 몰두할 수도,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도, 즐거운 일에 탐닉할 수도 있다. 집에서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며 게으름을 부리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좋다. 단, 이 모든 해법의 열쇠는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아닌 자신에게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부정적으로만 여기기 쉽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는 외로울 때 가장 많이 사색하고 성장했다. 조금은 편안하게 외로움을 받아들여 보자. 마음을 달리 먹는 것만으로도 혼자만의 시간은 더 풍성하고 충만해질 것이다.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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