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뛰게 만드는 역사 이야기!
어제(12/4,목)는 몹시 추운 날씨였지만, 작심하고 경주의 세 곳을 급하게(?) 찾아갔다. 경주 유적에 대한 책과 글을 읽는 중에, 갑자기 천년 고도(古都) 신라를 더 직접적으로 느끼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울산에서 경주로 가다 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왕릉은 원성왕릉이다. 괘릉(掛陵)이라고 알려져있는 왕릉이다. 지난 번에 가봤기 때문에 그냥 통과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몇 가지 잘 알려지지 않은 왕릉도 있었지만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을 들렀다. 낭산이라는 경주 유적지구의 중심부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의 거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신기한 것은 그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아래 지점에는 통일 신라 최초의 절이라고 하는 사천왕사의 절터가 마치 선덕여왕의 수호자들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실제로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기 전에 미리 이 자리를 묘(墓)자리로 직접 지정해 두었다고 한다. 여왕의 사후 30년 뒤에 이처럼 사천왕사(四天王寺)가 그 앞에 세워진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忉利天), 즉 극락을 의미하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선덕여왕릉은 사천왕사지 바로 윗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과연 죽기 전에 이미 이렇게 훗날에 사천왕사가 세워질 것을 알았던 것일까!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설화인지 역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실이었다고 하면 대단한 예지력이었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실로 영험한 왕이었나 보다.
아쉬운 점은 왕릉으로 올라가는 거리가 600m 정도였는데, 초행길에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표시판이 제대로 안보이거나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천왕사지 뒤로 조그맣게 연결되어 있는 작은 철문도 금새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가야하는 길도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훌륭한 여왕이었기에 만나기도 어렵게 한 것일까. 하지만 정작 왕릉을 봤을 때는 경주 중심가에 있는 다른 왕들에 비해 매우 소박하고 검소하게 느껴졌다. 아니 초라하게 보였다는 게 맞을 것 같다. 왕릉을 가리키는 비석도 이처럼 작게 만들었다니... 이것도 여왕의 뜻이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 좀 더 인간적으로 푸근하게 느껴졌고 친숙함마저 느꼈다. 산도 높지 않으니, 자주 오고 싶은 마음까지 생긴다. 소박함은 사람을 친근하게 만들어준다.
황성공원은 경주시의 중심부에 있는 대표적인 공원이다. 이곳에는 여러 조형물과 함께 경주 시립도서관이 있었다. 그 안에서 본 <신라왕경도>와 <신라사연표>가 인상적이었다. 근처에는 축구장과 예술의 전당까지 함께 있어서 경주 시민들의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나는 먼저 도서관에 들렀다가 곧 바로 6.25 참전탑과 월남전 참전 용사 기념탑에 가보았다. 이 지역에서도 나라의 부름을 받고 조국과 동포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유 수호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숭고한 희생을 했던 분들이 매우 많았다. 이분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이어서 경주 출신의 신라 명장 김유신장군의 동상이 있는 언덕에 올라갔다. 넓은 평야 같은 공원에 산처럼 우뚝 솟아있는 둔덕 위에 대형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고, 말을 탄 채 장군은 칼을 높이 들고 적군을 향해 돌진하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장군의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동상 건립을 명했던 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력 신장을 향한 염원까지 크게 느껴졌다. 원래 김유신은 멸망한 가야 왕족의 후예로서, 532년 금관가야의 항복 후 신라 귀족 가문으로 편입된 집안의 후손이다. 그는 신라의 화랑이 되어 활동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큰 인물이 되었고 결국에는 통일 신라의 주역이 되었는데, 그의 증조부때 가야(伽倻), 즉 지금의 김해 지역에 있었던 나라에서 신라로 귀순한 집안이었다. 중요한 것은, 아직 확실한 정설(定說)로 된 건 아니지만, 가야가 예수의 사도 도마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초기 한반도의 기독교 국가였다는 학설이 끊임없이 한국 교회사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나는 더욱더 신라 시대 경주의 역사에 관심이 끌린다.
나를 오늘 여기에 급하게 오게 만든 직접적인 동인은 바로 이것이었다. 알천제방수개기(閼川堤坊修改記)! 그 뜻은 이곳 ‘알천’에 쌓아두었던 제방이 물이 범람하여 무너졌는데, 다시 고치고 수리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둔다는 뜻이다. 그것을 바위에 새겨두었는데, 그동안에는 흙에 잠겨 있어서 사람들이 못 알아봤다가 1980년 11월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바위가 아니라 거기에 기록된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기록이 보여주는 당대의 역사, 바로 그것이었다. 단순히 홍수가 나서 제방이 무너진 것만 아니라 그로 인해서 이곳을 건너가지 못한 김주원(金周元)이란 사람의 슬픈 역사를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나는 ‘지수’라는 필명을 가진 분의 브런치 글에서 읽었다.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당시에 이곳 북천 즉, 알천의 북쪽 마을에 살고 있었던 유력한 호족이었고 왕이 될 1순위였던 김주원이 있었는데 왕이 되기 위한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려고 남쪽 월성에 가려고 하던 차에 하루 전에 퍼부은 비로 인해 알천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하니, 결국 왕좌는 38대 원성왕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에게 이어져서 훗날에 그 한을 풀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니, 신라시대 가장 크게 발생했던 ‘김헌창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도 한번 이 작가의 글( https://brunch.co.kr/@jisu9210/36)을 읽어보시라. 그러면 나처럼 당장 이곳에 오게 되리라.
역사는 스토리다. 단순한 바위와 그 위에 새겨진 마애석각(磨崖石刻)에서 이토록 놀라운 사실들을 찾아낸다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하다. 그리고 중요한 교훈이 많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뛰는 가슴을 안고 어디든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역사(歷史)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