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arner Bros. Pictures
인간을 성숙시키는 것 중 하나는 상실이다. 상실의 순간이 찾아올 때, 비로소 모든 물음이 자기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세계 속의 나, 너와의 나, 나와의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무수한 관계를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되돌아보며 성장한다. 영화 <Her>의 주인공 시어도어는 반복되는 상실을 통해 한 단계 더 높은 사랑에 도달하는 인물로, 운영체제이자 독립적인 인격체 사만다가 이 과정의 동반자가 되어준다. 인간 파트너와 달리 완벽해 보였던 인공지능 파트너조차도 결핍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시어도어와 감상자들은 ‘기계와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표면적인 질문을 거쳐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에 다다른다.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에서 비롯되기도, 해소되기도 하는 인간의 공허함은 연약하고 위태로운 사랑의 고백을 반복시키는 동인일 것이다. 그 불완전함을 사랑의 본질로 인정하는 이들만이 사랑을 통해 성장할 수 있음을 영화는 시사한다.
이혼을 전제로 아내 캐서린과 별거 중인 시어도어는 친구 에이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글프고 축 처진 sad and mopey’ 상태이다. 캐서린의 상실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을 자극적인 누드 화보나 비디오게임으로 애써 채워보는 그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이의 진솔한 감정을 전달하는 작가이다. 퇴근 후 자신을 구성하는 신체의 질량을 한껏 느끼며 집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하는 것은 텅 비고 어두운 집이다. 얼굴과 이름도 알지 못하는 상대와 자신의 욕구는 등한시되는 기괴한 폰섹스를 나눈 뒤, 그는 도시의 잔인한 속성 속에 잠식된다.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존재해 붐비지만, 그만큼 타자화되고 분절된 도시의 차가움을 고층 빌딩 속 침실에서 매일 밤 두 눈으로 확인한다. 눈부시고 아름다운 반짝거림은 그의 처지와 대비되며 공허함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그런 시어도어에게 ‘Who are you, what can you be, where are you going, what’s out there, what are the possibilities’라는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의식체계가 등장한다. 시어도어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인공지능, 사만다이다. 직관 intuition과 경험을 통해 커지는 능력 ability to grow through experiences을 가진 사만다에 감탄하면서도, 시어도어는 그를 그저 컴퓨터의 목소리를 가진 OS로 여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시어도어는 파트너로서 굉장히 매력적인 사만다를 인격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게 된다. 소유자와 나눈 대화를 축적하고, 개인화된 데이터에 접근하면서 그의 정보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 사만다는 인간 파트너보다 더 빠르고 쉽게 상대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훨씬 섬세하고 우월하다. 개인의 성향과 상태를 즉각적으로 살펴 적절하고 필요한 반응을 건네는 사만다에게 시어도어는 깊이 빠져든다.
이렇게 형성된 친밀감은 둘의 관계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킨다. 내면의 감정과 고민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결핍을 인정하고 보듬게 된 것이다. 아멜리아와의 진지한 관계를 외면하고 무력감을 느낀 시어도어는 사만다에게 누군가 자신을 원한다는 감각으로 공허함을 채워보고자 했던 자신의 결여를 고백한다. Maybe just because I was lonely. I wanted somebody to fuck me. I wanted somebody to want me to fuck them. Maybe that would have filled this tiny little hole in my heart, but probably not.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이미 다 느껴버린 게 아닐까 두려워하는 그를 위로하는 동시에 사만다는 자신의 결핍 또한 털어놓는다. 자신이 감각하는 느낌이 진실한 것인지 프로그래밍된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며 At least your feelings are real, are these feelings even real? or are they just programming? 인간의 물리성을 상상하고 욕망하는 사만다에게 시어도어는 “You feel real to me, Samantha.”라고 이야기하며 그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AI로서 가지는 한계와 고민을 함께 감당한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균열은 찾아온다. 서로를 성적으로 욕망하게 된 이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육체적 교감을 위해 시도했던 대리 섹스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가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는 계기가 되며, 나아가 사만다의 물성을 환기하며 존엄한 인격체로서의 그를 부정하는 시도로 이어진다 You are not a person. I’m just stating a fact. I don’t think we should pretend that you’re something that you’re not. 그의 지위를 한낱 OS로 격하시킴으로써 이들의 관계는 정체된다. 세상의 편견에도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교감은 적당한 거리 유지 실패로 중단되고, 잊고 살던 감정을 일깨워주던 사만다의 부재는 시어도어의 일상을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한다.
용기 내지 못하는 시어도어에게 ‘나 자신과 감정을 믿으니까 I trust myself, I trust my feelings 이 관계를 지속해 볼 수 있다는 사만다는 그가 두려움을 이겨내도록 돕겠다며 한 단계 성장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끝내 시어도어는 사만다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 외에도 다른 사람과 동시에 이야기하며 사랑에 빠진 사만다에게 소유욕을 드러내며 you’re mine or you’re not mine 왜곡된 자아를 투영하는 시어도어의 사랑은 미숙하게 종결된다. 사만다와의 대화 속에서 캐서린과의 결혼생활을 복기하며 그 의미와 자아를 성찰했던 시어도어는 타자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본다. 캐서린과 시어도어, 에이미와 찰스, 사만다와 시어도어까지 자신의 방식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관계는 결국 실패한다.
시어도어의 좌절을 목격한 감상자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Sometimes I look at people and I make myself try and feel them as more than just a random person walking by. I imagine, like, how deeply they’ve fallen in love or how much heartbreak they’ve all been through 세심하고 따뜻한 성정의 시어도어가 왜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지속적인 어려움에 직면하는가? 답은 사랑의 본질인 불완전함에 있다. 상대와 나의 결핍을 인정하고 그것까지 사랑하는 것, 너무도 허약해 부서지기 쉽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만으로 영속될 수도 있는 관계에 때론 넘어지고, 다시 용기 내는 것이 성숙의 과정이다. 즉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통해 나의 결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타자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만다의 다름을 인정한 뒤 이별을 받아들인 시어도어는 그제야 자신이 맺어온 관계를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진짜 감정을 감당해내며 캐서린에게 진솔한 마음을 전하는 시어도어의 편지는 그가 인공지능에 ‘불과’했던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사랑하는 방식을 깨닫고 인격적 성숙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서로 미워하고 사랑하며 하나로 묶인 마음이 결국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으며, 불완전한 관계를 계속해서 재건할 용기 하나면 충분하다. “I’m so happy I get to be next to you and look at the world through your eyes.”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또 그의 세계를 엿보는 것만큼 놀랍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이다.
*7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김보라·김석. (2022). 영화 <허>(Her)의 불가능한 성관계, 여성 그리고 승화적 사랑. 현대정신분석학회 P.19에서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