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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유배의 계절

by 배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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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때문에 바다가 닫힌 날. 해녀 삼촌들은 꼼짝을 않는다. 이런 날은 무얼 하면 좋을까. 200여 년 전 대정읍(당시는 대정현)에 유배를 왔던 추사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모슬포 운진항에서 버스로 20여 분 남짓. 추사관과 추사유배지가 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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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유배지. 서울에서 유배를 와 9년 동안 살았던 집이다. 안거리(안채)에서는 집주인 강도순이 거처하고, 밖거리(바깥채)에서는 추사가 마을 젊은이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다. 추사가 제주에 온 뒤 글을 배우러 온 자가 대단히 많았고, 그는 탐라의 인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전해진다. 모거리(별채)는 추사가 기거하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할 정도로 갈고 닦아 추사체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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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관. 건축가 승효상은 ‘가장 단순명료한 건축물로 추사 유배생활의 고독한 풍경을 표현하고자 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 건축물을 짓기 위해 얼마나 자주 <세한도>를 들여다보고, 얼마나 오래 제주에 머물렀던 것일까. 건물 안에 앉아 있으려니 화려하지 않아 소박하고, 소란스럽지 않아 고요한 정적이 느껴져 건축가는 추사를 제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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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여기 있는 것은 영인본이며,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추사가 그린 그림이다.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적적한 분위기 속에 추운 겨울의 청절함을 느낄 수 있다. 명작을 남긴 추사도 추사지만, 유배 간 스승을 잊지 않고 의리를 다한 이상적의 인간미를 되새긴 그림이었다.

555-세한도.jpeg <세한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원본을 만날 수 있다.
222-추사관외관.jpg <세한도>에서 모티브를 따온 추사관의 일부.
333-추사관내부.jpg 추사관의 내부.
444-추사유배지.jpg 추사유배지. 찾는 이가 별로 없어 고즈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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