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것은 팔선의 짜장면값 뿐
지난 7월 28일 헌법재판소가 논란의 ‘김영란법’ 을 합헌 결정하면서, 오는 9월 28일부터 시행된다.
김영란법의 내용을 요약하면 대강 이렇다.
공직자, 공립 및 사립학교 임직원, 언론사 임직원 등이 대상이 된다.
대가성이나 직무관련성이 없더라도 동일인에게 1회 100만원 이상, 연 300만원 이상의 금품을 받으면 처벌받는다.
직무와 관련하여 금품을 받으면 2의 규정과 관계없이 처벌받는다.
배우자가 수수 금지 금품을 받은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단 원활한 직무수행 또는 사교, 의례, 부조의 목적으로 대통령령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 음식, 경조사비, 선물 등을 제공하는 것은 허용된다. 현재 대통령령은 음식은 3만 원, 선물은 5만 원, 경조사비는 10만 원 이내의 범위에서만 허용하고 있다.
한국 공직사회는 부정부패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 불거진 넥슨 게이트는 상징적이다. 검사장의 뇌물 수수 의혹에, 현직 청와대 민정수석이라는 여권 최고 실세의 부동산 거래 문제가 불거지면서 공직자들의 윤리는 땅에 떨어졌다. 이런 실정에도 불구하고, 대가성과 직무관련성을 명확히 증명할 수 없는 금품 수수는 처벌할 방법이 없다는 비판이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김영란법은 일종의 충격요법인 셈이다.
그러나 언론은 김영란법에 마냥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법이 정식 명칭인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은 고사하고, 약칭인 ‘청탁금지법’으로도 잘 알려져있지 않다는 데 의문을 제기한다. 김영란 전 대법관의 작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청탁금지법’이라는 법의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약칭 대신 ‘김영란법’이라는 불분명한 약칭을 사용함으로써, 공직사회의 부패를 해소하려는 이 법의 목적을 가리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뭐, 음모론은 여기까지. 이 법에 대한 언론의 입장은, 단순히 이 법을 ‘김영란법’이라 호명하는 게 문제가 아니니 말이다.
김영란법 시행이 가시거리에 들어온 뒤 언론이 내놓은 수많은 기사들은 사실 대강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일보의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자.
김영란법 시행 후…신라호텔 팔선에서도 “짜장면 통일이요”, 중앙일보
‘김영란법’에 저촉되지 않는 유명 호텔의 3만원 미만 메뉴를 소개하는 기사다. 당연히 sns 등에서 엄청난 욕을 들었다. 서민은 고사하고 일반 중산층의 눈높이에도 전혀 맞지 않는 신선놀음처럼 보인 탓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자.
더플라자 호텔의 레스토랑 ‘세븐스퀘어’의 닭가슴살을 곁들인 시저샐러드는 2만3000원, 치즈버거는 2만8000원, 훈제연어샌드위치는 2만6000원이다. 다만 후식을 같이 먹기는 어렵다. 아이스크림 하나(1만 3000원)만 시켜도 3만원이 훌쩍 넘기 때문이다.
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애당초 2만 8천원짜리 치즈버거와 1만 3천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2천원짜리 치즈버거와 1천 3백원짜리 아이스크림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기사는 한술 더 뜬다.
여야 단골 ‘대방골’ 3만원 이하는 ‘어린이옛날불고기’뿐, 중앙일보
더민주의 한 중진의원이 동료 의원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장면도 보였다. “3만원? 말이 되나. 어지간한 저녁은 7만원은 넘잖아.” 그는 3만원을 식사비 한도로 정한 것과 관련해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아. 밥도 먹지 말라는 얘기지…. 법, 그거 누가 만들었어?”라고도 말했다.
안규백 더민주 의원은 “단체 식사를 잡을 때 설렁탕 같은 간단한 식사 외에는 어려워졌다”며 “지역에서도 매출이 급감한다고 난리”라고 전했다. 그는 “김영란법을 엄격히 해석하면 (직무 관련성이 있는) 의원들끼리 식사를 주고받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며 “ 이제 북한의 ‘5호담당제’ 같은 감시 분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주장했다. 유성엽 국민의당 의원은 “보좌진에게 3만원이 안 넘는 식당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며 “앞으로 2차는 하지 않아야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마치 김영란법을 고도로 옹호하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단체 식사로는 설렁탕 같은 간단한 식사를 하되 2차는 갖지 않는다니, 얼마나 훌륭한 정치 문화 변화란 말인가(…). 더민주와 국민의당 의원의 발언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한심하다.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언론의 일원으로서, 더민주 의원들을 욕먹이기 위해 일부러 인용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농축산계나 요식업계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논조의 기사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저 조선일보의 ‘한우의 한숨, 굴비의 비명’이다.
한우의 한숨, 굴비의 비명, 조선
사실 3만 원이면 밥도 먹지 말라는 얘기라는 식의 위 보도보다는 훨씬 경청할 데가 있다. 고가의 선물세트를 주요 수익원으로 삼는 업체들에게 타격이 될 수 있음을 부인할 순 없다.
[취재파일] 묵살해선 안 될 ‘김영란법’ 피해 주장들, SBS 취재파일
그러나 직격탄을 맞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화훼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그렇다면 직접 사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지극히 단순한 반론에도 할 말이 없어지는 게 사실이다. 직무상 연관된 사람들끼리 고가의 선물을 주고받는 관행은 미풍양속도 아니거니와, 일반적인 눈높이로 볼 때는 오히려 인습에 불과하다. 인습과 적폐에 의지해, 심지어 부정부패가 끼어들 여지마저 있는 선물 관행을 지켜야 하는지 사람들은 의문을 품고 있다.
“식당손님 크게 줄어 임차료도 못내는데…종업원부터 잘라야죠”, 매일경제
심지어 시행되지도 않은 김영란법 때문에 식당손님이 미리부터 줄었다는 매일경제의 기사 쯤 되면 이젠 비웃음거리가 되고도 남는 것이다. 물론 김영란법으로 야기될 타격을 미리 대비할 순 있겠지만, 기사 제목은 그런 뉘앙스가 아니다.
그냥 공직자들과 언론인들, 교육자들이 접대를 받지 않고 자기가 먹은 값은 자기가 치르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왜 굳이 접대를 꼭 받겠답시고 이런 기사를 쓰냐는 비판도 거세다. 더치페이를 하면 호텔 식당을 가든 고급 한정식집을 가든 김영란법이 건드릴 게 없기 때문이다. 언론인이 김영란법의 규제 대상이기 때문에 이런 기사를 쏟아내는 게 아니냐는 지적은 결코 설득력이 낮지 않다.
경제지들은 노골적인 논조의 사설을 쏟아내며 김영란법을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모두 근거가 빈약하고 논조가 선정적이라 한 언론사의 사설로서는 심각하게 자격이 미달한다.
[사설] 김영란법, 부패는 못 막고 소비만 위축시킬 우려 크다, 매일경제
[사설] 김영란법, 초기 혼란 소비 충격 최소화 방안 찾아라, 매일경제
매경의 사설은 터무니없이 근거가 빈약하다. 하지만 역시 한경의 사설에 비하면 매경의 사설은 차라리 품격이 느껴진다 하겠다.
[사설] 저급한 입법에 합헌 면죄부 준 헌법재판소, 한국경제
일부 언론은 국회의원이 김영란법에서 예외라는 기사를 쏟아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세계일보의 다음과 같은 사설을 보자.
[사설] 김영란법 적용 ‘우리만 예외’라는 뻔뻔한 국회의원들, 세계일보
하지만 이는 오히려 지나치게 단순화된 주장이다. 공분의 대상인 국회의원을 희생양삼아 김영란법을 흔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다음 기고는, 김영란법 적용대상에서 국회의원이 제외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기고] 김영란법 적용대상에서 국회의원은 제외?, 머니투데이 THE 300
먼저 금품수수의 경우 국회의원은 예외 없이 김영란법 적용을 받는다. (…) 식사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 상한선도 똑같이 적용된다. 1회 100만원을 초과하는 금품수수 시 직무관련성이나 대가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형사처벌 받는 것도 같다.
부정청탁과 관련해서도 국회의원은 김영란법 적용을 받는다. 따라서 이 법에서 부정청탁 금지유형으로 열거하고 있는 각종의 인허가 인사 예산 포상 수사 병역 단속 감사 시험 계약 심의 평가 등에 관하여 국회의원이 부정청탁을 하는 경우 다른 공직자와 마찬가지로 과태료를 부과받는다. 다만, 김영란법은 국회의원이 “공익적인 목적으로 제3자의 고충민원을 전달하는 행위”를 명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 규정을 두고 국회의원은 김영란법 적용대상에서 빠져나갔다는 논란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고충민원 전달행위는 명시적인 허용규정이 없더라도 할 수 있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김영란법은 금지되는 부정청탁의 유형을 15가지로 하나하나씩 열거하는 입법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그에 해당하지 않으면 법 규율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즉, 흔히 김영란법 하면 생각하는 금품수수 금지 조항은 국회의원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국회의원을 비롯해 선출직 공직자, 정당, 시민단체 등 시민을 ‘대표’한다 할 만한 공직자들은 공익적인 목적에서 고충민원을 전달하거나 사업, 정책 등을 제안, 건의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이는 정당이나 시민단체의 정상적인 활동 영역을 명시적으로 보장하기 위함이지, 부정청탁을 허용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게 기고자의 설명이다.
많은 언론은 무엇이 공익적인 목적인지 구분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김영란법은 이미 부정청탁의 유형을 15가지로 열거하고 있으므로(법 제 5조), 저 조항으로 인해 부정청탁으로부터 국회의원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물론 김영란법에 문제의 소지가 없는 건 아니다. 언론인 등이 법의 적용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는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다. 사인 간의 경제활동이나 소비활동을 지나치게 규제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농축산업계에 타격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 보도는 희한할 정도로 진지하지가 못하다. 신라호텔에서 코스 요리를 못 먹을까 걱정하는 중앙일보의 보도나, 한우나 굴비 세트를 선물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조선일보의 보도로부터는 김영란법의 후폭풍을 걱정하는 진지한 언론인의 자세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선정적으로 이 법을 까내릴 수 있을까 하는 하이에나의 냄새가 풍긴다. 매일경제나 한국경제 등 경제지의 사설은 한 술 더 뜬다. 날카로움은 없고, 마구잡이로, 무턱대고 물어뜯는 우악스러움만이 남았다.
이런 선정적인 보도는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조소든 분노든,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뿐이다. 때로는 박근혜, 때로는 국회의원들, 또 때로는 여당과 야당이 다같이 싸잡혀 욕을 먹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매한가지다. 김영란법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인들 덕분에, 다만 이번에는 좀 독특하게도, 언론인들이 분노와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팔선의 짜장면 값과 대방골의 어린이옛날불고기 값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레기’들에 대한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의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