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10년 전쯤 일이다. 메인작가님 주도하에 작가회식이 있었다. 촉박한 제작 일정에 시달리던 중 단비 같은 시간이었고 맛있는 식사와 가벼운 음주까지 더해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던 중 한 선배의 말이 화두에 올랐다.
"저는 집에 TV 없어요"
그 선배는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고,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다 보니 TV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따로 두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무렵 나도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와 촬영장에 묶여 있어 TV를 볼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했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들은 메인작가님의 생각은 달랐다.
"야 그래도 방송작가 집에 TV가 있어야지."
메인작가님의 장난 섞인 핀잔에 선배는 TV 볼 시간이 없단 말로 응수했고 그 주제는 술자리의 가벼운 가십거리로 지나갔다.
그리고 최근, 이 대화가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그저 재밌는 농담이었던 말들이 점점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일까?
며칠 전 MBC 노동조합에서 올린 글을 봤다.
MBC의 하루 광고매출액은 1억 4천만 원.
하루하루 매출을 확인하는 것이 두렵다는 글이었다.
액수 단위만 놓고 봤을 때는 꽤 큰 액수라 생각할 수 있지만, 방송사에 딸린 1,700여 명의 임직원(심지어 작가, 카메라 감독 등 외주인력은 포함 안 되어있을게 뻔하다)을 생각하면 큰 금액이 아니다.
그리고 덧붙여 이 매출은 유명 어린이 유튜버의 광고수익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다. 웹 콘텐츠의 수익이 방송사를 위협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지표를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방송의 종말을 눈앞에서 보는 기분이랄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영상 콘텐츠의 축은 확실히 모바일, 웹으로 기울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만 해도 즐비했던 비디오 대여점이 지금은 자취를 감춘 것처럼,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며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다. 사람들은 더 이상 TV 앞에 앉아 방송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1시간이 넘는 긴 예능보단 5분 컷의 짧은 클립을 선호한다. 최근 여동생은 출퇴근 길에 클립으로 드라마를 본다고 했다. 짧은 시간에 주요 장면을 다 볼 수 있단 말과 함께.
그리고 어쩌면 나도 곧 이 직업(방송작가)과 이별해야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제작진은 어디로 가게 될까? 영상 콘텐츠를 소비하는 층은 점점 확대되고 있는데, 내 일자리가 사라질 걱정을 하다니. 아이러니하다.
방송가의 위기의식은 몇 년 전부터 지속됐다. 세상의 흐름을 읽고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감각은 생각보다 날카롭다. 지금까지 방송이 제공됐던 것처럼 똑같이 콘텐츠를 제작하고 소비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시청률표는 이미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위기를 감지해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대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방송국에서 나름 성실하게, 하지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바깥세상의 콘텐츠들은 공격적인 속도로 덩치를 키우고 성실하게 규모를 확대해갔다.
양측 모두 자신의 위치에서 성실하게 움직였지만, 방향이 달랐고 먼저 위치를 선점한 방송가는 새 콘텐츠의 성장을 작은 일로 치부해버렸다.
하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미디어 시장은 단단한 평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컨테이너 벨트였다. 그리고 우린 그것을 간과했다. 미디어 시장이란 컨테이너 벨트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꾸준히 뒤로 움직였다. 그 결과 제자리에서 걷던 방송국은 뒤로, 적극적으로 움직이던 모바일 시장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격차는 소비자들 만큼 눈치챌 만큼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5-6년 전쯤 한 방송국에서 일할 때였다.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고 있었고 저녁식사를 사러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8-9시여도 방송국에는 사람들이 많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고 새벽에도 수많은 프로그램의 제작진이 드나든다.
내가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을 때, 다음 것을 탈까 순간 고민했다. 방송국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깔끔한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 무리가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국장급 이상의 중역들임을 알 수 있었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그분들은 친절하게 타라고 했고, 나는 거북이처럼 목만 빼서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뒤돌아 굳게 닫힌 철문을 바라봤다. 얼른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엘리베이터 속도는 느리기만 했고, 잠시 다녀올 요량으로 핸드폰도 이어폰도 두고 나왔던 지라 뒤에서 나누는 대화를 강제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모바일로 영상 보는 게 유행이라던데 우리도 그쪽 고민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 해야지. 포털 사이트로 보게 하면 되지 않겠어?”
“포털 사용자가 많지? 요즘 뭐가 유행인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라지는 중역들의 뒷모습을 보며 ‘누가 포털로 영상을 봐요. 더 크고 편한 SNS랑 유튜브를 두고’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보다 포털의 힘이 강력하던 시기지만, 나도 내 주변도 이미 유튜브에 올라오는 영상 콘텐츠를 소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크리에이터들의 영향력에 대해 슬슬 이야기 나오던 시점에 나온 그 대화는 내가 느끼기엔 너무 다 지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일개 작가인 내가 의견을 낼 수 있는 기회는 없었고,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누구나 조금만 스마트폰 속 세상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문제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포털 사이트에 방송 클립이 따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지난 후에는 (프로그램에 따라) 페이스북에도 클립을 업로드하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체감은 같은 내용이어도 포털 사이트보다 페이스북에 올라간 영상의 파급력이 더 강했다. 포털은 사람들이 정보를 확인하고 떠나는 회전율 높은 식당이라면 SNS는 오래 앉아 머물며 대화하고 소통하는 카페와 같았기 때문이다. SNS에서 소비된 콘텐츠는 입소문을 타듯 퍼지고 퍼졌다. 하지만 확실한 한계선이 보였다. 입소문이 닿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존재가 더 필요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2-3년 전부터는 유튜브에 방송사 채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존 인기 예능의 클립과 과거 아카이브를 올리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국내 IP로는 플레이가 불가능했지만, 어느 순간 그런 규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일정기간 한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틀어주는 연속방송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가까운 예로 코로나 사태로 3주간 결방된 tvN 예능 [대탈출]은 결방된 기간 동안 지난 두 시즌 영상을 라이브 스트리밍 했다. 스트리밍에 접속한 인원은 최소 만 명 이상이었다. 그리고 3주 뒤 다시 시작한 시즌3 방송은 약간의 시청률 하락은 있었지만 큰 타격 없이, 그간 양산된 신규 팬들을 무기로 더 공고해졌다.
[삼시세끼 어촌편5] 방영을 기념하며 라이브 스트리밍 진행되기도 했고, 지금도 유튜브를 보면 몇몇 방송사 채널에서 자체 연속방송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변화의 흐름은 마침내 방송국이 모바일 세계의 속성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연속방송을 위해서는 연속방송이 가능한 TV 콘텐츠 제작이 필요한데 그 부분을 어떻게 엮어갈지가 문제인 것 같다.
모바일, 웹 콘텐츠를 보는 사람은 두 층으로 나뉜다.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완성된 콘텐츠를 보는 층과
무료,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라이브 스트리밍을 찾는 층
전자는 IPTV, 넷플릭스, 웨이브, 왓챠 등으로 이미 어느 정도 판이 잡히고 있다. 주소비 분야는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영역의 콘텐츠고 20대 후반 30대부터 주 소비층이다.
후자는 현재로썬 유튜브가 압적이다. 예능, 음악방송 등 즉각적이고 소통이 될수록 흥미를 느끼는 콘텐츠가 주를 이룬다. 이 콘텐츠의 주 소비층은 10대 20대 젊은 층이다.
젊은 층들은 어릴 때부터 크리에이터의 라이브 방송에 익숙해져 있는 세대다. 이미 그들에게 영상 콘텐츠는 양방향 소통이라는 인식이 많이 잡혀있고, 이런 젊은 층을 잡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본다.
더불어 최근 들어 후자 콘텐츠에 접근하는 연령대가 늘어나는 추세라 앞으로 소비층 범위는 더 넓어질 것이라 본다.
방송사에서 시청률 지표보다 더 중요하게 2049 타깃층이다. 그들이 보고 접하는 세상이 달라졌다면, 콘텐츠 제작자는 그 니즈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당연하다.
물론 모든 콘텐츠가 똑같이 갈 순 없다.
개인적으로 방송사가 고민해야 할 것들은 아래라고 본다.
각 콘텐츠별 주 소비층 파악 및 전략
영상 길이, 라이브 스트리밍, 양방향 소통 연구
나는 방송계에서 10년째 일하고 있고, TV뿐 아니라 다양한 영상 콘텐츠 헤비 소비자이기도 하다. 전문적으로 연구를 하거나 공부해본 적은 없어서 내가 볼 수 있는 세상 수준으로 좁을 수 있고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현업에서 일하고 있고 밥그릇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려 한다.
나는 계속 영상 콘텐츠 일을 하고 싶고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공급자가 변하는 게 맞으며
내가 봐도 재밌는 콘텐츠가 설득력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제작자이자 소비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