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예능의 등장 : 100분을 10분으로 압축하려면?

러닝타임이 줄면 분량 귀신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by 심미금


2014년, 한 토론회 기조연설에서 유느님은 말씀하셨다.


방송 시간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계속 늘어나다 보면
시청자가 보는 재미의 밀도가 떨어진다


비장하게 느껴지는 이 연설은 2014년 방영된 [무한도전 선택 2014]에서 나온 발언으로, 예능의 본질인 재미를 위해서는 양보다 질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 에피소드는 무한도전의 향후 10년을 책임질 리더를 뽑는 회차로 기존의 예능을 돌아보고 앞으로 예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회차다.


2014년은 지상파 방송 3사의 예능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무한도전', '1박 2일', '런닝맨' 등 각 방송사 간판 예능들이 줄지어 등장했고, '꽃보다 할아버지', '마이 리틀 텔레비전', '나 혼자 산다', '정글의 법칙' 등 다양한 포맷과 아이템의 방송들이 나오던 시기였다. 편성표를 돌려가며 볼만큼 재밌는 예능 프로그램이 많았다.


예능에 대한 관심은 높은 시청률로 증명됐고, 방송사들은 더 많은 관심, 화제를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원래 관심을 받으면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 지기 마련이다


모두가 열심히 하다 보니 점점 경쟁 과열로 이어졌고, 그 결과 주말 예능 러닝타임 전쟁이 발발했다. 숨길 의지가 없는 이 전쟁은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났고 온라인으로까지 이어지며 모두의 싸움이 되어버렸다.


그전까지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일요일 예능의 경우 오후 4시 55분에 시작해 90-95분인 러닝타임을 지키는 것이었다. 누구도 명시한 적은 없지만, 예능을 만드는 제작진도, 방송사도, 시청자도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고, 5시쯤 TV를 켜고 예능을 보며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동계올림픽 편성으로 각 방송사간 프로그램 시작시간에 차이가 생기면서부터였다.


처음에는 올림픽 경기 편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지만, 이 변칙 편성은 시청률 상승이라는 큰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렇게 결과가 나오자 애초에 누구도 합의한 적 없는 암묵적인 룰은 쉽게 깨졌고 강호의 도리는 바닥에 내던져졌다.


이로 인해 고통받은 것은 애초에 90분으로 계획한 프로그램을 억지로 늘려야 했던 제작진과 봐도 봐도 끝나지 않는 예능에 피로해진 시청자들이었다.


누군가는 이기고 있는 거 같은데, 이긴 사람이 없는 긴긴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뭐 더 괜찮은 거 없니? 이게 다야?”

“너네 팀이 40분은 맡아줘야 해”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고, 한 아이템을 담당하는 작가가 된 이후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아닐까 싶다. 편집된 영상을 보며 팀장, 메인작가, 국장님 등이 이런 말을 꺼내면 나는 내 눈앞에 놓인 프리뷰 노트를 빠르게 눈으로 훑으며 윗분들이 만족할 요구사항을 찾는다. 프리뷰는 촬영 영상의 모든 것을 기록한 문서인데, 30초 단위로 멘트, 장소, 특이사항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촬영 분량이 워낙 많다 보니 쉽게 볼 수 있게 만드는 자료다.


방송국에는 시사라는 시스템이 있다. 편집된 영상을 보며 하는 회의를 말하는데, 함께 영상을 보며 덜어낼 부분은 덜어내고, 더 재밌는 내용은 강조하는 등의 회의가 이어진다. 모든 제작진이 참여하는 자리인 만큼 압박감이 엄청난데 특히 내 아이템이 도마에 오르거나 처음부터 다시 구성을 짜야할 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 진다.


물론 이 시사 전에 이미 프리뷰 파일은 마르고 닳도록 보며, 쓸만한 멘트와 장면을 다 쏟아부어놨기 때문에 다시 본 들 뾰족한 수가 안 나오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전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팀장급 입장에서는 러닝타임을 충족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더 없냐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방송작가가 되기 전에는 몰랐던 일이다. 막연히 출연자, 방송 아이템, 섭외 등에 쪼들리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어도 '분량'을 채운다는 압박감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해봤다. 촬영장에서 분량이 넘치게 나오면 재밌지만 빼야 하는 부분들이 발생하고, 촬영이 잘 안 풀렸을 때는 억지로 분량에 맞춰 늘려야 한다.


그렇다 보니 언젠가부터 방송을 준비할 때 분량이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부터 하게 됐다. 방송전쟁으로 러닝타임이 길어진 이후에는 더 말할 나위 없고. 마치 나에게 해를 끼치진 않지만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엄청 신경 쓰이게 하는 유령 같은 존재랄까. 아이템을 정할 때도, 촬영을 할 때도, 편집할 때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외치는 느낌이다.



분량 챙겼니?



그런 의미에서 숏폼 예능이 정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아직 갈길이 멀어 보이지만 세상은 눈에 띄게 변하고 있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20%를 넘나들던 예능 시청률이 점점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으니 이에 대한 대안책이 필요할 것이다.


방송국 중에서 새로운 형태 도입을 가장 빠르게 하는 CJ에서 이 숏폼 예능을 도입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3월 '금요일 금요일 밤에'가 종영했다. tvN 흥행 보증수표 나영석 사단의 작품치고 매우 소소한 최고 3.4% 시청률로 마무리됐고, 최근 방송 중인 '삼시 세 끼 어촌 편 5'의 최근 시청률은 12.2%인 것을 봤을 때 더 확실한 차이가 보인다. 웹에 공개된 영상 콘텐츠의 조회수도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이 프로그램이 실패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진 않다고 대답할 것 같다.

본방사수의 개념이 많이 사라지면서 방송 시청률이 떨어진지는 오래됐다. 지금 방영 중인 프로그램도 그렇고, 내가 tvN에서 일할 때도 시청률 3%를 이야기했었다. 나영석이라는 네임밸류에 비해 아쉽다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고 본다.


'금금밤'은 각기 다른 소재의 6개의 숏폼 코너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예능 프로그램이다. 15분 내외의 짧은 영상을 여러 개 엮어 기존 예능의 러닝타임을 유지한 것인데, 최근 10대 20대 사이에서 자리 잡은 스낵 컬처(과자를 먹는 5~15분 이내에 문화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뜻)를 방송으로 가져오기 위한 시도인 셈이다. 지난해 화제가 됐던 '신서유기 외전: 삼시 세 끼-아일란드 간 세끼’, ‘라면 끼리는 남자’가 금금밤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숏폼 콘텐츠는 매력적이다. 10-1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액기스만 보여주고 군더더기 없이 끝내는 묘미까지.


메조미디어의 조사를 보면 10대가 선호하는 1회 동영상 길이는 10분 내외가 가장 많다. '틱톡'어플 이용자 수는 지난해 보다 11% 이상 증가했고, 유튜브와 넷플릭스에서도 숏폼 플랫폼과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방송사는 물론이고 대형 기획사, 대기업까지 나서 숏폼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달려드는 이유가 있다. 금금밤은 여기에 방송 운영상의 고민까지 더했다고 본다. 일주일에 한 번 10분만 내고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요즘 세대가 요구하는 짧은 영상과 방송국이 요구하는 긴 러닝타임을 모두 충족시키기 위한 나름의 도전인 셈이다.


새로운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금금밤은 시청률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물론 예능은 재미가 1순위이고 시청자들의 이목을 기대만큼 이끌어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것이고 금금밤은 막을 내렸어도 스마트폰 안 세상을 보기 위한 시도는 계속될 것이니 말이다.




금금밤을 보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다. 각 방송사의 정보 프로그램과 매우 유사하단 점이었다.


생방송 정보 프로그램에 경우 스튜디오를 두고 음식, 여행, 휴먼 등 각기 다른 내용의 VCR이 나온다. 중간중간 등장해서 코너명을 설명하는 아나운서의 존재를 뺀다면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은 금금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능의 경우에도 VCR 코너만으로 구성된 경우도 있지만, 같은 형태라도 교양과 예능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교양은 각 영상의 개별성이 강조된다면 예능은 전체의 일부분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예능은 전체 긴 호흡을 보고 다 같이 움직이는 편이다. 2010년대 들어 가장 보편화된 관찰 프로그램의 경우 담당 출연진이 다르다 해도 큰 주제(ex. 아이, 싱글남, 부부, 1인 가구)가 같기 때문에 아이템이 중복되지 않도록 하고, 각 코너가 프로그램 안에서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게 신경 쓴다.


MC와 게스트가 영상을 보며 토크하는 스튜디오 촬영분이 그래서 필요한데, 이들의 존재는 이 프로 전체, 출연자가 하나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프로그램 종영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을지라도 이 세계에서 우린 하나다.


정보 프로그램의 경우 영상 안에 내용에 집중하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이끄는 스튜디오 촬영과 MC인 아나운서가 있어도, 영상을 소개해주고 그 안에 내용에 집중한다. 그렇다 보니 코너와 코너를 넘나드는 유대감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애초에 방송 목적이 '정보전달'에 맞춰져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금금밤 역시 철저하게 코너들을 분리했다. 유튜브, 넷플릭스 같은 웹 콘텐츠에서 알고리즘에 따라 주제가 다양한 영상들을 나열해주지만 모든 영상을 이어 주진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연결의 부재'가 숏폼 콘텐츠의 핵심이자, '낯섦'을 만들어 냈다고 본다.


금금밤에 대한 평가를 보면 '신선하다' '뚝뚝 끊긴다'는 평가가 나뉘는데, 긴 호흡과 출연자들 간의 유대가 확실히 보이는 예능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코너가 완벽하게 분리되는 옴니버스 형식은 낯설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 내가 했던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서 중간에 스튜디오 촬영분을 뺀 일이 있었다. VCR 영상 내용이 주가 되던 프로그램이었고 스튜디오 촬영에서는 리액션&토크를 따는데 집중했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있냐는 반문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야외 촬영에 스튜디오 촬영을 한 번 더 하는 관찰 예능 시스템은 짧은 시간 안에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제작진에게는 부담이었고, 제작비가 줄어드는 등의 이유로 스튜디오를 더빙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결과는 흥행 참패. 촬영과 더빙이 주는 느낌은 너무나도 달랐다.


심지어 연예인들이 내레이션을 했고, 녹음 현장을 카메라로 촬영해 넣었지만, 스튜디오가 주던 느낌을 살리기에는 부족했다. 똑같은 구성에서 딱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예능적 재미와 공감은 확 반감됐고 그 결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다 종영했다. 그땐 단순히 더빙 문제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유대감의 결여가 엄청난 영향을 준 것 같다.


똑같은 숏폼 예능이었던 '삼시세끼 - 아일란드 간 세끼' '라끼남'과 '금금밤'의 평가가 달랐던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앞선 프로들은 하나의 주제에 집중한 반면, 금금밤은 내용도, 출연자도, 아이템도 너무 달랐다. 보통 유튜브를 보더라도 알고리즘을 따라 관심 있는 주제와 연결된 영상을 보게 되는데, 내 흥미를 끌지 못하는 내용이 나온다면 TV 채널을 돌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숏폼 콘텐츠는 이제 시작이고, 여전히 많은 프로그램들이 최소 1시간 최대 1시간 40분 이상을 매주 내보내는 만큼 적절한 도입을 위해서는 연구가 많이 필요하겠지만.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계속 보게 만드는 연속성과 출연자에 대한 유대감을 만들어 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웹 콘텐츠가 유행이라 해도 TV와 웹에는 차이가 있으니, 서로의 문화를 나에기 맞게 적용하는 것이 필수다. 하다 못해 유튜브 브이로그도 주인공과 유대감을 느끼고 관심이 가야 다음 클립을 눌러보니 말이다.




시청률과 광고 수익을 위해 무작정 긴 러닝타임을 갖는 것보다는 시간을 줄이고, 웃음의 밀도를 높여야 한다는 유느님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똑같은 분량이 있다면 늘리는 것보단, 줄이는 것이 더 재미면에서 나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숏폼 예능이 정착되면 분량 귀신에 쫓기는 일이 좀 덜할까 하는 작은 희망도 가져봤지만,

곧 아니다는 결론이 나왔다.


짧은 영상 안에 납득되는 스토리와 공감되는 웃음을 넣으려면 더 정교해져야 한다. 그냥 방송의 하이라이트를 잘라놓은 클립과는 전혀 다른 문제니 말이다. 원래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을 잘하는 것이 진짜 프로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 다닐 때부터 시문학 수업 때 길게 늘여 쓴 시를 산문시라고 박박 우기던 나는 취약점을 들킨 기분마저 든다.


'이제 분량 챙겼니?'란 말 대신 '더 짧게! 하나에 집중해야지'란 말을 듣고 분량 줄이기를 고민하게 될 것이 뻔하다.


어젠 90분을 100분으로 늘리라고 하더니, 오늘은 갑자기 이 100분을 10분으로 줄이라고 하다니.


대학교 2학년 때 교수님이 엽편 소설을 과제로 내줘서 머리를 쥐어짜던 시절로 돌아가는 걸 눈 앞에 둔 느낌이다.

(엽편소설 : 나뭇잎 넓이 정도에 완결된 이야기를 담는 단편소설보다 짧은 소설)

과거의 내가 분량을 늘리기 위해 억지로 프리뷰 노트를 보고 또 보면서 멘트와 장면을 찾았던 것처럼,

미래의 나는 분량을 줄이기 위해 억지로 프리뷰 노트를 보고 또 보면서 빼낼 장면과 멘트를 찾고 새 스토리 라인을 짜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가올 2020년대는 또 다른 적응의 시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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